과학책은 언제부터 읽어야 할까?
# 6. 과학책은 언제부터 읽어야 할까?
수학과 과학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서
아이를 과학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과학의 시대에도 신화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우르릉 쾅!
번개가 내리꽂히더니 천둥소리가 요란해졌어요. 아이는 깜짝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어요.
“무슨 소리야?”
“응. 천둥 치는 소리야.”
“천둥? 천둥은 왜 치는데?”
순간, 저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어요. 제 지식이 짧은 탓도 있지만, 이제 겨우 만 세 돌이 지난 아이에게 설명해 주기도 애매했어요.
“용이 하늘에 올라가느라고 그래. 이렇게 하늘로 올라가면 용이 비를 뿌려.”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해줬어요.
“정말?”
“그럼, 엄마가 오늘이 이야기를 해줬잖아. 거기서 오늘이가 용을 만났잖아. 여의주를 두 개나 물고 있어서 하늘에 못 올라간 용. 그 용이 하늘에 올라갈 땐 그런 소리가 나는 거야.”
아이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그때부터 아이는 천둥소리를 더는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지요.
“엄마, 용이 하늘로 올라가나 봐.”
하며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어요. 당시 제가 살던 곳은 중앙대학교에서 가까웠어요. 가끔 저녁이면 산책 삼아 중앙대학교에 놀러 가기도 했는데, 그곳 연못에는 지구를 휘감고 있는 청룡상이 있어요. 아이랑 저는 그곳에서 청룡이 물고 있는 여의주를 보며 즐거워하곤 했어요.
제가 이렇게 설명해 주는 모습을 보고 주위에서 걱정하시는 분들도 간혹 있었어요. 과학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다고요. 나중에 과학책을 볼 때 혼란스러워진다고요. 처음엔 저도 약간 갈등하긴 했죠. 하지만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해줘도 아이에게 어려운 내용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옛날 사람들이 신비한 자연 현상을 보며 신화를 만들어 낸 것처럼 받아들여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렇게 신비감을 갖고 있을 때 관심도 더 많아질 거라 여겨졌고요. 과학적인 지식은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 말이에요.
비가 오는 날 벌어질 일들 상상하기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는 기분이 들뜨곤 했어요. 비록 진짜 하늘로 올라가는 용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나 봐요. 세찬 비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폭우, 보슬보슬 내리는 비, 주룩주룩 내리는 비……. 이런저런 비의 모습을 발견한 것도 이때였어요. 혹시나 용이 보일까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알게 된 거죠.
가끔은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쓰고 일부러 나갈 때도 있었어요. 몇 날 며칠 동안이나 비가 내리면 집 안에만 있기 너무 심심해지잖아요. 이럴 때 비가 와도 밖에 나가줘야 해요. 덕분에 우산이 뒤집힐 정도로 거센 폭풍에 한 시간 이상이나 걸어 다니다가 온몸이 쫄딱 젖어서 들어온 적도 있었지요. 물웅덩이에서 첨벙거리는 것도 비 오는 날의 재미죠. 엄마가 함께 첨벙거리면 아이는 더 좋아했어요. 또 슬리퍼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첨벙거리는 걸 더 좋아했죠. 네 살에서 다섯 살, 이 무렵 아이는 비를 그 어느 때보다 좋아했어요.
이 무렵에 만난 책이 《비가 오는 날에…》(이혜리 글/정병규 그림/보림)였어요.
이 책에는 조금은 우울해질 수 있는 비 오는 날을 유쾌하게 바꿔낼 재미난 상상이 가득해요. 이런저런 모습으로 내리는 비의 모습을 보는 것도 아주 신나요. 비 오는 날, 여러 동물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보는 것도 유쾌하고요. 그 동물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똑 닮아 있어서 더 좋아했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아이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용이었어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하늘에서 비를 뿌리고 있는 모습을 드디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아, 용이 이렇게 비를 뿌리는구나.”
과학에 처음 눈뜰 때
그 뒤 시간이 흘러도 아이는 비가 올 때면 늘 용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언제까지나 용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지요.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세상에 신기하고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요.
아이가 다섯 살이 된 어느 날이었어요. 저는 아이에게 거실에 널어놓은 빨래가 다 말랐는지 물었어요.
“응, 다 말랐어. 그런데 여기에 있던 물은 어디로 갔어?”
아무래도 아이에게 과학적으로 설명해 줄 때가 된 것 같았어요. 저는 아이에게 빨래에 있던 물이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고 말해줬지요.
“물이 왜 사라지는데?”
“그럼, 공기가 물로 가득 차면 어떡해?”
아이는 궁금한 게 자꾸만 늘어났지요.
저는 물을 끓여서 보여줬어요. 아이는 물이 끓으면서 나오던 수증기가 위로 올라갈수록 색깔이 엷어지다가 사라지는 걸 눈으로 봤지요. 물이 수증기가 되어 안 보이게 되는 것이 신기했던가 봐요. 입을 반쯤 벌린 채 계속 그 모습만 바라봤어요.
저는 공기 중으로 사라진 수증기가 높이 올라가 구름이 되고, 너무 무거워지면 비가 내린다고 설명해 줬어요. 혹시나 용이 비를 뿌리는 게 아니었느냐고 물어볼까 겁이 나긴 했지만 아이는 용 이야기는 안 했어요.
그리고 《비는 어디서 왔을까》(김순한 글/장선환 그림/웅진주니어)를 봤습니다.
이 책에는 빨랫줄에 걸린 옷이 보송보송 마르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 책에 나오는 아이 모습도, 빨래 속의 물방울로 설명하는 것도 아이 수준에 잘 맞았지요. 아이는 제법 진지하게 이 책을 보곤 했어요. 다른 책을 볼 때와는 달리 책을 보면서 별다른 말이 없었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지요. 아이의 반응이 궁금하긴 했지만, 아이에게 물어보지 않았어요. 혹시 아이가 용이 비를 내리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죠. 하지만 괜히 제가 먼저 나설 필요는 없겠다 싶었어요. 이것도 다 커나가는 과정일 테니까 말이에요.
버스 여행을 통해 배우는 과학의 원리
용이 비를 내리게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난 뒤, 아이는 비가 와도 용 이야기를 먼저 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여전히 《비가 오는 날에…》는 잘 봤어요. 물론 예전처럼 좋아하며 보지는 않은 것 같아요. 대신 아주 진지하게 보곤 했어요. 아무래도 혼란의 시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신기한 스쿨버스 1 : 물방울이 되어 정수장에 갇히다》(조애너 콜 글/브루스 디건 그림/비룡소)를 보게 됐죠.
‘신기한 스쿨버스’ 시리즈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예요. 이미 ‘신기한 스쿨버스 베이비’, ‘신기한 스쿨버스 키즈’까지 몽땅 열광하며 봤으니까요. 물론 아이가 이 책들을 과학적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신기한 스쿨버스를 보면서 아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 ‘왜 유치원 버스는 변신을 하지 않을까?’였던 걸 보면 말이에요.
아이가 이 책을 본 건 여섯 살 때였어요. 사실 이 책만 본 건 아니고 이 시리즈를 번갈아가며 날마다 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특히 이 책을 자주 가지고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그림책이긴 해도 초등학교 2-3학년 정도의 수준을 담고 있는 책인데도 질문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읽어주는 걸 듣기만 했어요.
그리고 언제부턴가 아이의 손가락이 스쿨버스랑 스쿨버스에 탄 선생님과 아이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걸 보게 됐어요. 스쿨버스가 수증기로 변해 공중으로 점점 올라가고, 구름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비가 돼서 계곡 시냇물로 떨어지고, 다시 저수지로, 정수장으로 흘러 수도꼭지로 나오는 과정을 쭉 따라가면서요. 마지막에 아이들이 ‘수돗물이 어떻게 우리가 사는 곳까지 이르렀는지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하라’는 과제를 하며 펼침면 가득 한 장으로 그 과정을 정리해 놓은 것도 아주 열심히 봤어요. 다시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면서 말이에요.
이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였어요. 그날도 아이는 이 책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했죠. 저는 또 열심히 읽어줬고요. 아이들이 과제로 하고 있던, 펼침면 가득 물의 순환과정이 그려 있는 바로 그 장면에 이르렀을 때, 아이가 말했어요.
“내가 설명해 볼게.”
아이는 그림을 보며 차례차례 비가 내리는 과정을 설명했어요.
“맞지?”
“응, 맞았어. 어쩌면 이렇게 잘 알까?”
아이는 칭찬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활짝 웃었어요. 그리고 한마디 했습니다.
“응, 그러니까 물이 여행을 하는 거구나!”
때로는 과학보다 신화를 생각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지요. 아이는 베란다 앞에서 한참이나 비가 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혼잣말을 했습니다.
“견우직녀가 만나고 있는 걸까?”
저는 그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겨우겨우 참아냈지요. 일곱 살, 이제 비가 왜 지리는지도 다 알고 있고, 평소 같으면 책에서 본 대로 물의 순환 과정을 이야기하며 비가 왜 오는지를 종알거렸을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견우직녀라니요! 그것도 아주 준지한 모습으로요. 더구나 그날은 칠월칠석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견우직녀 이야기를 해준 건 여섯 살 때였어요. 텔레비전에서 칠월칠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저도 아이에게 견우직녀 이야기를 해줬어요. 책꽂이에 꽂힌 채 아이의 관심 밖에 있던 《견우직녀》(이미애 글/유애로 그림/보림)가 책꽂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어요.
아이는 사랑하는 견우직녀가 서로 떨어져 일 년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슬펐던 것 같아요. 견우직녀를 잘 타일러야지 그렇게 헤어지게 했다면서 옥황상제를 원망하기도 했어요. 만약에 자기가 좀 잘못해서 엄마랑 견우직녀처럼 헤어지면 좋겠냐고 하면서요.
당연히 까치는 아이의 사랑을 받게 되었죠. 그 무렵 아파트 단지에는 유난스럽게 까치가 많았어요. 때로는 수십 마리의 까치가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죠. 아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견우직녀를 만나게 해준 다리를 떠올린 듯했어요. 아이는 까치를 볼 때마다 까치는 견우직녀를 만나게 해 준 착한 새라며 아주 좋아했지요.
어쨌든 견우직녀를 알고 난 뒤 아이에게 비가 오면 생각나는 게 또 하나 생긴 것 같아요.
과학의 시대에도 신화는 필요하다
아이는 요즘도 가끔 묻곤 합니다.
“그거 진짜로 있는 거야?”
대개는 자기가 열심히 보던 책이나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이죠. 그럼 저는 아이에게 되물어요.
“왜? 진짜 같아?”
그럼 아이는 씨익 웃으며 말하죠.
“진짜가 아닌 것 같긴 한데, 꼭 진짜 같은 느낌이 들어.”
아이는 가끔 현실과 비현실적인 것이 헷갈릴 때가 있나 봐요. 그럼 저는 살짝 찔리곤 해요. 아이를 과학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충고해 주는 주위분들의 이야기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곧 제가 찔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아이가 헷갈려 한다고는 하지만 늘 헷갈리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아이가 헷갈릴 때는 그 이야기에 푹 빠졌을 때이죠. 평상시에는 헷갈릴 필요가 없는 거고요.
견우직녀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어요. 분위기에 젖었을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감상에 젖는 것이죠. 과학적인 이치를 따지자면 틀린 것이 분명하지만 그 순간 아이의 감정을 생각할 때는 절대 틀린 게 아니에요.
그래요. 이처럼 아이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타났어요. 무언가를 설명해야 할 때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과학적으로 접근했지요. 하지만 자기 기분에 취해 있거나 신나게 놀 때면 조금은 황당한, 용이니 견우직녀니 하는 이야기가 아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거죠.
저는 아이의 이런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과학의 시대라고 해도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과학의 시대에도 신화는 필요합니다. 물론 신화는 진짜 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이에게 용이 비를 뿌리고, 견우직녀가 흘리는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리는 건 과학을 뛰어넘어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사랑의 의미를 알려주니 소중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비가 올 때면 문득문득 이런 이야기를 떠올릴 거예요. 그리고 지금과는 또 다른 감성에 젖게 될 테고요. 이건 과학이 해줄 수 없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