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금애기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에 대처하는 법
- 당금애기, 제석본풀이 -
무속신화 ‘당금애기’ 이야기를 봤다. 간략한 이야기는 이렇다.
열두대문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던 당금애기. 그녀에게 위기가 닥친다. 아버지는 귀양 가고, 어머니는 기도 가고, 집안은 텅 비고 만다. 당금애기 곁에 남은 건 두 여종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중이 나타나 시주를 청한다. 중은 꽁꽁 잠겨 있던 열두 대문을 주술로 열고 들어온다. 시주쌀은 반드시 당금애기의 명쌀독에 담긴 쌀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종을 시키지 말고 당금애기가 직접 쌀을 퍼서 직접 자신의 바랑에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랑은 밑이 터져 있었고, 쌀은 그대로 쏟아진다. 그러자 중은 쌀알을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주워담아야 하고, 그 일 또한 당금애기가 직접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저러 날이 저물자 중은 하룻밤 묵고 가야겠다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당금애기 방에 병풍을 치고 자겠다고 한다. 그렇게 중이 자고 간 뒤, 당금애기는 임신을 한다.
얼마 뒤 부모가 돌아온다. 당금애기를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는 당금애기의 임신 사실을 알자 당장 죽이려 든다. 그나마 어머니가 이를 말렸고, 당금애기는 후원 동산에 있는 토굴에서 지내다 아들 세쌍둥이를 낳는다.
세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를 찾자 당금애기는 세 아들과 함께 중을 찾아 나선다. 중은 이들을 반갑게 맞아들인다. 중은 원래 천상선관이었고, 당금애기는 원래 천상선녀였기에 정해진 수명을 마치고 하늘로 오른다. 그 뒤 당금애기는 삼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세 아들은 불도를 익히다 80세 한날 한시에 죽었는데, 불도를 전하지 못한 고로 해마다 흉년이 들고 국상이 자주 났다. 이에 세 아들을 장례치르고 불도를 행하니 나라가 편안해졌다. 이후 사람들은 절에 가는 대신 이들을 삼불이라 하고 집안에 모시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세 아들은 ‘삼불제석님’이 되었다.
흔히 ‘당금애기’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장애기’, ‘시준애기’, ‘제석님딸애기’, ‘자지명애기’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또 ‘제석본풀이’, ‘초공본풀이’, ‘삼태자풀이’, ‘시준풀이’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제석(중)의 탄생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하나, 당금애기를 둘러싼 기본 줄거리는 같다.
당금애기가 삼신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제주도에서는 이미 ‘삼신할망본풀이’가 있기 때문인지 당금애기가 삼신이 되진 않는다.
처음 이 이야기를 알게 됐던 건 이십여 년 전이다. 그때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중은 당금애기를 겁탈하고 무책임하게 사라졌고, 이 때문에 순진한 당금애기는 온갖 고난을 겪는 부조리한 이야기로만 보였다. 왜 이런 이야기가 신화로 전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본 ‘당금애기’ 이야기는 예전과는 다르게 읽혔다. 그림형제의 ‘찔레꽃 공주’와 구약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당금애기 이야기에 덧씌워진 남성 이야기를 거둬내고 보니……
당금애기 이야기에는 중의 이야기, 삼불제석이 된 세 아들 이야기의 비중이 꽤 많다. ‘제석본풀이’처럼 처음부터 제석의 본을 푸는 이야기였다면 몰라도 어엿하게 ‘당금애기’란 제목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에서도 당금애기의 본모습이 남성들 이야기에 가려진 경우가 꽤 많았다. 따라서 당금애기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당금애기 이야기에 덧씌워진 남성들의 이야기를 거둬내야 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흔히 여성신화에서 남성들은 고난과 시련을 크게 겪지 않는다. 사회의 기득권자인 남성들은 이미 많은 걸 누리며 멋진 척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걸 한다. 이로 인해 곤란하고 열악한 상황에 놓이는 건 여성이고, 여성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신으로 좌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금애기 이야기에서 중의 모습을 거둬내고 당금애기의 모습에만 집중하자, 당금애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열두 대문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필요한 모든 일들은 몸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자란 당금애기. 어찌 보면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당금애기의 삶은 열두 대문 안이라는 좁디좁은 세계에 갇혀 있다. 열두 대문 안이 당금애기가 볼 수 있는 세계의 전부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열두 대문 안의 사람이 다다. 아니, 열두 대문 안의 사람도 다 못 봤을 가능이 아주 농후하다. 주로 보는 사람은 부모님과 몸종들이었을 테고, 그 외에 사람들은 자주 못 보거나 어쩌면 아예 못 봤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당금애기는 행복했을 것이다. 행복이란 자기가 아는 세계에서 찾는 것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자기가 사는 곳이 세상의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라면 열두 대문 안 집안을 떠나서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집안은 한편으론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금애기에겐 그런 기회가 없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혹은 부모님의 인형처럼 자랐다. 아마도 귀한 딸이 좋은 것만 보고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당금애기는 아버지의 귀양과 함께 집안에 홀로 남게 된 16세가 될 때까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지 못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16세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당시로서는 과년한 처자인데 말이다.
게다가 부모가 꿈꾸는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귀양을 가게 됐고 집안엔 당금애기와 몸종들만 남았고, 이런 상황에서 위기는 찾아온다.
시주를 부탁한다면서 열두 대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 온 중, 아무리 중이라도 그는 남자였고, 당금애기가 머무는 공간은 금남의 공간이었다.
한편 당금애기 입장에서 중은 비록 말로는 들었을지 몰라도 처음 보는 존재이다. 당연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 판본에 따라 당금애기는 호기심 때문에 문틈으로 중을 내다 보고, 중은 그게 바로 당금애기가 저지른 죄라며 협박하기도 한다. 사실 앞에서 말하진 않았지만 당금애기 부모는 ‘중 사위’를 얻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부모는 설마설마했거나 당금애기를 가둬둠으로써 중하고 만나지 못하게 하면 막을 수 있다 여겼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당금애기 이야기는 그림형제의 <찔레꽃 공주>와 겹쳐지는 면이 있다. 귀하게 태어난 공주, 16세에 물레에 찔려 죽을 거라는 예언, 세상의 물레를 없애버림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한 부모, 부모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공주, 물레를 발견하고 호기심에 손을 댔다가 잠드는 공주.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찔레꽃 공주는 왕자가 찾아올 때까지 잠이 든 채로 있으면 그만이었다.(비슷한 이야기인 바실레가 쓴 ‘해와 달과 탈리아’는 뒷이야기가 계속되지만 그렇다고 공주의 주체적인 행동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반면 당금애기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중하고의 인연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돌아온 부모는 그토록 사랑하던 당금애기를 매몰차게 몰아낸다. 당장 목을 치려는 아버지와 달리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는 당금애기를 후원 뒷산에 있는 토굴에서 지낼 수 있게 도와줬고, 당금애기는 그곳에서 세 쌍둥이 아들을 낳는다.
토굴은 마치 ‘찔레꽃 공주’의 잠이랑 비슷한 느낌을 준다. 당금애기는 그곳에서 지내며 한 사람의 소녀에서 세 아들의 어머니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7살이 됐을 무렵 아버지를 찾기 시작하자 세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지만, 묵묵히 그 길을 가서 마침내 중을 만난다.
중은 당금애기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중은 당금애기를 고난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그러니 괘씸하고 못된 존재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당금애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중은 자기 역할이 분명해 보인다.
중이 시주를 왔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직접’이라는 말이다. 시주할 쌀도 다른 쌀이 아니라 반드시 당금애기의 ‘명 쌀독’에서 퍼와야 하고, 쌀을 바랑에 넣어주는 것도 반드시 당금애기가 직접 해야 하며, 터진 바랑 아래로 쏟아진 쌀을 주워담는 것도 반드시 당금애기가 직접 해야 하며, 주워 담을 젓가락을 만들기 위해 싸리가지를 꺾어오는 것도 반드시 당금애기가 직접 해야 한다고 했다.
직접 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몸종을 시키려는 당금애기를 향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너는 어찌 그리 남에 대신을 좋아하느냐? 남의 대신 좋아하거들랑 변소길두 대신 가봐라. 황천길두 대신 가봐라.”
- 제석본풀이, 서대석, 《한국의 신화》, 집문당
자기한테 닥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할 당사자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덕분에 당금애기는 바닥에 떨어진 쌀알을 주울 젓가락을 만들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후원에 있는 동산에 오른다. 그리고 말한다.
“조선땅이 적다 하더니만, 내 눈이 모자라두룩 내다봐두 끝이 아니 뵈이하는구나.”
당금애기는 자신이 살던 열두 대문 안이 얼마나 좁은 곳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에덴동산 외의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듯이 말이다. (무신론적 관점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격은 삼가주시길!)
이런 점에서 중은 당금애기가 스스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준재일 수도 있다. 물론 부모가 만들어준 울타리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오는 시련은 혹독하다. 그래서 시련이 혹독하면 혹독할수록 그 시련을 가져오게 한 존재를 원망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당금애기는 그 시련을 묵묵히 이겨낸다.
마침내 중과 다시 만난 당금애기는 중과 함께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다. 재밌는 것은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와는 위치가 달라져다는 점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중이 당금애기에게 뭐든지 직접 하라며 가르치는 입장이었다면, 이번엔 중이 짓는 이름마다 당금애기가 문제점을 지적하며 스스로 아이에게 적합한 이름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고 중이 말한다.
“참 그 이름 잘 지었소. 여중군자로구료.”
당금애기는 이만큼 성장한 것이다.
당금애기 이야기가 흔히 ‘제석본풀이’로 불리는 건 당금애기의 세 아들인 삼불제석의 본을 푸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세 아들이 삼불제석이 될 수 있게 길러낸 건 당금애기에게 맞춰져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당금애기가 삼신으로 인정받는 것도 이 때문이고 말이다.
불행에 대처하는 법 – 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살다 보면 우리는 늘 예기치 못한 불행과 맞부딪친다. 살면서 불행과 안 부딪칠 방법은 없다. 그래서 미리미리 준비한다. 그래야 예기치 못한 불행에 맞부딪쳤을 때 그 불행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불행과 맞부딪친다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자칫 파멸에 이를 수도 있다.
당금애기가 만난 중은 분명 불행의 씨앗이었지만, 반면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해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겪는 불행은 100%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된다. 불행을 회피하는 대신 스스로 견뎌 나가다 보면 당금애기처럼 단단하고 지혜롭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는 말한다. 귀한 아이일수록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둬서는 안 된다고. 고생스럽다 해도 넓은 세상 밖으로 나가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부모가 할 일은 아이가 위기에 빠졌을 때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비빌 언덕 정도가 되어주는 것이 최선인 듯 싶다. 당금애기의 엄마가 그랬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