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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이유정

by 오른발왼발 2019.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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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멀쩡해지길 바라며

《멀쩡한 이유정》 (유은실 글/변영미 그림/푸른숲주니어/2008년)

‘멀쩡하다’는 말은 참 이상하다. ‘흠이 없고 온전하다’는 뜻을 지녔지만 이상하게도 부정적인 의미와 함께 쓰이곤 한다. ‘사람이 멀쩡해가지고……’, ‘멀쩡한 하늘에 날벼락’ ‘멀쩡하구먼!’같은 식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멀쩡한데 그 속에 열등감이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상태, 그게 바로 ‘멀쩡하다’는 말이 갖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열등감 하나씩은 다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저마다 멀쩡해지기를 소원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유정이 ‘멀쩡한 이유정’이 된 것도 실은 멀쩡하지 못한 모습 때문일 게 분명하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가운데 한 편이자 표제작인 <멀쩡한 이유정>을 먼저 살펴보자.
이유정은 심각한 길치다. 1학년 때부터 다니던 학교건만 이사를 가자 혼자서는 집을 찾아올 수가 없다. 덕분에 늘 동생 뒤를 따라다니는 처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동생이 누나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그 반대다. 회장 일을 맡았던 3학년 때는 자료실에 갔다 오면서 교실로 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맨 경우도 있다.
어느 날 동생이 혼자서 집에 가버리면서 사건은 터지고 만다. 누구한테 이런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이유정은 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설마 이렇게까지? 이런 생각이 들 만큼 상황은 심각하다. 만약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할 때 손을 들어봐야 하는 친구가 없었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아주 심각한 길치라 가족들과 나들이 한 번 못 가본 남자를 보지 못했다면 나 역시 말도 안 된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유정은 아파트 단지까지 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직도 난관은 남아 있다. 정문 쪽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서 자기가 살고 있는 동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유정의 아파트 단지 헤매기는 계속된다.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난다. 학습지 선생님. 선생님은 아파트 단지를 십 분째 헤매고 있다며 유정이 손을 잡고 집에 가자고 한다.
이제 이유정은 자기 집을 못 찾고 있다고 선생님께 고백해야 할 처지다. 아무리 감추고 싶어도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상황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말이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좌향좌를 하는 것처럼 손에 진땀이 나는 이유정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진땀이 나는 상황이라도 솔직하게 고백을 하고 나면 시원해지지 않을까? 더구나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선생님도 계시니 말이다. 작가는 위기 상황에 몰린 이유정의 모습에서 이야기를 끝냈다. 결정적인 판단은 이유정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멀쩡한 이유정>처럼 열등감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아이가 있다. <할아버지 숙제>에 나오는 경수다. 경수는 할아버지가 살아온 얘기를 적어오는 숙제를 해 가야 한다. 친구들은 할아버지 자랑에 열중이다. 경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주정뱅이였고, 외할아버지는 노름꾼이었단다. 이를 사실대로 써 갈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다.
그 해답을 알려주는 건 엄마다. 남들한테 내세울 수 있는 건 없지만, 대신 창피한 부분은 빼고 거짓말은 전혀 보태지 않고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
우산을 잘 고치고, 노래를 잘 부르셨다. 별명은 ‘가수’였다.
할아버지는 육이오 전쟁 때 동생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오랫동안 슬퍼하셨다.
우리 엄마 눈이 크다고 좋아하셨고, 닭고기를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아직도 할아버지를 잘 기억하고 계신다. 할아버지가 부른 노래도 생각난다고 하신다.
사실 주위에 남들에게 내세울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뭔가 그럴 듯한 걸 내세우고 싶을 뿐 실상 별 볼 일 없는 게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또 겉으로는 뭔가 그럴 듯해 보여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개는 문제가 많다. 명규 할아버지가 그렇다. 명규는 할아버지가 회장이고 트로피도 탔다며 자랑했는데, 그 명규 할아버지가 지금은 바람이 나서 할머니한테 쫓겨나게 생겼단다. 결국은 멀쩡했으면 했던 경수 할아버지나 멀쩡해 보였던 명규 할아버지나 매한가지다. 경수가 자신의 걱정이 작아진 대신 명규를 걱정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경수는 자기 할아버지 말고도 훌륭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부족한 점을 발견하는 건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다.

비슷한 모습을 <새우가 없는 마을>이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새우가 없는 마을>의 기철이는 할아버지와 둘이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어렵게 생활한다. 기철의 소원은 자장 라면이 아닌 진짜 짜장면을 먹어보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가을 내내 모은 빈 병을 팔아 진짜 짜장면을 사준다. 할아버지는 마치 중국집에 자주 다니는 사람처럼 보인다. 옛날엔 진짜 짜장면을 먹어봤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기철의 눈에는 무척 근사해 보인다.
할아버지는 다음에 진짜 왕새우를 먹어보자 한다. 할아버지는 겨우 내내 모은 빈 병과 상자를 판 날 새우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두 사람은 읍내로 나간다. 하지만 그 사이 세상은 변해버리고 말았다. 왕새우를 사려면 버스를 타고 사십 분쯤 가야 있는 대형마트에 가야 하는데, 대형마트는 읍내만큼이나 크고, 철로 만든 커다란 수레를 빌려야 한단다. 할아버지로서는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런 현실 앞에 할아버지는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중국집에서는 근사해 보였던 할아버지건만 결국 해 보지 않은 일에서는 기철과 마찬가지다. 새우도 못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할아버지가 말한다. 너는 나중에 왕새우가 있는 마을에서 살라고. 기철이만은 멀쩡하고 근사하게 살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짠하게 다가온다.
<눈>에 나오는 영지는 세상이 불공평한 것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아빠를 살려 달라 기도를 했는데도 아빠는 죽었고 무덤도 없기 때문이다. 공기마저도 좋은 곳과 나쁜 곳이 있고 말이다. 엄마는 눈은 모든 걸 덮어주기 때문에 공평하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눈이 잔뜩 쌓인 걸 보고 영지는 눈이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눈 역시도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옆집 옥탑에 사는 여자 아이는 장갑이 없어서 눈사람을 못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자신에게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던 영지는 고민 끝에 끼고 있던 장갑을 그 아이에게 던져준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새 장갑을 끼며 ‘이건 못 줍니다. 절대 못 줍니다’하며 하나님이 또 빼앗아 갈까봐 장갑을 손목까지 팽팽하게 끌어올린다.
모두가 하나 같이 부족한 것 투성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그 모습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비록 삶은 문제투성이지만 담담한 문체와 유쾌한 사건으로 버무려진 덕이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웃음을 짓게 만들면서도 가슴 한 쪽이 싸해지도록 슬프고, 그러면서도 이들에게 힘껏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한편으로 이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다. 멀쩡하지 못하기 때문에 멀쩡해지려고, 멀쩡해 보이려고 애쓰고, 그러다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더 멀쩡하지 못한 사람을 보며 위안을 얻기도 하는 것이 이 책 속의 인물들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분기별로 펴내는 《어린이문학》 2009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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