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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책/옛날이야기 공부방

해와 달이 된 오누이

by 오른발왼발 201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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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탈출이 필요한 때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다시 읽기

 

 

 

1. 갇혀 있는 아이들

 

어머니는 일 나갈 때마다 어린 오누이에게 일러주었어.
“얘들아, 엄마 없을 땐 아무에게도 문 열어 주면 안 된다.”
                             - 《해와 달이 된 오누이》(김미혜 글/최정인 그림/비룡소)

 

엄마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일러두고 일을 하러 갑니다.
아, 물론 모든 이야기에서 엄마가 이런 당부를 하는 건 아니에요. 엄마가 이런 당부 없이 그냥 일을 나가는 이야기가 더 많아요.
하지만 이런 당부의 말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볼 때면 자연스레 엄마의 당부가 귀에 들립니다. 어쩌면 아이들끼리만 있는 게 불안한 엄마의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가만 보면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호랑이가 오누이 집을 찾아왔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호랑이는 문을 열어 달라 하고, 오누이는 의심을 하며 문을 열어주는 걸 망설입니다. 엄마가 당부를 했건 안 했건 상관없이 위험에 대비해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 수상하니까요.
처음엔 안전을 위해서 닫아걸고 있었지만, 호랑이가 방안에 들어오면서 그곳은 갇힌 공간이 됩니다. 아이들의 의지대로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없으니까요. 호랑이가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살 길은 밖으로 탈출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림 형제의 <라푼첼>이 떠오릅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높은 탑에 갇혀 있는 라푼첼이나, 호랑이의 감시 속에 방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오누이의 모습이 비슷해 보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겉으로 보기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라푼첼>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는데요.
하지만 분명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아이들을 집안 혹은 탑에 가둔 게 부모라는 점이지요. 수상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해석하는 여러 입장 가운데 하나는, 호랑이가 실은 엄마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저도 앞서 호랑이로 변한 엄마, 도망치는 아이들 -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에서 이런 입장에서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또 <라푼첼>에 나오는 마녀도 실은 엄마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게 일반적인 입장이에요.
차이가 있다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호랑이가 된 엄마가 폭압적인 모습으로 아이들을 가두고, <라푼첼>의 마녀는 라푼첼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가둔다는 점뿐입니다.

 

2. 부모는 위험을 막아줄 수 있을까?

 

흔히 집안은 안전한 곳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안타깝게도 집안은 아이들에게 무조건 안전한 곳은 아니에요. 실제로 어린이 안전사고의 많은 부분이 집안에서 일어나지요. 부모나 다른 가족에 의한 학대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부모는 집안을 안전한 곳이라 믿습니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위험에 대해서는 부모가 대처해 주기 힘들지만, 집안에서는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하다고 여기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집안이 안전하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아이를 집안에 가둬놓을 수만은 없어요. 라푼첼은 숲속에 있는, 출입구도 없는 높은 탑에 갇혔지만 바깥 세계의 왕자와 만나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오누이는 잠깐의 판단 착오로 호랑이한테 문을 열어주고, 그 바람에 위기에 처하지요. 또 조금 다르긴 하지만 <장미 공주>에서 왕은 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물렛가락에 찔려 죽을 것이란 저주 때문에 온 나라의 물렛가락을 모두 태워 없애버려요. 그러나 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던 날, 왕과 왕비가 없을 때 공주는 물렛가락에 찔려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아요.
부모가 아이를 아무리 안전한 곳에 가둬도 아이를 안전하게 지킬 수는 없어요. 아이는 어떻게든 세상의 위험과 맞설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가 아이를 가장 안전하게 보살피는 존재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어요. 이야기에서 보듯이 엄마는 언제든 호랑이로 변하기도 하고, 마녀가 되기도 하고, 계모가 되기도 하며 아이들을 괴롭히지요.

 

3. 탈출하라!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거예요. 한없이 예쁜 아이들이지만 문득문득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미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요. 이런 마음이 잘 해소되면 다행이지만 억지로 억누르고 지내면 어느 순간 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해요. 이런 일은 자기 자신의 삶은 버려둔 채 아이를 위해서만 살 때 더 심해집니다. 자신의 삶을 아이들 삶 속에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자라는 아이를 못 견뎌하게 되지요. 당연히  아이들에게 그런 엄마의 모습은 호랑이로 혹은 마녀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오누이는 젖먹이 막내가 호랑이 엄마에게 잡아먹히고 난 뒤에야 그 정체를 눈치 챕니다. 아직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젖먹이는 호랑이 엄마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할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오누이는 달랐지요. 호랑이 엄마가 있는 집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지요. 그리고 똥이 마렵다는 핑계로 무사히 집안에서 탈출합니다.
반면 라푼첼은 마녀가 왕자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쫓겨납니다. 탑에 갇히던 열두 살 이후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쫓겨난 것이니 탈출한 것과는 조금 달라 보이기도 해요. 그래도 탈출을 탈출입니다. 왕자와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탑에 갇혀 살았을 테니까요. 중요한 건 스스로 탈출을 하든, 갇혀 있던 곳에서 내쫓길 건수를 만들든, 갇혀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지요.
물론 탈출하는 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탈출 뒤에 더 힘든 시련이 다가오기도 하지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오누이는 나무 위로 올라가 숨지만 곧 호랑이한테 발각됩니다. 호랑이는 우물 속에 비친 오누이의 모습을 보고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깁니다. 우물 속 오누이는 호랑이 엄마가 바라보는 오누이의 모습이지요. 잘만 타이르면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 말이에요. 그래서 호랑이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나무 위에 올라갔느냐고 묻지요. 큰 아이는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왔다며 호랑이 엄마를 속여요. 호랑이 엄마가 올라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러나 동생은 자꾸만 미끄러지는 호랑이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도끼로 찍어가며 올라왔다고 말하지요. 그 바람에 오누이는 위기에 빠지고 말아요. 호랑이 엄마가 도끼로 쾅! 쾅! 나무를 찍어가며 오누이 가까이 올라가는 장면은 가슴이 쫄깃할 정도로 긴장감이 흘러요.
라푼첼에게도 고된 시련이 기다리고 있지요. 라푼첼은 거친 황야에서 쌍둥이 남매를 낳아 힘들게 지내야 했고, 왕자도 가시덩굴에 찔려 눈이 멀고 말지요.
그렇다면 탈출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요?
탈출을 한 뒤 힘든 현실을 마주했을 때, 어쩌면 탈출을 후회했을 지도 모르지요. 당장 눈앞의 위험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인지상정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대로 머물렀을 때 어떻게 될 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누이는 호랑이 엄마한테 잡아먹혔을 것이고, 라푼첼은 평생을 탑 안에 갇혀 지냈을 거예요. 오누이가 호랑이 엄마한테 꼼짝 못하고 지내는 걸 잡아먹혔다고 표현했다면, 라푼첼도 마녀한테 잡아먹힌 거라 할 수 있겠지요.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된 후, 노예들이 모두다 환호성을 질렀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노예 해방을 원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돈을 벌어먹고 사는 일이 노예 시절보다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만약 당장의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노예의 신분에 갇혀서 지냈다면 그들은 영원히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4. 나는 탈출에 성공했을까?

 

저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아이를 틀에 가두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 제법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지 않으려 노력은 했지만 잠깐 정신을 놓고 있다 보면 자꾸 저도 모르게 저만의 틀에 아이를 가두곤 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제가 갇힌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다시 곰곰 생각해 봅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틀은 무엇인지,
내가 갇혀 있는 사회의 틀은 무엇인지.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갇혀 있는 틀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탈출을 하고 싶지만 지쳐서 조금은 포기하고 있는 것도 있고, 탈출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또 지금 이 순간, 저에게 스스로 질문을 하면서 새롭게 찾게 된 틀도 있어요. 어느 것 하나 탈출한다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탈출을 준비해야겠지요. 당장은 힘든 시련을 겪어야 하지만 갇힌 틀을 깨고 탈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살 수 있는 길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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