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어린이 2010년 8월호에 이상희 님께서 <책 빌리러 왔어요> 서평을 써주셨습니다.
그곳으로 링크를 걸어두려 했는데,
아쉽게도 해당 사이트는 문을 닫은 것 같습니다.
대신 당시 글을 직접 올리도록 할게요.
속 깊은 책 이야기
돌쇠의 새로운 세상
- <책 빌리러 왔어요>(오진원글/정승희 그림/웅진주니어)
이따금 지갑에 꽂혀 있는 도서 대출증들을 책상 위에 쭉 늘어놓아 보곤 합니다. 그러고 있으면 어깨가 쭉 펴지거든요. 어떤 식의 가난이든, 한순간에 싹 잊게 됩니다. 언제든 책을 빌릴 수 있다니, 그저 한없이 마음 든든하고 넉넉해지는 거지요.
처음으로 도서 대출증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지 싶습니다. 초등학생 때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빌린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관외 대출을 할 수 없을 만큼 장서가 빈약했던 모양이에요. 어쨌든, 그날 이후 지금껏 내 생의 일부는 수없이 새로운 대출증을 만들고 만들며 대출과 반납을 거듭하는 데 써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가를 누비며 너무 많이 고른 책들을 대출대 앞에서 덜어내느라 번번이 쩔쩔매고, 반납 날짜에 대느라 헐레벌떡 도서관으로 달려가던 시간들 말이지요. (언젠가 내게도 한가한 날이 오면 서랍 깊숙이 간직된 대출증들을 모티프로 수제본 북아트 책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그 또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인 ‘책 그림 이야기 책’이 되겠지요?)
『책 빌리러 왔어요』는 조선 시대 아이를 통해 당시의 수도 한성에만 있었다는 책 대여점인 세책점의 이모저모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그림책입니다. 나무꾼 아이 돌쇠는 나무를 팔러 장에 나왔다가 당시 전기수로 불리던 거리의 이야기꾼이 홍길동전을 구연하는 이야기판에 끼게 됩니다. 도서관이라는 것은 궁궐에나 있던 시절, 책 구경 한번 제대로 못 해본 돌쇠는 자기 마음대로 분신을 만들어 내고, 혼자 힘으로 군대를 물리치며, 옳지 않게 치부한 양반네 곳간을 털어 가난한 백성을 돌보는 의적 홍길동 이야기에 푹 빠지는 거지요.
어느새 홍길동 이야기가 끝나버리자 돌쇠는 미처 못 들었던 대목을 다시 듣고 싶다고 전기수를 졸라봅니다. 그러나, 정 궁금하면 세책점에 가서 『홍길동전』을 빌려보라는 가혹한 대답만 돌아오지요. 하지만 그 대답을 귀담아 들은 덕분에 돌쇠 인생의 새로운 국면이 펼쳐집니다.
정말 세책점을 찾아간 돌쇠는 대문에 뭔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애써 흥분을 가라앉힙니다.돌쇠는 한글을 어지간히 읽을 줄 압니다.
세책점 대문에 붙어 있는 것이 이른바 세책 목록이고, 그걸 보아하니 이야기책이라는 게 『홍길동전』뿐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그래도 돌쇠는 조금 전에 들은 ‘홍길동 이야기’가 정말 세책점에 있는지, 그것만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돌쇠는 오직 『홍길동전』 생각만 하며, 자기도 모르게 세책점 안으로 들어섭니다. 그러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세상을 맞닥뜨리게 되지요.
그러나 그 신세계로 발을 들이려면 적잖은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홍길동전』을 보려면 놋그릇 같은 담보도 걸어야 하고, 책 빌려보는 값 2전도 내야 한다는 세책점 주인 말에 돌쇠는 통사정을 하지요.
“담보로 맡길 물건은 없습니다.
대신 제가 앞으로 닷새 동안 나무를 해다 드릴게요.
닷새째 되는 날에 책을 빌려주세요.”
세책점 주인 역시 어떤 식으로든 책에 매혹된 영혼이어서, 돌쇠의 안달을 이해합니다. 돌쇠의 청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사흘 꼬박이 나뭇짐을 해 나르는 돌쇠의 진정성을 높이 사서 닷새로 약정된 노역의 이틀을 감해 줍니다. 게다가 세책점 심부름꾼 일자리까지 제안하지요. 일을 열심히 하면 책도 거저 빌려 주겠다면서요!
청소를 하는 돌쇠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질 않아.
세책점을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다니 꿈만 같았거든.
이제 돌쇠는 본격적으로 책의 세계에 진입하게 됩니다. 청소와 잔심부름을 넘어 세책점 한쪽에 자리 잡은 필사장이들의 작업을 거들고 배우지요.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한글 옛 소설’ 전시회를 관람한 이후 저는 이 생면부지의 필사장이들에게 깊은 친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책 뒤에 붙은 정보글 ‘한 걸음 더’에 나오는 대로 ‘글씨를 잘 못 썼다고 흉보지 말고 재미있게 읽으라’는 식의 다채로운 필사 후기도 정겹거니와, 책 넘기는 자리의 글이 독자들의 손길에 지워지는 것을 염려해 오른쪽 맨 첫줄 맨 끝 글자 자리를 비워놓고 필사한 실물을 보면서 그들의 체온을 생생히 느낀 거지요.)
돌쇠는 베껴 쓸 글을 필사장이한테 불러 주는 한편 다 베껴 쓴 책장에 들기름 칠하기, 순서대로 차곡차곡 정리하기, 표지 만들어 덮고 엮어 실로 묶기, 책 틀에 넣어 누르기 등 온갖 제책 공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인 아저씨의 심부름으로 ‘세책’의 본산지 격인 대형 세책점에 가서는 세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 또한 어렴풋이 꿰어 볼 수 있게 되지요.
사직동 세책점에 도착한 돌쇠는 눈이 휘둥그레졌어.
세책점 크기도 엄청나고, 책도 엄청나.
이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있는 것만 같아.
주인 아저씨가 때때로 이곳에서 책을 빌려다가 베껴서 책을 만든다는 말이 실감이 났어.
주인 아저씨의 견습 직원 훈련은 계속됩니다. 돌쇠에게 세책점의 서가 정리를 시켜놓고 외출한 거지요. 잠시 동안이나마 혼자서 세책점을 떠맡은 돌쇠는 서가를 정리하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합니다. 자기를 그리로 끌어들였으나 책무에 쫓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토록 읽고 싶었던 『홍길동전』을 맞닥뜨린 겁니다. 당연히 돌쇠는 정신없이 책 읽기에 빠지고 말지요. (이 장면에서 저는 잠깐 큭큭대며 웃었습니다. 어릴 적, 낡은 책 창고를 겸한 다락의 책 정리 담당으로 뽑혀 오빠들 어깨를 딛고 올라가서는 온종일 내내 거기 있는 언니 오빠들의 국어책 읽기에 빠지곤 했던 제 모습을 떠올리면서요.)
돌쇠를 홍길동의 세계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당시 세책점의 주요 고객이었던 하녀를 대동한 아씨 마님들이었습니다. 돌쇠는 느닷없이 세책 손님까지 상대하게 된 거지요.
휴! 다행이야.
손님이 찾는 춘향전은 아까 책들을 살필 때 눈여겨봐 뒀거든.
손님한테 담보로 놋그릇을 받고 세책 장부에다 기록을 하고는 춘향전을 가져다줬지.
어느새 조마조마하던 마음은 간데없고, 제대로 해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어.
돌쇠의 행운은 계속됩니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주인 아저씨가 『홍길동전』을 빌려주겠다며 인정을 베푸는 겁니다. 하지만 벌써 『홍길동전』을 독파한 돌쇠는 『전우치전』을 집어 들지요. 그건 일하면서 벌써 다 읽었다고, 고백하면서요.
돌쇠는 담뱃대를 휘두르는 세책점 주인을 피해 얼른 달려 나가.
돌쇠의 뒷모습을 보는 세책점 주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
몰래 읽은 건 괘씸하지만,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독자가 생겼으니 말이야.
돌쇠는 세책점의 책들을 읽고, 읽고, 또 읽었겠지요. 그러고는 마침내 필사장이가 되었거나 또 다른 세책점 주인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세책점 주인과 거기서 만난 필사장이들처럼 책에 매혹된 또 다른 아이를 격려하고 지원해 주었겠지요.
『책 빌리러 왔어요』 덕분에 예전에 내게 책을 빌려준 도서관들과 지금 빌려주는 도서관들, 등하굣길에 드나들었던 서점들이 마구 떠오릅니다. 다정히 반겨주던 사서 선생님들과 틀림없이 작가가 될 거라고 어깨 두드려 주었던 서점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떠오르고요. 그리고 얼마 전, 작가 지망생이라며 내가 지킴이하는 날 일부러 그림책버스에 찾아왔던 아이도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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