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웃, 우리는 변할까?
『블랙 아웃』(박효미 글/마영신 그림/한겨레아이들)
블랙아웃!
대규모 정전 사태.
한여름이면 뉴스에 몇 번쯤은 오르내리는 위협적인 단어다. 그냥 가상의 시나리오라며 좋겠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블랙아웃이 일어난 적이 있다. 2011년 9월 15일 서울 강남과 여의도 일대를 비롯해 경기, 강원, 충청 등 전국 곳곳에서 정전이 일어나 약 5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대규모 정전이 일어난다는 건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대인의 생활이란 전기가 없이는 잠시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이 전기에 의존해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등이 들어오지 않고 가전제품들이 멈추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가스레인지도 안 들어오고 전화도 안 된다. 이른바 우리가 문명이라 일컫는 것들은 전기 없이는 돌아갈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블랙아웃이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엄청난 재앙임이 틀림없다.
일주일간의 블랙아웃
엄마 아빠가 일 때문에 중국으로 떠난 어느 덥고 더운 여름날, 갑자기 도시는 블랙아웃 상태가 된다. 블랙아웃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고, 이 책은 그 일주일간의 상황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모든 게 불편하긴 하지만 아이들은 일종의 모험담을 늘어놓듯 가슴 설레는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휴대전화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사라진 세상에서 아이들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놀며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학교를 가지 않아도 좋았다!!
하지만 블랙아웃이 가져다 준 흥분은 딱 여기까지다. 신호등이 꺼진 도로는 차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고, 애완동물 가게의 물고기들은 공기 펌프를 켜지 못해 죽어나갔고, 가게에 있던 음식들은 썩어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으니 아무리 높은 층에 사는 사람이라도 걸어서 올라가야 했고, 물이 안 나오니 씻을 수도 없고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지 못해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 이 엄청난 블랙아웃이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분명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나라인데 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며칠씩 블랙아웃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건지 사람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차츰 짜증이 쌓여가서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았다.
삼일 째 되는 날, 역에 있는 광장 스크린에서 긴급 방송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내용은 없었다.
- 전국 대규모 정전 지속, 원자력 발전소 3호기 점검 중.
- 전국 송전소, 중부 변전소 등 50여 곳, 무인 변전소 600여 곳 점검 중.
- 관계부처 긴급 대책 회의, 청와대 복구 독려.
- 곧 정상화 예정
소리는 안 들리고 자막만 읽을 수 있을 뿐이었지만 나오는 자막은 그야말로 의례적인 말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벌써 삼일이나 지났지만 블랙아웃의 원인이 무엇인지, 언제쯤이면 정상화될 수 있을지 사람들의 궁금증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또 지금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생활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는 그 어떤 정책도 제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뉴스를 믿지 않게 됐다. 뉴스는 늘 똑같은 내용만 되풀이 하는 앵무새 같았다.
사람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전국이 블랙아웃이라는데 저 스크린은 어떻게 나오는지, 경찰서 소방서 대형마트는 전기가 들어오지만 서민들이 있는 곳은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민중의 지팡이이어야 할 경찰은 사람들을 걱정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위협하며 마트의 안전만 살폈다. 마트는 살 수 있는 물건의 개수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을 더 높이 책정해서 현금만 받았다. 물건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물건을 탈취했다. 부모님이 중국에 가고 안 계신 동민 동희 남매는 겨우 구한 생필품을 몇 번이나 빼앗겼다. 하다못해 동민이 친구인 진수 엄마마저 동민이 엄마한테 빌러준 돈 대신 쌀로 받아간다며 동민이네 쌀푸대를 그대로 강탈해갔다.
그야말로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당장 마실 물과 쌀조차 없는 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들은 물과 음식이 있는 곳, 마트로 향한다. 그리고 마트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경찰을 뚫고 마트를 털기 시작한다. 이미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궁금증
전기는 아주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시 들어온다. 사람들이 마트를 한바탕 습격한 뒤였다.
블랙아웃 이후 6개월 뒤, 여전히 블랙아웃의 원인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있었고, 결론적으로 새로운 원전을 12기나 새로 건설한다는 기사 내용이 이야기의 뒷만을 씁쓸하게 한다.
세상은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씁쓸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궁금한 부분이 있다. 뚱뚱한 동민이와 동희의 블랙아웃 기간 동안 다이어트 기록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는 부분이다. 블랙아웃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다룬 이야기에서 남매의 다이어트 기록이 크게 중요하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넘겨버릴 수는 없었다.
그 여름을 보내면서 뚱보들은 확실히 살이 빠졌다. 뚱보 남매 둘이 합해 16킬로그램의 지방 덩이가 사라졌으니, 두 사람을 이전부터 알던 사람이라면 척 보고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그러니 그 여름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뚱보들의 다이어트 기록이기도 하다.
이야기에 앞서 프롤로그처럼 쓰여 있는 내용이다. 동희는 10킬로그램이나 빠진 몸매를 여태 유지했고, 동민이는 일주일 동안 빠진 6킬로그램이 2주도 안 돼서 원상 복귀됐고 지금은 그때보다 3킬로그램이나 더 쪘다는 내용이 에필로그로 덧붙여진 것을 보면 분명 작가의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블랙아웃 기간 동안 ‘뚱보 남매’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 무기력해 보였다는 점이다. 블랙아웃 이후 10킬로그램이나 빠진 몸매를 유지하는 동희는 블랙아웃을 통해 변화한 인물로 느껴지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3킬로그램이나 더 찐 동민이의 모습은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왜 작가는 이 부분을 이렇게 강조해서 넣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지점이다.
블랙아웃이 된다는 것
블랙아웃이란 대규모 정전 사태라는 의미 말고도 다른 의미가 여럿 있다. 핵공격으로 적의 미사일 방어체제를 무력화시키는 군사전략도 블랙아웃이라 하고, 과음으로 인한 기억상실도 블랙아웃이라 한다. 이밖에도 무대에서 암전, 언론통제, 등화관제 등을 블랙아웃이라 부른다.
서로 다른 의미인 것 같은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을 무력화 시킨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블랙아웃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바닥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아쉬운 점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던져주는 문제의식만큼은 아주 강렬하다. 블랙아웃의 상황 속에서 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스크린을 통해 늘 같은 이야기만 하고 두루 뭉실 넘어가는 것뿐이다. 곧 정상화 예정, 조만 참아라, 곧 괜찮아진다. 이뿐이다.
그리고 정부의 이런 마취에 취한 사람들은 블랙아웃의 상황이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진수 삼촌의 말처럼 민심이란 잠잠하다가도 순식간에 들고 일어날 수 있다지만, 그처럼 큰일을 겪고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으론 자극이 된다. 우리의 모습을 책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블랙아웃이라면 블랙아웃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세월호 사건 등 굵직한 여러 사건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자꾸 이 책을 곱씹어보게 된다. 비록 책 속에 희망을 찾진 못했지만 우리 현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자꾸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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