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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권정생 추모

[편지글] 권정생 선생님께 - <한티재 하늘>을 읽고

by 오른발왼발 2017.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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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께.

 

선생님! 
기뻐해주세요. 저 드디어 《한티재 하늘 1, 2》을 다 읽었어요.
사실 저에게 《한티재 하늘》은 빚처럼 여겨지던 책이었어요. 선생님 작품들 가운데 유일하게 몇 번이나 읽다 포기한 작품이었거든요. 주위에서 《한티재 하늘》 이야기를 할 때면 전 완전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됐지요.
‘도대체 나는 왜 이 책이 이렇게 안 읽히지?’
때론 자괴감이 들기도 했어요. 제 독서능력에 한계가 있는 건가 싶었거든요.
제가 이 책을 읽기 힘들어 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서울 촌놈인 저로서는 이 책에 나오는 배경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거든요. 낯선 사투리는 머릿속에서 뱅뱅 꼬여만 갔고. 또 등장인물은 왜 이렇게도 많은지, 이 사람이 저 사람이던가, 저 사람이 이 사람이든가 헷갈리기만 했어요. 인물이 헷갈리니 사건은 당연히 헷갈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책을 펼쳐 들어도 진도가 나가질 않았어요. 다시 몇 번이나 앞 장으로 되돌아가서 읽고 또 읽고……, 그러다 포기를 하고 말았어요.

결국 1999년에 저희 집에 왔던 책은 중간에 몇 번인가 아주 잠깐씩 책꽂이를 벗어났던 걸 제외하면 그냥 책꽂이 한편에서 20년 가까운 시간을 꽂혀있기만 했어요. 저는 책꽂이에서 《한티재 하늘》 을 발견할 때마다 빚쟁이를 만난 듯 화들짝 놀라 눈길을 피했어요. 그러다 이번에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치 묵었던 빚을 청산한 것처럼 선생님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선생님, 그런데 참 이상했어요. 어느 정도 읽어나갔을 즈음 갑자기 영화 ‘국제 시장’이 떠올랐어요. ‘국제 시장’이랑 《한티재 하늘》은 관련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사실 전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국제 시장’을 보다가 펑펑 울었던 적이 있어요.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울음이 멈추질 않았어요. 그러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와 또 한참을 웃었지요. 제 모습이 너무 웃겼거든요. 제가 울은 이유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웃겼어요. 제가 울은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국제 시장’을 보고 느끼는 것과는 너무 다른 지점이었어요. 저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거든요. 만약 제가 주인공의 상황이라면 주인공처럼 치열하게 살기는커녕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말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인지 웃음은 났지만 후유증은 꽤 오래 갔어요. 살아간다는 것이 점점 자신이 없어졌지요.
그런데 《한티재 하늘》을 보고 ‘국제 시장’이 떠오르다니요? 저는 이 느닷없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어요. 이상한 건 또 있었어요. 한티재 사람들의 삶은 ‘국제 시장’의 주인공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암울했지만 ‘국제 시장’을 봤을 때처럼 살아갈 자신감이 사라지거나 하지 않았어요.
전 깨달았지요. ‘국제 시장’이 힘든 세월을 헤치고 살아온 인물의 성공 이야기라면, 《한티재 하늘》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라곤 없을 만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힘을 내는 이야기라는 것을요. 그러니 ‘국제 시장’의 주인공처럼 경제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제가 자신감이 사라졌던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하지만 《한티재 하늘》은 때로는 욕을 퍼붓다가 또 때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품어주기도 하면서, 힘든 삶이지만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때로는 상대를 원망도 하며 실컷 울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 용서하는 데서 힘이 솟는 건’가 봐요.

 

선생님, 저요……, 책을 덮으면서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가 많이 생각났어요.
서로 힘들고 치열하게 살면서도 원망을 용서로 바꿔가며 힘을 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했거든요.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랑 함께 살며 기운을 북돋아주고 계시겠죠? 제 주위에도 와 계셨으면 좋겠는데……, 믿으면 이루어지겠지요?

선생님, 올해는 선생님께 “저, 드디어 읽었어요!”하고 자랑을 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내년엔 또 다른 자랑거리를 들고 올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선생님, 그럼 내년에 다시 인사드릴게요.
안녕히 계세요.

 

 

2017년 5월 2일
오진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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