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님께.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가끔 하늘에서 이곳을 내려다보신 적도 있으신지요?
우리나라는 야경이 정말 끝내준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지도 궁금해요.
물론 요즘엔 야경 따위엔 관심이 전혀 없어졌지만요.
누가 그랬거든요. 우리나라 야경이 아름다운 건 밤 늦게까지 일하느라 어쩔 수 없이 불을 켜놓는
곳이 너무 많아서라고요.
그때부터 전 화려한 야경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지고 말았어요.
그런데 20년 만에 《밥데기 죽데기》를 다시 읽으며 늑대 할머니도 비슷한 말을 한 걸 알게 됐어요.
마지막에 밥데기 죽데기, 그리고 황새 아저씨와 함께 날아오르는 장면이었어요. 서울의 불빛이 참 예쁘다는 말에 늑대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지요.
“먼 곳에서 보니까 그런 거야. 저렇게 아름다운 불빛 속에서 지금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잖니?”
옛날에 읽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보니 책을 다 읽고도 자꾸 이 말이 떠올라요. 혹시 나도 먼 곳에서 바라보며 아름답게만 느끼고,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선생님,
늑대 할머니라니요?
전 처음엔 늑대가 둔갑한 할머니가 참 낯설었어요. 여우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고, 늑대라니요? 하지만 곧 <아기 늑대 세 남매>가 떠올랐어요. 선생님이 늑대를 사람으로 둔갑시킨 건 이번 작품이 처음이 아니더라고요. 혹시 선생님이 특별히 늑대를 애정하시는 건가 싶었어요. 맞나요?
아무튼, 늑대 할머니가 밥데기 죽데기를 만드는 장면은 재미있었어요.
정성스럽게 달걀을 골라서(알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마늘하고 쑥하고 함께 솥에 넣어 삶고(단군신화가 생각나요.)
똥통에 한 달 동안 담갔다 건지고(선생님의 똥에 대한 철학! 모든 목숨은 가장 밑바닥에서 엉망진창으로 견뎌봐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르게 알게 된다.)
깨끗이 씻어 맑은 개울물에 한 달 담그고(그래도 마음만은 늘 깨끗해야 하니까?)
땅을 파고 한 달을 묻고(땅은 생명의 원천이기에?)
질경이 씨앗으로 짠 기름을 담은 접시에 얹어 열흘을 지내고 질경이 씨앗에 불을 붙이자(연기는 하늘의 뜻과 만나는 것?)
밥데기 죽데기가 생겨나요.
늑대 할머니는 둔갑한 거라고 했는데, 밥데기 죽데기는 그냥 둔갑이 아니라 죽은 뒤에 똥과 물과 땅과 질경이 씨앗 기름에서 모두 100일을 견디고 다시 태어난 거예요.
생명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늑대 할머니라?
도대체 이 늑대 할머니의 정체는 뭐죠?
산신령 같기도 하고, 음……, 예수님 같기도 해요.
마지막에 황새 아저씨가 늑대 할머니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잖아요. 늑대 할머니는 밤새 궁리한 끝에 방법을 찾아내죠. 보리밥을 잔뜩 먹고 똥을 누고, 똥에 할머니가 들이쉰 남쪽 바람을 불어넣어 향기롭게 만든 뒤, 똥떡을 만들어, 불에 태우고 주문을 외어 금빛 가루, 빨간 가루, 새하얀 가루를 만들잖아요. 그리고 그걸 하늘로 올라가 골고루 뿌리자 엄청난 일이 일어났어요.
달걀들은 모두 병아리로 깨어나, 살아있는 생명이 되요. 휴전선 철조망도, 온갖 전쟁 무기도 모두 다 녹아 없어져 버리고 우리나라는 통일이 되죠.
그 밑바탕에는 ‘똥’이 있어요. 똥이 할머니의 정성으로 향기 나는 가루로 다시 태어나 세상을 바꾼 거예요.
맞아요. <강아지 똥>이 떠올라요. 강아지 똥이 노란 민들레꽃을 피워낸 것처럼 밥데기와 죽데기, 늑대할머니, 그리고 황새 아저씨의 똥이 세상을 바꾼 거지요.
그러고 보면 ‘똥’이야말로 선생님의 ‘삶의 철학’ 그 자체인 것 같아요.
아무튼, 늑대 할머니가 예수님 같다고 느껴진 건 바로 그 때문이에요. 제가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와 온갖 고초를 겪고 세상을 구원하고 돌아가신 모습이 떠올라요. 그렇지 않고서야 똥으로 밥데기 죽데기를 빚어내고, 세상을 바꿔내는 은혜로운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만 같아요. 물론 예수님이 인간으로 살면서 많은 갈등을 했듯이 늑대 할머니도 남편과 자식을 죽인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하고 괴로워하기도 했지만요.
그래서일까요? 온힘을 다해 일을 모두 마친 뒤, 생을 마감하는 늑대 할머니 모습에서 예수님의 최후가 떠올라요.
늑대 할머니가 예수님이라면, 황새 아저씨는 하느님 같이 느껴졌어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에 나오는, 이 땅에 오신 하느님 말이에요.
황새 아저씨는 늑대 할머니의 비밀을 다 알고 있었고, 사마귀 할아버지가 어디에 사는지도 알고 있었잖아요. 또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뿐이던 늑대 할머니가 사마귀 할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원자폭탄을 맞아 피폭된 인숙이 사정도 알게 되고, 맨 끄트머리 병실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도망친 군인을 찾는 뉴스를 보고 남북 대치 상황을 알게 되고…… 하면서 늑대 할머니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을 수 있게 해요. 황새 아저씨는 스스로를 혼잣몸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이고, 굳이 따지자면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고 황새 쪽에 가깝다고 했어요. 여러 동물 가운데 황새 쪽에 가깝다……. 그건 아마도 하늘에 있는 사람(?)이라 황새 쪽에 가깝다 한 게 아닐까요?
이렇게 보고 나니 이 책에 선생님 모습이 겹쳐져요.
사실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는 뭔가 어설퍼 보이기도 했거든요. 갑자기 우리의 아픈 역사가 툭툭 나오고, 늑대 할머니가 변하고, 느닷없이 똥가루(?)로 환상적인 마무리로 끝나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 상황이 이해가 갔어요. 솔뫼골에서만 살던 늑대 할머니로서는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오다보니 어리숙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쳐 들어오니까요. 혼란스러운 만큼 고민도 깊어졌을 테고, 살 만큼 살아온 늑대 할머니는 온 힘을 다해 단박에 세상을 바꿀 방법을 마련한 게 아닐까요?
전 그렇게 믿으려고요.
그리고 선생님의 능청스러움이 생각날 때면 이 책을 꺼내 읽으려고요.
좋은 생각이죠?
선생님, 잘 지내세요.
가끔가끔 이 땅도 내려다 봐 주시고요.
선생님은 멋진 야경 속에 숨겨진 일들도 잘 짐작하실 테니까요.
2019년 4월 30일
오진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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