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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년/3권 12호(1925년)

임경업 장군 (2)

by 오른발왼발 2017.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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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12호
<사담><역사>

임경업 장군(2)

이상대


장군이 부윤으로 가실 때에 나라에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오랑캐가 지금은 서로 화친을 하였다 하오나 본래에 교활하고 간사하여 믿음이 없을 뿐더러 틈만 있사오면 난리를 일으키려 하오니 만일 우리나라에 군사의 준비가 없사오면 군사 없는 장수는 빈 성만 지키다가 적군의 칼날에 죽을 것이오니 수만의 군사를 두어 항상 도적의 방어를 익히도록 하옵소서.』
하였으나 나라에서는 장군의 의논을 듣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하는 수가 없어서 의주로 가시며 나라에 청하여 은과 비단을 얻어서 의주에다 상평창을 두 군데에다 세우고 명나라와 호지에 물화를 사다가 얻은 이익으로는 백성을 두루 나누어주며 집이 없는 자는 집을 지어 주고 홀아비와 과부는 장가를 들이고 시집을 보내니 백성이 나날이 늘어나고 또 둔전을 열두 군데나 두어서 군사와 백성이 섞여서 농사를 짓게 하여 제각기 제 힘으로 먹고살게 하니 백성들도 여투는 것이 있고 관가에도 쌓이는 것이 있어서 백성들이 배가 부르고 등이 더우니 장군을 부모 같이 공경하였습니다.
장군은 잠시 간신의 참소로 벼슬이 떨어지셨다가 마흔 셋 되시던 병자년 4월에 다시 의주 부윤으로 가시게 되니 장군이 전후에 의주 부윤으로 계시기를 7년 동안이었습니다. 장군은 이번에도 군사를 더 두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장군은 국경에다 봉화대를 두고 봉화를 들게 하시는데 아무 일이 없으면 하나, 도적이 나타나면 둘, 도적이 나라의 지경을 범하면 셋, 싸움을 하면 넷, 도적이 들에 덮었으면 다섯씩을 들도록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군량과 마초를 저축하며 성중에다 큰 못을 파서 물을 고여두고 고기를 기르며 우역이 있어서 소가죽** 그 고기로 포를 떠서 저축하였습니다.
병자년 섣달이올시다. 봉화가 둘이 떴습니다. 장군은 벌써 도적이 오는 것을 아시고 즉시 나라에 아뢰었으나 김자점은 이 뜻을 임금께 아뢰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둔전에는 늙은 군사가 100명뿐이었습니다. 장군을 발을 구르시며 탄식해 말씀하되
『적군이 조석에 들어올 터인데 군사가 없는 장수가 무엇을 할 것이냐.』
하시다가 한 계교를 내셔서 성 위에다가 포장을 둘러막고 밤이면 한 사람이 홰를 둘씩 들게 하되 홰 한 개에 세가닥씩 뿔을 달아 불을 켜게 하시니 도적이 처음에는 속다가 나중에는 적군이 사흘을 두고 강을 건너서 곧 경성으로 들어오니 임금님은 불의의 변을 당하시사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적군은 산성을 46일 동안을 에워쌌습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가 없어서 적군과 화친을 하자는 의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세 어른은 화친을 반대하시며
『오랑캐와 화친이란 다 무엇이냐?』
하시고 크게 분개하셨습니다. 이 세 어른은 마침내 적군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 어른은 삼학사라 하여 당시에 유명한 어른이었습니다.
적군을 나라 안에 들인 장군은 그때의 병사 유림에게 이런 의논을 하셨습니다. 지금 적군이 저희 나라에는 늙은이와 약한 것만 남겨놓고 날랜 군사는 다 데리고 왔은 즉 나는 이 틈을 타서 군사 5천명만 거느리고 적군의 나라를 치면 단박에 함락을 시킬 수가 있을 것이요, 그러면 이 기별이 반드시 도적의 괴수 한에게 갈 것이올시다. 그러거든 병사는 여러 진에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목목에 매복하였다가 경성서 나오는 놈마다 착착 사로잡아서 소식을 끊어놓으면 도적의 죄수 한은 제 나라의 소식이 궁금하여서 필경 군사를 거둬 가지고 나올 것이니 그때에 나의 병사가 힘을 합하여 도적을 쳐서 멸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으나 병사는 장군의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하릴없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적의 장수를 압록강 얼음 위에서 베이셨습니다.
장군은 사랑하는 어머님의 상사를 당하셨건마는 나라의 일이 위태한 때라 분상도 못하시고 진심 갈력 하셨으나 장군의 뒤를 거들이기는커녕 장군의 타는 속을 짐작하여드린 이조차 없었습니다. 우리 조선은 장군을 너무도 몰랐습니다. 장군은 여러 간신들의 시기와 저희로 인하여 조선 땅에서는 몸을 용납지 못하게 되어 나중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서 시골로 피해 다니시다가 필경은 명나라로 달아나셔서 여러 가지로 자기의 품을 뜻을 펴고 병자년의 분풀이를 하려고 하셨으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김자점은 속으로 딴 마음을 먹고 여러 충신을 해하고 또 장군을 해하려 단련을 하니 장군이 크게 꾸짖어 가로되
『나라 일이 아직 정하지 않았거든 네 어찌 나를 해하려 하느냐.』
하셨습니다.
슬프다! 기둥이 되고 주초가 되어서 나라를 위하여 평생의 심혈을 다하던 임경업 장군은 참혹하게도 옥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장군의 52년이라는 짧은 평생은 피와 눈물로 작은 무리들의 시기와 저희 가운데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연 하늘도 야속하고 무정합니다.
장군이 돌아가시던 날에 온갖 초목들은 비를 맞은 듯이 젖었더랍니다. 초목들도 무슨 비애가 있었던 것이지요. 또 장군이 평소에 사랑하시던 말도 장군의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는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긴 소리 한 마디를 지르더니 또한 장군의 뒤를 따라갔다 합니다.
도성 안 인민들은 다투어가며 비단을 내어서 장군의 신체를 충주 달천에 모시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이여! 장군은 과연 지하에 가셔도 눈을 감지 못하실 것이올시다. 우리들은 장군을 위하여 모든 사사를 다 버리고 오직 공변된 마음으로 우리의 앞길을 열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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