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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내가 쓴 책

방정환 이야기의 맛과 힘(2)

by 오른발왼발 2017.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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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이야기의 맛과 힘(2)

 

 

4. 참 우리 이야기를 밝히려 애쓴 것


나는 '이야기'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곧바로 이야기일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온몸으로 서로를 느끼며 나누어야 제 맛이 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서로 주고받아야지 어느 한쪽이 일방으로 우겨대는 게 아닙니다. 특히, 좋은 옛이야기는 들려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거리가 없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같은 높이에서 말하고 들으며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건에 더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만큼 상징성이 풍부하고 시대와 역사를 넘어서 흐르는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옛이야기 세계는 어린이들을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이끌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길러 줍니다. 더욱이 참된 우리의 이야기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더욱 큰 힘이 되어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우리 이야기란 어떤 것일까요?
방정환은 옛이야기의 가치를 인정하여 널리 구하고 《어린이》지를 통해 알리는 일에 힘썼습니다. 진작부터 우리의 옛이야기를 그렇듯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린이》지에 이렇게 다양하게 실어낸 것은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이야기성이 있으면서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라고 가벼이 넘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쪼각쇠 이야기>는 흔히 '반쪽이'로 알려 있는 이야기이며 사람을 생긴 모양만으로 가치를 잴 수 없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4형제 이야기>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재주로 힘을 모아 불의를 물리치고 서로 도와 바르게 살아가는 신나는 이야기입니다.
<수탉의 내력-나뭇꾼과 선녀 이야기><해와 달이 된 오누이><버리데기의 공>따위는 모두가 참 우리 이야기를 느끼게 합니다.

 

방정환은 1923년 《개벽》지에 현상공모를 하여 각 곳에서 보내온 옛이야기를 그대로 실어주며 출처를 밝혀 놓았습니다. 지금부터 살펴보려는 <호박장군>은 《어린이》지 제 3권 11호(1925년 11월)에 수안군 수구면 김윤산이라는 분이 보낸 이야기로 밝혀져 실려 있습니다.
참 우리 이야기란 이야기 속에 겨레의 삶과 생각이 스며들어 있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딱 맞는 느낌으로 '맞아. 이런 거야'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그야말로 뒤틀려 변형되기 전 그대로의 우리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호박장군>은 비슷한 여러 이야기들(식충장군, 보리밥장군)보다 훨씬 더 우리 이야기일 것 같은 친근함이 듭니다. 이야기 시작은 이렇습니다.

 

호박밭에서 태어났던지 호박만 잘 먹는 총각이 있었습니다. 떡도 호박떡이면 한 시루를 다 먹고 국도 호박국이면 한번에 몇 동이씩 먹어 내면서 날마다 호박국 호박떡만 하여 내라고 성화를 받치는 고로……

 

밭이란 밭에는 죄다 호박만 심어서 아들을 거두어 먹이는 부모이나 방귀 냄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납니다.

 

방귀 한번에 벽이 흔들리고 구리지도 않고 고리디 고린 냄새가 한나절이 되도록 없어지지 안는고로 코가 썩어 떨어질 지경이어서 견데다! 견데다! 못하야 아모곳에나 가서 어더먹으라고 내여 몰아버렸습니다.

 

아이들은 방귀소리만 들어도 즐거운데 지독한 냄새와 엄청난 소리에 벽이 흔들리고 코가 썩어 떨어질 지경이니 코를 찡그리며 재미있어 합니다.

 

집에서 쫓겨난 호박장군이 하는 수 없이 이 시골 저 시골 호박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기운차게 일을 해 줍니다.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도 돈은 필요 없고 호박떡이나 호박국만 끓여 달라는 호박장군을 모두가 좋아하고 반깁니다. 많이 먹는 것 갖고는 누구도 나무라지 않습니다.

 

먹고 먹고 먹고 먹고……어떻게나 많이 먹는지 한 솥을 혼자 다 들어먹고도 더 먹지 못해 애를 씁니다.

 

"대체 잘 먹는군……얼마나 먹으면 배가 찰런지 내일은 큰 가마솥에 가득 끓여 주어보리라"

 

합니다. 분명한 우리네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호박장군은 다른 이야기에서처럼 밥만 먹고 빈둥빈둥 노는 게으름뱅이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얻는 행운이나 단지 재수가 좋아서 문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호박은 옛날부터 집집마다 울타리에 심어 놓으면 애호박부터 늙은 호박까지 따먹을 수 있는 든든한 식량거리였습니다. 호박나물, 호박된장국, 호박범벅, 호박떡 따위는 모두 일상생활에 힘이 되는 것이었지요. 우리와 무척 가깝고 친한 음식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야기에 호박장군 스스로 노력하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호박총각은 하는 수 업시 이 싀골 저 싀골 호박곳을 차저다니면서 긔운차게 일을 하여주고 '나는 돈은 실흐니 돈도 그만두고 그 대신 호박떡이나 호박국만 끓여 주시요'하였습니다.

 

이렇듯 호박총각 스스로 애써 일하는 자세가 담겨 있지요.
계속하여 그 지독한 방귀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끝없이 먹여 주는데 방귀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밤에 밧갓방에서 쾅?하는 소리가 나면서 안방 벽이 들먹들먹하는 고로 집이 문허지는가 하야 자다가 말고 불을 켜들고 나가 보면 고리듸고린 냄새가 밧갓방으로부터 회오리바람같이 나오면서 코가 아파 씀벅씀벅 해집니다.
이 정도면 여기도 못 있고 저기도 못 있고 가는 곳마다 쫓겨날 만도 합니다.
그러다가 깊은 산골에 있는 큼직한 절에 헤매어 들어갑니다. 마침 그 절을 수시로 괴롭히는 도적 떼가 있어 호박장군은 호박국과 호박떡만 많이 먹여 주면 도적들을 물리쳐주기로 약속합니다. 도적놈의 괴수장 털보가 이를 알고 동정을 살피느라 절을 찾아와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데 호박장군이 어떻게 물리치나 살펴보겠습니다.


총각이 건너가보니까 딴은 귀골이 크고 무섭게 생긴 털보가 누어 자고 있는지라 이놈을 속여 혼을 내리라하고 큰 호박 한 개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자는 털보의 이마를 호되게 후려 때리고 얼른 호박을 방문밖에 던져 버리고 시침이 딱 떼고 앉아서
"이 친구 떡 좀 자시오"하였습니다.
털보가 자다가 벼락을 맞아 눈에 불이 나게 아픈지라 "에쿠"소리를 치며 일어나 본즉 한 총각이 앉아서
"나는 호박장군인데 당신 이마가 어찌 돌멩이 같은지 내 손끝이 아프구려"합니다.
털보는 손톱으로 툭인 것이 그다지 아픈 줄 알고 어이가 없어서……
다음날 총각과 도적은 절 뒷마당에 돌로 성 쌓기 내기를 하는데 호박장군은 방귀를 꾸지 않고 잔뜩 참어 아껴둡니다. 도적괴수 털보가 부하들을 잔뜩 데려와 먼데서 돌을 옮겨와 가깝게 놓아주는 반칙을 쓰지만 못 본체하고 자기 성만 혼자서 열심히 쌓습니다. 절의 중들은 호박장군이 지게 되었다고 얼굴이 노래지는데 어떻게 이겨낼까요? 또 방귀입니다.
그때 총각이 슬그머니 털보에게 가깝게 가서 털보성에다 대고 어젯밤부터 아껴두었던 방귀를 되게 꾸었습니다. 원래 여러 날 굶었다가 어저께 처음 배가 부르게 먹은 판이라 쾅 하고 천둥하는 소리가 나면서 털보가 애써 쌓은 성은 와르르 무너지고 털보의 부하는 그 밑에 치여 쓰러진 놈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만 털보가 목을 배여 바치게 된지라 그만 부하들을 몰아 가지고 뒤도 안 돌아보고 고린내가 진동하는 속으로 도망해버렸습니다.
중들은 코가 썩을 지경이건만 그래도 도적들이 달아난 것만 좋아서 손으로 코를 꼭꼭쥐고 절들을 합니다.

 

아이들 세계는 약한 존재입니다. 아이들 스스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느낄 테고 다른 많은 힘들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무심중에 생각할 테지요, 그러나 누구나 하고 사는 방귀, 똥 그런 것 자체가 힘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 무척 즐겁고 신나는 일이 됩니다. 누구든지 열심히 살아 나가면 자기 삶이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도 할 수 있는 것, 아이들도 힘이 있는 것, 아이들이 열심히 살아 나가는 것.'을 배우지 싶습니다.
일헤가 지나서 호박장군이 가고 없는 줄 알고 도적 떼가 또 찾아 드는데 호박장군이 대처하는 것도 참 재미납니다.

 

절을 캄캄하게 해놓고 중들은 모두다 검은 옷 입고 검은 보로 얼굴을 가리고 제각기 큰북을 들고 이 구석 저 구석 숨었다가 북을 치면서 모래를 끼얹으며 나오게 합니다.
절을 찾아든 도적들은 지옥같이 캄캄하여 더듬더듬 하는데 뒤에서 쾅하며 무언지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에 벌벌 떠는데.
여기서도 쾅 여기서도 쾅 소리가 나는 고로 쾅 소리가 나는대로 익크 호박장군 익크 호박장군 하면서 일제히 도망하여 버렸습니다. 그때 장털보는 이리가도 쾅하고 호박장군 저리가도 쾅하고 호박장군이 튀어나오는 고로 도망할 길을 잃고 급한대로 잠시 은신하려고 방으로 쑥 들어가니까 그때 어두운 방 속에 있던 총각이 털보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겁이 어찌 나던지 정말 방귀가 쾅하고 나왔습니다. 털보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가다가 거기서도 호박장군이 쾅하고 내닫는 것을 보고 그만 "악!"소리를 지르고 기절하여 쓰러졌습니다.

 

별로 힘이 세지도 않으면서 도적을 물리치는게 어거지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박을 많이 먹고 지독한 호박방귀를 많이 뀌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오히려 당당하고 씩씩한 기상이 느껴지기조차 합니다.
뛰어난 무용담처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라면 일체감이 어려울 테고 호박장군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저도 모르게 방귀가 다 나왔을까요? 인간다운 모습에 '나처럼, 내 친구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이》지에 담긴 어린이 사랑을 들여다보며 감탄과 놀라운 마음이면서 안타까움도 커집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는데도 오늘날 우리의 정서나 겨레의 마음이 이어지는 옛이야기들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어른들이 특히,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이 나서서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살렸으면 좋겠습니다. 시대를 타지 않는 자리에 서서 아이들 자아실현을 돕고 아이들이 주체가 되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를 찾아서 듣는 아이들 내면으로 들어가 그들의 것으로 되도록 힘쓸 일입니다.
흔히 옛이야기를 '너무나 뻔한 구조, 권선징악' 이라며 시시하게 취급해 버리는 경향을 두고 되짚어 봅니다. 오히려 오늘날 이 시대야말로 일상의 소중함을 잃어 버린 때이니 사람 사는 진짜 도리를 자꾸 떠올릴 일입니다.
<호박장군>같은 이야기를 통해 날마다 먹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요? 바르게 살아가는 게 정말 사람살 길이라고 자꾸만 강조해야 되지 않을까요? 바르게 사는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엉터리는 벌을 받고야 마는 순리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참된 옛이야기를 통해 이야기의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상상력을 아주 크게 펼쳐 보이기도 하고 모험을 즐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는 준엄한 진실이 들어 있어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억눌려 있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착한 마음씨를 갖고 있으면 결국 복을 받고, 남을 속이려 들기만 하면 망한다는 옛이야기 공통의 주제는 사람 살아가는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해가 될 일이 없겠지요.
방정환 선생님이 남기신 교훈 가운데 어머니들 마음에 새기고 실천할 일을 떠올립니다.
"정성스러워라. 오직 정성스러워라." (정리 : 김경애)

 

5. 우화 대신 옛이야기를


<<어린이>> 지에 들어있는 이야기들 가운데 우화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한 이야기 가운데 우화라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26편 뿐입니다. 가슴뭉클한 사실 이야기, 역사인물 이야기, 역사지리 이야기, 과학 이야기, 우리 옛이야기, 외국 옛이야기 들에 대면 정말 작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금독기>(생 ㅎㅈ/이솝우화/<<어린이>> 2권 2호)를 보고 우리는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연못 속에 도끼를 빠뜨렸다가 금도끼도 제 것이 아니라고 은도끼도 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도끼를 다 얻은 착한 나무꾼과 욕심내어 제 도끼도 잃게된 욕심쟁이 이야기 <금도끼 은도끼>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그 이야기가 이솝우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나온 이솝우화전집을 찾아보았더니(어른을 위한 <<이솝우화 전집>> (신현철 옮김/문학세계사/303쪽 <나무꾼과 헤르메스>) 진짜 이솝우화였습니다. 꼭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왜 남의 이야기가 이렇게 깊숙히 우리 속에 뿌리를 박고 있을까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우화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비교문학산고>>(김태준 지음/민족문화문고간행회) <이솝우화의 수용과 개화기 교과서>를 보면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잘 나와 있습니다.

 

우화는 읽기 쉽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둘, 셋 정도의 주인공이 나오고 하나의 사건이 나옵니다. 대개 말이 오가는 그 사건 속에서 주인공들은 대조가 되는 사람의 성격으로 사람의 행동을 비유합니다. 이해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그 속에 도덕교훈이 들어 있으니 교육하려는 사람한테는 우화만큼 좋은 것이 없겠습니다.
그래서 도덕교훈을 중시했던 개화파들은 1895년 개화기 교과서 <<신정 심상소학>>에 우화를 싣기 시작합니다. 그 뒤에 우화는 점점더 많이 교육에 쓰이면서 사람들 속에 파고들어갑니다. 당시에 거의 유일한 어린이 읽을 거리였던 교과서가 이렇게 우화로 도덕을 교육하는 역사와 발맞추어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관한 한 1906년에 발간된 대한국민교육회의 <초등소학> 등, 이후의 교과서들이 점차로 더 많은 우화들을 교재로 채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비교문학산고> 75쪽)

 

개화파들은 이솝우화뿐만 아니라 우리 옛이야기도 우화식으로(줄거리 중심의 이야기, 대화법, 교훈성) 써서 교과서에 실었습니다. <<신정 심상소학>> 3권에 실린 97과 가운데 우화로 볼 수 있는 이야기는 18과이고 이 가운데 이솝우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8과라고 합니다. 그 나머지는 우리 옛이야기이거나 동양의 옛이야기일 것이라고 김태준도 추측하고 있습니다.(<<비교문학산고>> 59쪽) 백성들이나 틈날 때 즐기던 것으로 되어 있던 이야기가 어린이들이 읽고 배우는 책에 실리게 된 것입니다. 입으로만 전해지던 옛이야기가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우화식의 옛이야기만 교과서에 실었기 때문에 우리 옛이야기 자리를 우화식의 이야기들이 빼앗아 대신 들어앉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성이 있는 좋은 옛이야기들이 점점 이야기되지도 않고 책으로 쓰여지지도 않게 되어 사람들 속에서 잊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어린이들이 보아야 하는 책 하면 <이솝우화>를 떠올리고 어린이들이 동화를 읽으면 '거기서 말하는 게 뭐니?'하고 교훈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옛이야기이기는 옛이야기인데 우화하고 이야기성이 있는 좋은 옛이야기는 무엇이 다를까요? <<어린이>> 지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 말해 보겠습니다. 우화로는 <여호와 고양이> (고한승/<<어린이>> 지 7권 1호)를 보고 우리 옛이야기로는 <개금의 덕> (임성록/<<어린이>> 지 1권 8호)을 보겠습니다.

 

고양이가 꾀많다는 여우를 만나서 "여호님, 안령하심니까?..."하면서 공손히 대하니 여우가 잘난 척 하면서 니 재주는 뭐냐 하니까 딱하나 재주가 있다면 개가 물려고 쫓아오면 나무에 올라가는 재주가 있다고 합니다. 여우는 "아-니 모도 고것뿐이냐?"면서 자기는 머리 속에 꾀주머니가 있어 무슨 꾀든지 꺼낼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때 사냥꾼이 사냥개를 끌고 옵니다. 고양이는 얼른 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여우는 못 올라가 잡혀갑니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깔깔 웃으면서 "여호님여호님 뼈ㅅ속에잇는 ㅅ괴주머니를 좀 글느시구려 글녀요 하하하"합니다.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서 자기 이야기처럼 느끼는 것이 어린이들이 이야기를 듣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누구도 제대로 된 주인공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난 척하고 고양이를 깔보는 여우는 물론이고 고양이도 여우가 꾀 많다고 처음부터 "여호님..."하는 걸 보면 공손한 게 아니라 아양떠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여우기분을 맞춰서 한껏 잘난 척하게 해놓고 죽게 된 여우한테 깔깔대고 웃으면서 꾀주머니 어떻게 됐냐고 비웃습니다. 누구도 제대로 된 놈이 없습니다.

 

또 이 이야기는 머리로 이해하기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마음으로는 헷갈립니다. 잘난 척 한 여우가 나쁜 놈이긴 합니다. 이야기에서 말하려는 것도 그런 것일 겁니다. 그렇지만 한쪽마음으로는 잘난 척 한번 했다가 죽게되는 여우가 불쌍하기도 합니다. 달랑 하나의 사건만 있고 둘 사이에 오가는 말로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어린이들이 마음으로 느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난 척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선생님의 말과 같습니다.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감동이 없지요.
그래서 룻소는 <에밀>에서 어린이들한테 우화는 절대로 가르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까마귀와 여우>의 이야기를 꼼꼼히 분석하면서(<<에밀>>/J.J.루소/정봉구 역/범우사/완역판 135-139쪽) 까마귀를 속여서 입에 물고 있는 치즈덩어리를 빼앗은 여우를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나쁜 꾀가 지혜라는 이름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이 우화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어린이들에게 라 퐁텐느의 우화를 배우게 하지만 그러나 그 우화를 이해하는 어린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이 그 우화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더욱 나쁘리라. 왜냐하면 그 속에 있는 도덕은 너무나 뒤섞여 있어서 어린이의 연령에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으므로 어린이를 미덕으로 접근시키기 보다는 악덕으로 접근시키기 때문이다.(앞 책 134쪽)

 

이제 우리 옛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개금의 덕>을 읽을 때 참 재미났습니다. 그것은 <도깨비방망이>나 <혹부리 영감> 같은 이야기로 전해 오는 이야기인데, 알고 있었는데도 참 재미났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이 이야기 끝에 宣川郡 宣川面 用南洞 이라고 주소가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방정환 선생님이 <개벽> 지를 통해서 우리 옛이야기 모으기 운동을 벌이면서 지방독자가 보낸 이야기인 듯 합니다. 이런 뜻있는 활동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 또한번 안타까웠습니다.
여기에는 착한이가 눈 먼 동생으로 욕심쟁이가 형으로 나옵니다. 형제로 나오니까 이야기가 더 팽팽합니다. 그런데다 형과 형수가 눈 먼 동생을 구박합니다. 그런데 구박받던 눈 먼 동생은 나중에 복을 받아 잘 살게 됩니다. 도깨비들한테 들은 말대로 해서 동생은 눈도 뜨고 부자집 딸과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동생을 흉내낸 욕심쟁이 형은 도깨비들한테 벌을 받습니다. 도둑질 하지 못하게 두 눈을 빼버리고 도깨비방망이로 코를 두들겨서 늘여놓습니다. 코를 질질 끌고 더듬더듬 더듬어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주 우습습니다.
이야기가 말로 주거니받거니 하는 게 아니라 되풀이 되는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화하고 다른 부분이지요. 동생이 나무하러 가서 도깨비를 만나 벌이는 사건과 형이 나무하러 가서 도깨비를 만나 벌이는 사건이 똑같이 되풀이 됩니다. 나무하다가 개금을 따는 대목만 보아도 둘이 대조를 시키면서 되풀이하는 맛이 한껏 살아납니다. 동생은 한 개를 뚝 따면서

 

'이것은 어머니 드리고'하고 또 한 개를 뚝 따면서 '이것은 형님드리고'하고 또 한 개를 따면서 '이것은 우리 아즈머니 드리고'하고 또한개는 따면서 '이것은 나 먹고' (31쪽)

 

하는데 형은 정 반대입니다.

맨첨에 딴 것은 제 입에 넣고 '이것은 나먹고'하고 고다음것은 따면서 '이것은 우리 마누라 주고'하고 셋째번에 딴 거을 가지고 '이것은 우리 어머니주고'하고 (34쪽)

 

이런 한 대목만 보아도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 너무나 뚜렷해서 헷갈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당연히 착한 이와 한몸이 되어 이야기를 듣습니다. 끝에 나쁜 놈이 벌을 받을 때는 이야기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한마음으로 '그렇지, 그렇지!'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듣고 듣고 자꾸 들으면서 '어린이를 가르치는 어른의 말'이 아니라 '어린이 스스로 느끼는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우화와 옛이야기의 다른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우화 옛이야기
듣는 이와 하는 이가 다른 높이, 어른이 어린이한테 준다  듣는 이와 하는 이가 같은 높이, 어린이 스스로 느낀게 한다
교훈만 찾아내면 끝이다 상징성이 풍부한 사건이 되풀이 되어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건이 더 깊은 뜻으로 남을 수 있다
시대에 잡혀있는 윤리도덕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 헷갈린다, 도덕성 우위 시대와 역사를 넘어 흐르는 진실, 진리로 절대로 헷갈릴 수 없다, 문학성 우위
시대교훈을 배운다  사상으로 자리잡는다
현실에 따라가는 사람으로 만든다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주인으로 이끈다
문학 교육의 질곡을 만들었다  어린이 스스로 문학을 돌려주어야 한다

 

끝으로 우화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첫째, <<어린이>> 지에 이솝우화를 소개하면서도 뚜렷한 중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우화 가운데 <까마귀와 여우> 같이 나쁜 꾀로 승리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친한 친구>(生ㅎㅈ/이솝우화/<<어린이>> 지 2권 4호) 처럼 죽을까봐 동무 팽개치고 혼자 도망가는 동무를 탓하는 이야기나 <이리와 어린양>(미소/이솝우화/<<어린이>> 지 8권 2호)처럼 힘센 놈은 무슨 까닭을 붙여서든지 약한 놈을 기어코 잡아먹어버린다는 이야기, <적은 힘을 모아서>(우화/<<어린이>> 지 7권 4호> 개미들이 힘센 곰을 물리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옛이야기의 세계입니다. 남을 딛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잘 살아가려는 이야기, 못나고 힘없는 사람도 힘을 합하면 힘 센 놈을 이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시대와 역사를 넘어 우리 옛이야기 속에 힘차게 살아 숨쉬고 있는 백성들의 진실이고 사상입니다. <<어린이>> 지에 들어있는 이솝우화나, 우화식의 우리 옛이야기들이 우화의 틀을 쓰고 있지만 속알맹이는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외국 동화를 번안해서 들려 주었던 것이 초기 어린이 문학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뜻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방정환 선생님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거꿀로 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 옛이야기를 찾아내고 그것을 들려주는 것은 소홀하면서 우화로 어린이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그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금독기>를 우리 이야기인 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둘째는 맨 끝에 교훈을 덧붙이지 않고 이야기만 재미나게 들려준 것도 눈여겨 볼 일입니다. <친한 친구> 끝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그 친구는 얼골이 새ㅅ빨개저서 아모말도 하지 못했습니다.(<친한 친구>/生ㅎㅈ)
요즘처럼 뒤에 어른이 가르치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어린이들이 스스로 생각해 보게 한 점입니다. 올바른 방법입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나라를 구하려는 한 마음으로 어린이 문학운동을 평생 벌이셨는데 어린이를 자기 생각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어린이의 세계로 나아가 어린이들을 역사의 실체로 세우려고 애썼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님이나 어린이문학 운동을 하는 사람들한테도 새롭기만한 방정환 선생님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할 지 생각해 봅니다.

 

......모든 선진이 소년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대별하여 두가지로 말하면 한 가지는 이제 말한 바와 같이 지금의 이 사회 이 제도밖에는 절대로 다른 것이 없다하여 그 사회 그 제도 밑으로 끌어넣으려는 것과...., 한 가지는 아아 지금의 이 사회 이 제도는 불합리, 불공평한 것인 즉 새로 장성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불합리, 불공평한 제도에서 고생하지 않도록 하여 주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전자에서는 필연으로 강제와 위압적 교육이 생기는 것이요 후자에서는 필연으로 애와 정의 지도가 생기는 것입니다..... (<<소파 방정환 문학전집>> 7권 <소년의 지도에 관하여> 가운데/문천사) (정리 : 오호선)

 

6. 마무리


지금까지 《어린이》지를 중심으로 방정환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 짚어보았습니다. 《어린이》지를 꼼꼼하게 살펴보지는 못해서 편집자로서의 방정환 선생님의 모습을 깊게 다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 어린이 문학사에서 제일 첫 번째로 꼽는 방정환 선생님의 모습을 새롭게 살필 수 있었다는 점이 우리에겐 큰 수확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좁은 시각 속에서만 방정환 선생님을 바로봤다는 것이지요.
이번 연구가 우리에게 소중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건 많지만, 부족한 건 앞으로 계속 채워나가야 할 우리의 몫이고 말입니다.

** 이 글은 1999년 어린이도서연구회 옛이야기분과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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