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청스러운 선생님께.
선생님, 잘 지내시죠?
다시 일 년만이네요. 작년까지만 해도 때가 되서 형식적으로 쓰는 편지처럼 느껴지실까 봐 걱정이었는데, 올해는 그런 마음이 사라졌어요. 꼬박꼬박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졌거든요. 맞죠? ^^
그래도 이번에 편지를 쓰면서 찔리는 부분이 있긴 했어요. 제가 작년에 똑똑한 선생님께 편지를 쓰면서 올해는 선생님이 쓰신 옛날이야기 문체에 대해 공부한 성과를 조금이나마 이야기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약속을 전혀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여름까지는 고민이라도 계속하고 있긴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다른 게 더 재미있게 느껴진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만 선생님 옛이야기 문체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건 까먹고 만 거지요. 그렇다고 제가 관심이 없어져서 그런 건 절대 아니라는 걸 알아주세요. 너무 어렵고 막막하게만 느껴지고 있던 참에 뭔가 형체가 보이는 다른 흥미거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랍니다. 열심히 고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분명히 선생님의 옛이야기 문체도 제 눈앞에 희미한 형체라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그때는 틀림없이 그 성과를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그나저나 제가 ‘능청스런 선생님께’라고 해서 깜짝 놀라셨죠? 혹시 ‘감히 이렇게 건방진....!’ 하며 화가 나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만약 그렇다면 화를 잠시만 풀어주세요.
제가 편지에 어떤 이야기를 쓸까 하고 고민을 했던 게 올 초였거든요.(이렇게 몇 달 전에 미리미리 편지 쓸 걸 걱정하는 것도 저 밖에 없지 않을까요?) 갑자기 선생님 얼굴에 또야 너구리 얼굴이 겹치는 거예요. ‘그래, 올해는 또야 너구리 이야기를 쓰자’ 하고 마음 먹었죠.
선생님이 쓰신 작품 가운데 또야 너구리가 나오는 작품은 모두 세 권이죠. 다 단편으로요.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와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 <밤 다섯 개>, <또야와 세발 자전거>. 그리고 또야 너구리는 아니지만 너구리가 나오는 그림책 《아기 너구리네 봄맞이》(길벗어린이)도 있어요.
그러고 보면 선생님이 평소에 너구리를 좋아하신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많은 동물 가운데 동물 캐릭터로 선생님께 선택을 받은 걸 보면 말이에요.
선생님이 왜 너구리를 선택했을까? 선생님이 대답을 해 주실 리도 없으니까 그냥 제 마음대로 상상을 해 봐요.
가만 보면 또야 너구리든 그냥 너구리든 너구리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 유년동화에요. (물론 의인화 동화의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건 너구리의 모습에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사실 너구리 생긴 모습이 귀여운 맛이 있어요.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지 않을까요? 귀여운 동물들이야 너구리 말고도 많잖아요.
그런데 너구리는 자꾸 자연을 생각하게 해요. 너구리는 도심 속의 자연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몇 안 되는 동물이잖아요. 라면 ‘너구리’ 때문인지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폼코코 너구리대작전’에서는 사람들의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싸우는 너구리들을 만날 수 있기도 하고요. 너구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 주위에서 자연의 중요성을 일깨워는 친근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선생님도 그래서 너구리를 선택하신 건 아닐까 싶은데……. 맞죠?
또야 너구리가 선생님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건 2000년 12월에 나온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우리교육)에서였어요. 단편 모음인 이 책에서 또야 너구리 이야기는 단 한 편뿐이었죠. 표제작인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이 이야기도 자연에 관한 이야기에요. 엄마는 엉덩이가 뻥 뚫린 바지를 기워 입히기로 하죠. 하지만 요즘 세상에 엉덩이를 기운 바지를 입고 유치원에 가고 싶어 하는 아이는 없어요. 또야 너구리도 마찬가지였죠. 엄마 너구리는 또야를 안고 달래요. 또야가 기운 바지를 입으면 산에 들에 꽃들이 더 예쁘게 핀다고요. 시냇물에 고기들도 더 많이 살고, 하늘에 별님들도 더 예쁘게 반짝거린다고요.
또야는 기운 바지랑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묻지는 못해요. 엄마가 기운 바지를 억지로 입으라고 거짓말하는 거냐고 따져보기는 하지만 엄마가 거짓말하는 것 본 적이 있냐는 말에 더 이상 따지지도 못해요. 대신 엄마 말만 곧이 믿고 유치원에 가는 길에서 은행나무며 시냇물에게 자랑을 하지요. 자기가 기운 바지를 입었으니 예쁜 잎이 가득 피고, 물고기가 많이 살 거라면서요.
엄마 말을 믿고 나무며 시냇물에 자랑하는 모습은 참 아이답고 귀여워요. 하지만 전 좀 아쉬웠죠. 왜 또야는 엄마가 기운 바지를 입으면 산과 들에 꽃들이 더 예쁘게 피고, 시냇물에 고기들도 더 많이 살고, 하늘에 별님들도 더 예쁘게 반짝거린다고 했을 때 “왜?”하고 묻지 못했을까요? 어린 아이들에게 “왜?”는 전매특허나 다름없는데요, “왜”라고 물으며 세상을 알아 가는데요. 혹시 “왜?”라고 물으면 너무 빤한 대답이 나올까봐 그러신 걸까 궁금해졌죠.
또야 너구리의 캐릭터는 마음에 들었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던 건 이 때문이었어요. 그러다 또 다른 또야 너구리를 만났어요.
2002년에 창비아동문고 200권 기념으로 나온 ‘오늘의 동화 선집 1-2’ 속에서였어요. 다른 작가들 작품은 모두 한 편씩이었지만 선생님 작품은 두 편이 실려있었죠.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과 <밤 다섯 개>. 선생님 작품이 두 편 실렸던 건 아마도 원고매수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선생님 작품만 유년동화라 아주 짧은 분량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전 이때 두 작품을 읽고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선생님이 이렇게 어린 아이 마음을 잘 알고 계실 줄은 정말이지 몰랐거든요. 아니, 아이 마음을 잘 알고 계신다기 보다는 선생님이 마치 또야 너구리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마음 한편에선 ‘아, 드디어 선생님이 도가 트셨구나!’ 싶으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아이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시면서 왜 겉으로는 그렇게 엄숙하게만 하고 계셨을까?’ 싶었어요.
음~.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마치 너구리 같이 느껴지네요. 너구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능청스러움이잖아요. 속으론 아이 같은 마음을 감추고 겉으로 괜히 엄숙한 척하셨던 건 아니시죠?
실은 저도 별명 가운데 하나가 너구리예요. 물론 이유는 달라요. 눈 밑으로 축 쳐져 내려온 심각한 다크써클 때문이니까요. 같은 너구리지만 선생님과는 격이 다른 거죠. 선생님이 훨씬 좋은 거예요.
딴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다시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 이야기를 할게요.
또야는 콩나물 심부름을 가요. 엄마는 또야한테 백원짜리 동전 한 닢을 주지요. 백원은 심부름값이 아니라 그냥 주는 거라고 하면서요.
또야는 자기가 엄마 심부름을 한다는 자부심에, 또 엄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백 원을 줬다는 사실에 이중으로 신이 났을 거예요. 만나는 사람마다 엄마가 그냥 줬다며 자랑을 하지요. 어른들이 보기엔 별 것도 아니지만 또야한테는 아주 굉장한 거니까요.
2002년, 이 책이 나올 때쯤 저희 아이는 네 살이었어요. 그런데 또야 너구리가 자랑을 하며 다니는 모습이 꼭 저희 아이 모습 같았어요. 뭔가 자랑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면 괜히 어른들에게 다가가 넌지시 자랑을 할 때가 있었거든요. 물론 사정을 모르는 어른들은 웬 생뚱맞은 소리인가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지요. 하지만 아이가 어른들의 그런 표정까지 살필 수는 없어요. 아이는 오로지 자기가 자랑하고 싶은 것 하나에만 집중하거든요. 그러니 자기가 자랑하고 싶은 걸 누군가에게 자랑을 했다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는 거예요.
전 참 신기했어요. 아이들이랑 별로 친하게 지내실 일도 없으실 것 같은 선생님이 이렇게 아이 마음을 들여다보듯 쓰시다니요. 순간, 전 선생님이 이제 도가 트셨구나 싶어졌어요. 동시에 불길한 생각도 스치듯 지나갔어요. 말씀드리기 좀 죄송스럽긴 한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도가 튼다더니 혹시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건 아닌가 싶어졌죠. 선생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늘 불안불안했잖아요.
<밤 다섯 개>는 원고지 다섯 매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 속에서 또야와 다섯 명이나 되는 또야 친구들, 엄마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이 재미있게 펼쳐져요. 엄마한테 받은 밤 다섯 개를 친구들한테 주고 나니 자기 것이 없어져 어쩔 줄 몰라 하는 또야의 모습도 귀여웠어요. 가만 보니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에 나온 또야 보다는 좀더 어린 모습인 것 같아요. 숫자에 대한 개념도 분명하지 않은 것 같아요. 밤 숫자와 친구들 숫자를 계산할 줄 모르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근데, 전 아이들은 어릴수록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나빠서가 아니라 아직까지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간다고 여길 때이기 때문인 거지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우선 자기 걸 먼저 챙겨요. 자기 게 확보된 다음에야 주위를 돌아보죠.
그런 점에서 또야는 좀 특이했어요. 마지막 남은 한 개를 마저 다 친구에게 주고 자기 손에 밤이 없어지자 울어버리잖아요. 엄마가 울음소리를 듣고 와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요. 제 생각엔 또야가 차라리 마지막 한 개를 주지도 못하고 안 주지도 못하고 갈등을 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마지막 남은 자기 것까지 포기하고 친구를 주느냐 마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 작품에서는 또야가 특별히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게 없는 것 같네요. 밤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긴 했지만 그것도 엄마가 동물들이랑 나눠먹으라고 해서 그런 건 아닐까 싶어져요.
그래서 좀 아쉬워요. 또야 너구리가 유년 동화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론 좋아요. 왜냐고요? 요 앞에서 제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도가 튼다더니 혹시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건 아닌가 싶어졌다고 했잖아요. 그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행히 그 뒤로 선생님 작품도 계속 만날 수 있었고요. ^^
마지막으로 만난 또야 너구리는 2003년에 나온《또야와 세발자전거》(효리원)이었어요. 이 책은 그림책이죠. 처음엔 외국 작가가 그림을 그렸었는데, 2008년에 박요한 작가의 그림으로 다시 나왔죠. 2003년에도 살짝 보긴 했는데, 사실 그때 그림이 뭔가 우리 정서랑은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만 나요. 이번에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드리며 다시 그림책을 사서 봤지요. 예전에 봤던 그림과는 달리 훨씬 친근하게 느껴져요. 같은 너구리를 그려도 이렇게 느낌이 달라질 수 있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여기선 그림이야기는 넘어가고요...
선생님은 처음부터 그림책 원고로 쓰신 경우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선생님의 짧은 원고가 그림책으로 만들어진 거지요. 그래서 그냥 유년동화를 읽는 느낌으로 봤어요.
뽀야 너구리가 반짝반짝거리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나타나자 또야는 그 자전거가 너무 부러워요. 그러다 놀이터에 놓여 있는 자전거를 발견하고 자전거를 타보다가 그만 집까지 타고 와서는 뒤란에 꼭꼭 감춰뒀지요. 깜짝 놀란 엄마한테는 아무도 안 봤다고 하면서요.
그날밤 잠자리에 들려는데 곰 인형 굴땡이가 보이지 않아요. 또야는 굴땡이를 껴안아야 잠이 드는데요. 또야는 굴땡이 생각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해요.
그런데 엄마가 굴땡이를 찾으러 가자며 뽀아네 집에 가요. 또야는 뽀야가 굴땡이를 안고 있는 걸 보죠. 굴땡이는 뽀야 것이 됐고, 자전거는 또야 것이 된 거죠. 또야는 그럴 수 없었어요. 자전거 백대, 천대보다 굴땡이가 더 좋으니까요.
이 모든 건 또야 엄마의 계획이었지요. 결과를 보자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고, 또야도 스스로 자전거가 아니라 굴땡이를 선택할 수 있었으니 만족스러운 편이에요.
하지만 선생님, 만약 엄마가 이런 기지를 발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죠? 아니, 또야 엄마는 또야가 자전거를 가져온 걸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계획을 꾸밀 수 있었지만 대개 이런 일이 있을 때 엄마가 모르는 경우가 훨씬 많은 걸요. 자전거를 갖고 싶어하는 또야의 마음, 자기가 늘 안고 자던 굴땡이가 없어서 불안해하는 마음 등 또야의 마음만은 너무 잘 다가오지만 전 아무래도 어른들이 너무 개입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어쩐지 선생님이 걱정이 너무 많아지신 나머지 앞서서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이 책은 현재 절판되었네요)
그래도 전 또야 너구리가 참 좋아요. 또야 너구리는 유년동화에서 의미있는 캐릭터였다고 여겨지거든요.
전 유년동화에 관심이 많아요. 아이를 키우며 보니 초등학교 입학 전후에 보여줄 만한 동화가 참 없다는 걸 실감했거든요. 또야 너구리는 이 또래 아이들에게 딱 맞는 이야기라 여겨졌어요. 크고 난 뒤에도 또야 너구리를 어린 시절의 친구로 평생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봤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만드신 또야 너구리 캐릭터 속에는 그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고요.
참 아쉬워요. 선생님께서 조금 더 사시면서 또야 너구리 이야기를 써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
혹시 하늘나라에서 시간이 나면 새로운 또야 너구리 이야기도 써 주세요. 언젠가 제가 하늘나라에 가면 꼭 읽어보러 갈 테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내년에 다시 인사 드릴게요.
2011년 5월 6일.
오진원 드림.
추신)
얼마 전 6학년이 된 아이가 도덕 숙제로 ‘사회에 책임을 다한 사람’을 조사해 가야 한다고 하면서 한 사람은 생각을 해 놨는데, 다른 사람을 누구로 해야 할까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권정생 선생님이래요. 지금까지 선생님을 사회에 책임을 다한 사람으로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는데, 아이 말을 듣고 보니 음~ 맞는 것 같아요. 아이 덕분에 선생님을 또 다시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근데, 중요한 건 막상 숙제는 선생님을 빼고 했다는 사실! 왜냐고 물으니 숙제할 시간이 부족해서 그냥 인터넷에 있는 걸 베끼는 바람에 그랬다고 하네요. 이상과 현실은 늘 맞아떨어지질 않는 것 같아요.
이 글은 2011년 5월 13일 똘배아동문학회에서 주최한 권정생 4주기 추모제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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