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 권정생 선생님께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저, 이번에 선생님께 편지를 쓰면서 제가 왜 선생님을 좋아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됐어요. 근데 한참을 곰곰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 뭔지 아세요? 선생님은 정말 나쁜 남자 스타일이라는 것이었어요.
나쁜 남자 스타일? 말도 안 돼!!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저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드시는 데 선수이시잖아요.
생각해 보면 선생님께서 저를 불편하게 만드신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선생님 작품을 보고 나면 늘 마음이 불편했어요. 마치 마음 한켠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 같았죠. 그래서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어요. 잊고 싶어도 자꾸 찌르곤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선생님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선생님께서 저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작품은 <하느님의 눈물>이었어요. 처음엔 ‘유년동화’에 걸맞게 예쁜 삽화를 보고 가볍게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세상에……, 처음 두 줄짜리 한 문단을 빼고는 모두가 불편했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에 이렇게 맞부딪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숨이 막힐 것 같았어요. 한편으론 공감을 하지만, 한편으론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반발심도 생겼어요.
돌이 토끼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돌이 토끼의 마음이라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할 것 같았지요. 그것도 아주아주 큰 맘을 먹고 난 다음에나 말이에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데, 또 아이들은 잘 먹어야 하는데, 먹는 것 앞에서 이렇게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싶기도 했어요. 물론 최소한의 음식만을 먹는 건 정말 훌륭한 일이에요. 하지만 이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건 성스러운 성직자쯤이나 되어야 가능하지 웬만한 사람들한테는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또 먹고 싶은 걸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인데, 이런 행복감마저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음……. 어쩌면 선생님께서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가 이런 것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의 생명에 대해 최소한 예의를 지켜주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하느님의 눈물>을 보면 우리가 먹고 있는 많은 생명에 대해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건 틀림없어요.
저희 아이가 어렸을 때의 일이에요. 아이는 고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하느님의 눈물>을 보고 난 뒤에 만감이 교차했나 봐요. 한동안 고기를 먹을 때마다 “불쌍하긴 한데 너무 맛있어서 어쩔 수가 없어.” 하곤 했어요. 나에게 먹히는 생명에 대해 떠오르긴 하지만 욕망(!)을 이기진 못한 거지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요. 머리 따로 입 따로! 그러다 문득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면 심한 자책감! 하지만 일상은 전혀 변하지 못하고 또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게 저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어쩌면 요즘의 식품 유통구조가 우리를 더욱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닭을 먹으려면 시장에 가서 살아있는 닭을 골라서 즉석에서 잡아왔거든요.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되기 위해 죽어야 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던 거죠. 요즘에야 그런 모습은 볼 수가 없어요. 이미 다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있고, 부위별로 나누어서 포장되어 있어서 이게 실은 살아있는 생명이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있어요. 저는 사람들이 유독 개고기만 더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까닭도 이런 시스템이랑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른 가축들은 다 공장화된 도축 시설에서 처리가 된 뒤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만 개고기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여기에 개는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동물이라는 인식이 더해지면서 유난히 개에 대해서 더 민감해진 것만 같아요. 개를 다른 가축들처럼 도축 시설에서 처리를 했을 때 지금과 반응이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가축들을 눈앞에서 도축하는 걸 보게 된다면 개고기를 혐오하듯이 혐오하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을까요? 아니, 적어도 지금처럼 무감각하게 먹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선생님.
선생님은 요즘 무얼 먹고 사셔요?
하느님 곁에 가셨으니 이제 하느님처럼 ‘보리수 나무 이슬하고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 조금’만 마시고 사시나요?
그렇다면 이제는 돌이 토끼의 처지에서 해방이 되신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축하를 드려야할 것 같아요. 선생님이 풀어야 했던 숙제를 해결하신 셈이니까요.
세상에 있는 저는 아직도 돌이 토끼 처지랍니다. 아니, 돌이 토끼 처지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죠. 실컷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끔씩만 고민을 하게 되니까요. 그마저도 얼마 고민하지 않고 현실에 고개를 숙이고 마니까요. 하지만 역시 고민은 고민이지요. 이게 다 선생님이 저를 불편하게 만드셨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선생님만 쏙 빠져나가신 느낌?
제가 선생님이 나쁜 남자라고 생각하는 건 다 이 때문이에요. 선생님이 잘 모르실 것 같아서 굳이 설명을 하자면요,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는 남자를 말한대요. 강한 힘과 지적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때로는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며 모성애를 자극하기도 하고요. 결국 여자의 마음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죠. 여자가 푹 빠지게 만들었다가, 여자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말이에요. 문제는 여자들이 이런 남자에게 끌리는 경우가 많다는 군요. 쩝…….
선생님은 선생님이 하고 싶으신 이야기를 <하느님의 눈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그럼으로써 조금은 숨통이 튀셨을 지도 몰라요. 선생님이 갖고 계신 간절한 생각을 풀어내지 못하고 계셨다면 너무 답답하셨을 테니까요. 아마 선생님도 <하느님의 눈물>을 읽고 저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불편하고 힘들어할 줄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하셨을 거예요. 그럼에도 이 작품을 안 쓰실 수는 없었던 거고요. 문제는 불편해 불편해, 정말 나빴어, 하면서 <하느님의 눈물>을, 선생님을 자꾸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선생님한테 점점 끌리게 됐다는 사실이죠. 이제 제가 선생님을 왜 나쁜 남자라고 하는지 아시겠죠?
일 년에 한 번, 선생님께 편지를 쓰다 보니 해마다 조금씩 제가 투덜이가 되는 것 같아요. 조금 버릇이 없어 보일 만큼 말이에요. 그래도 좀 참고 봐 주세요. 세상에 저 말고 누가 해마다 선생님께 투덜거리며 편지를 쓰겠어요? 그러니 조금 불편해도 참고 봐 주세요. 혹시 알아요? 제가 <하느님의 눈물>을 읽고 불편해 불편해 하다가 선생님의 매력에 빠졌던 것처럼 선생님도 제 편지를 보시며 불편해 불편해 하시다 저한테 빠지게 될 지도 모르잖아요? ㅋㅋ.
선생님.
벌써부터 내년 편지가 기대되시죠? 일 년 뒤를 기다려 주세요. 더욱 투덜투덜대며 선생님을 불편하게 만들어드릴 테니까요.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2012년 5월 8일.
나쁜 남자에게 나쁜 여자로 남고 싶은 오진원 드림.
이 글은 2012년 5월 16일 똘배아동문학회에서 주최한 권정생 5주기 추모제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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