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나막신
권정생 글/우리교육/2002.8.10.초판
1940년대 초반, 일본 도쿄 혼마찌에서 살아가는 조선 아이들, 그리고 일본 아이들. 과연 누가 더 슬픈 운명을 살아갈까?
조선 아이들?
이 책을 읽고나면 이런 답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쟁을 겪는 사람들, 특히나 아이들한테 전쟁이란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일본 아이 하나꼬, 에이코나 조선 아이 준이나 분이 가운데 누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가를 묻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의 중심 이물은 하나꼬와 준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하나꼬는 정중앙에 있다. ‘왜 하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나꼬의 삶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겉으로 볼 때 하나꼬는 부잣집 외동딸이다. 다들 꼬질꼬질한 삶을 살아가는 동네에서 하나꼬는 아무래도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건 하나꼬의 진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꼬는 아주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동생과 배를 곯으면서 살아온 처지다. 혼마찌 빈민가 아이들 삶이나 별로 다를 게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불행할 수도 있다. 부모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다 하나꼬는 동생을 고아원에 남겨둔 채 수양딸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하나꼬의 양부모 모습이 또 특별나다. 줄거리 속에서 크게 부각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아버지는 조선 남자고 어머니는 일본 여자라는 설정부터가 그렇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꼬에게 살갑게 대하지도 않고, 늘 비밀에 쌓여 있는 분위기다. 덕분에 하나꼬는 겉모습만으로는 부잣집 외동딸 차림이지만 마음만은 늘 외롭다.
그런 하나꼬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준이다. 가난 때문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렇듯 준이네도 어려운 생활은 한다. 엄마는 삯바느질을 하고 형은 공장에서 일한다. 먹고 살기도 늘 빠듯하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꼬보다는 훨씬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난하긴 해도 다정한 가족이 있고, 일본 친구건 조선 친구건 친구들이 곁에 있고, 또 준이는 잘 모르긴 해도 현해탄 너머에 있다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뭔가 비밀스런 일을 하는 큰형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이 책에는 하나꼬와 준이 말고도 여러 아이들이 등장한다. 자기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부잣집 딸인 하나꼬 미워하는 에이코도 나오고, 조금 모자라는 머리에 어려운 형편 때문에 늘 구박덩이로 지내는 분이도 나온다.
하지만 아이들은 일본 아이건 조선 아이건 상관없이 어울려 지낸다. 전쟁도 아이들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한다. 물론 가끔은 일본 아이들이
조선 사람 가엾다
어째서냐 말하면
어젯밤의 지진에
집이 모두 납작꽁
모두 모두 납작꽁
노래를 부르며 조선 아이들을 놀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아이들도 맞서 노래를 부른다.
일본 사람 가엾다
어째서냐 말하면
어젯밤의 공습에
집이 모두 납작꽁
모두 모두 납작꽁
가끔 현실이 아이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지만 아이들 세계에서는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기꺼이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놀이로 즐기며 이겨내는 지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아이들의 놀이도 끝이 난다. 혼마찌는 공습을 당해 사라지고, 폐허가 된 그곳에서 다시 아이들은 살아간다. 이젠 하나꼬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처지가 됐다. 아빠는 경찰에 잡혀가고 엄마는 사라졌다. 하나꼬는 준이네 얹혀살게 됐다.
이들은 폐허 속에서 <이리와 아기 양들> 연극놀이를 한다. 아이들은 나쁜 이리가 죽는 장면에서 진짜처럼 기뻐한다. 준이는 빼앗긴 나라 조선을 생각하며 나쁜 이리 배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양들 같다고 여긴다. 엄마 양이 구해 줄 거란 희망도 가져본다. 문제는 그 엄마 양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아이들은 전쟁 속에서 너무 일찍 커버렸다. 전쟁 가운데 일본 한복판에서 일본 아이와 조선 아이들이 함께 살아가지만 다들 너무 힘든 처지라 민족적 갈등 같은 건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더욱 절실한 건 하루하루의 삶인 것이다.
이 책은 권정생 선생님이 열 살때까지 살았던 도쿄 시부야를 배경으로 쓴 책이라고 한다. 아마 많은 부분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하나꼬나 준이 분이는 실제 함께 뛰놀던 친구들 이름이라고 한다.
이 책은 신작은 아니다. 30년 전 권정생 선생님이 처음으로 썼던 장편으로 1980년대 중반 <꽃님이와 아기 양들>(새벗문고)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고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코의 이름이 꽃님이로 바뀌고 애초의 주제 의식과는 조금 동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번에 우리교육 청소년문학선으로 다시 펴내게 되었다.
책의 끝부분, 아이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 이야기들이 마음에 계속 남는다.
"어른들은 모두 나뻐."
준이가 흐드득 울먹이듯 말했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없으면 우린 살아갈 수 없잖어?"
하나꼬도 아주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쟁을 일으키고, 집을 부숴 버리고 서로 죽이려고 대어드는 어른들, 그러나 그 어른들이 있어야만 아이들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바르게 착하게 자라라고 가르치면서, 어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비뚤어진 짓을 하고 있다.(242쪽)
남을 때려눕히고 나 혼자만 잘 살자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마음과는 다르다. 아이들은 칼을 들지 않고도, 총을 겨누지 않고도,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고도, 조용히 그러나 가장 아프게, 쓰라리게, 기도로써 눈물겹게 싸운다.
준이의 눈에도 싸움터로 간 걸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히로시 형도 보였다.
'언니도 비 맞고 싸우고 있을까?
무엇 때문에 위험한 그 싸움터로 가게 된 것인지, 그것도 모른채 걸이는 일본을 위한다는 이름 아래 떠나간 것이다. 히로시 형도 어쩌면, 커다란 이리의 배 속에서 아우성치며 살려 달라고 목메이게 부르짖고 있을지 모른다. 온 세상이 이리의 배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엄마 양이 오기 전에 이리의 배 속에서 새끼 양들이 서로 자기들의 힘으로 배를 가르려고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다. 아, 엄마 양이 어서 와야 한다.(243-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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