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야 듣게 된 삼백이의 특별한 이야기
《삼백이의 칠일장 1, 2》(천효정 글/최미란 그림/문학동네/2014년)
'아라비안나이트'로 더 유명한 『천일야화』에서 세헤라자데는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덕에 목숨을 구한다. 이야기의 힘 덕분이다.
왕은 왕비의 간음을 목격한 뒤 심한 배신감으로 날마다 새로운 처녀와 동침하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대신의 딸인 세헤라자데가 왕의 침실에 들어간다. 세헤라자데는 왕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달라 부탁을 하고,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에 빠진 왕은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됐다. 그렇게 천일 밤이 지난 뒤 왕은 마음이 완전히 누그러졌고, 결국 세헤라자데를 왕비로 맞아들여 훌륭한 왕이 된다.
이 책의 주인공 삼백이는 세헤라자데와는 반대다. 세헤라자데는 이야기로 목숨을 구했지만, 이 책에서는 삼백이가 죽고 난 뒤에야 본격 이야기판이 벌어진다. 살아생전 삼백이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는 동물 귀신 여섯 마리가 칠일장을 치러 주며 하루에 하나씩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삼백이가 삼백년이나 살게 된 까닭
저승사자가 저승명부를 가지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에서는 저승사자에게 잘 보여 명부의 수명을 고치기도 하고, 저승사자가 실수로 엉뚱한 사람을 데려 가기도 한다. 동방삭이 삼천갑자를 살 수 있었던 것도 그 까닭이다.
그런데 삼백이가 삼백년이나 살다 죽은 사연은 기가 막히다. 이름도 없이 떠돌며 살았기에 저승사자가 잡아가려야 명부에 이름이 없어서 잡아가질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독사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도 저승사자는 그냥 돌아가야 했다. 아이도 그 사연을 알게 된다. 저승사자를 세 번 피하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한 번을 피한 것이다. 두 번째 저승사자가 왔을 땐 자꾸 이름을 가르쳐 달라 떼를 쓰는 게 귀찮아 ‘누렁이’라 대답을 하는 바람에 아이 대신 소 누렁이가 죽고 만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기 직전 한 번 만나고 그만일 저승사자를 두 번이나 만났으니 아이는 그만 겁이 나기 시작한다. 저승사자 병이 생겨 가슴을 졸이며 하루하루를 사는 거다. 괜히 평범한 사람을 저승사자로 오해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름 없이 삼백 년이나 살던 아이가 이백 년이나 살아서 이름도 이백이라는 사람과 누가 더 오래 살았는지 시비를 벌인다. 결국 자기는 삼백 년이나 살아서 이름도 삼백이라 소리치고 만다. 아뿔사! 이백 년이나 살았다는 사람은 알고 보니 저승사자였고, 자기가 삼백이라 내뱉은 아이는 꼼짝없이 저승사자에게 끌려간다. 마치 동방삭이 숯을 씻는 강림도령을 보며 자신이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말을 내뱉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평생을 저승사자를 피해 다녔던 삼백이지만 막상 저승에 갈 때는 아주 홀가분한 기분으로 간다. 그동안 자신이 억울해서 저승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동물 귀신 여섯 마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가족도 동무도 없던 삼백이가 죽자 구렁이, 개, 소, 까치, 호랑이, 말 이렇게 동물 귀신 여섯 마리가 삼백이의 상주로 나서서 칠일장을 치러준다. 저마다 살아생전 삼백이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동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기가 막히다. 동물 귀신들은 능청스럽게 자신이 삼백이에게 어떻게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이야기하는데, 이야기만 듣다 보면 삼백이와의 인연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하다. 동물 귀신들과 삼백이와의 인연은 그야말로 지나가다 옷깃이 살짝 스치는 정도일 뿐이다. 삼백이도 모르고 있는 삼백이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 작은 인연을 기억하고 장례를 치러주는 동물 귀신들이라니! 사람도 못할 일을 해내는 동물 귀신들의 모습만으로도 찡한 감동이 온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여섯 동물 귀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 말로 매력 만점이다. 옛이야기 새로쓰기 형식으로 쓴 이야기는 옛이야기가 갖고 있는 온갖 요소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흥미진진한 사건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능청스런 문장에서는이야기꾼의 면모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그렇다고 깔깔대며 한바탕 웃게 만드는 재미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녹아 있다. 옛이야기가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무의식의 심상이 반영되듯이,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이 주는 삶의 교훈은 이야기 속에 숨어있다.
구렁이는, 달걀반찬만 먹던 딸이 구렁이알을 달걀로 알고 꿀꺽 삼킨 뒤 심한 입내로 고생을 하다가 거지가 알려준 대로 지리산 웃지 않는 산신령이 가꾸는 약초밭에서 쓴풀을 먹고 속에 든 걸 몽땅 토해내고서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 큰 줄거리에는 빠져 있지만, 달걀을 그저 맛난 먹을 것으로만 알던 딸이 달걀이란 하나의 생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개는, 임금님이 왕자 공주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예뻐하던 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개가 병이 나서 자리에 눕자 의원, 조련사, 학자가 개의 병을 고치려고 애를 쓰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데, 정작 그 개의 병을 고치는 건 꼬마시동이다. 이 꼬마시동이 개의 병을 고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개가 개답게 지낼 수 있게 해 주는 것!
두 이야기 모두 교훈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구렁이 이야기를 보고 편식이 심한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라 여길 일도 없고, 개의 이야기를 듣고 개를 키우는 아이들이 꺼려할 일도 없다. 다른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보고 보고 또 보고 싶어지는 삼백이의 매력
다시 삼백이로 돌아와 보자.
집도 절도 없이, 이름도 없이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던 아이라면 사회 가장 밑바닥 인생이었음이 분명하다. 죽어도 기억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삼백이를 기억해 주는 동물 귀신들의 이야기는 더욱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런데 동물 귀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삼백이 모습이 참으로 인간적이다. 동물 귀신들이 나서서 장례를 치러줄 정도면 착하디 착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말끔히 깨어준다. 개장수였을 때는 한 냥 주고 산 개를 다섯 냥을 받고 팔기도 하고, 뱃사공이었을 땐 배가 흠집이 났는데도 너무 게으른 나머지 하루이틀 미루다가 그만 배가 홀랑 뒤집히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삼백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행동이 구렁이알을 삼킨 처녀의 입내를 고치기도 하고, 무슨 일이든 절대 안 지려는 안져할멈의 성질을 얌전하게 만들기도 하고, 담배 피고 사람들이 주는 고기만 먹느라 호랑이의 모습을 잃어버린 호랑이 왕을 다시 왕답게 만들기도 한다. 삼백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던 사소한 말과 행동들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읽는 내내 깔깔대고 웃으며 봤는데, 문득 내 말과 행동을 다시 살피게 된다. 자꾸 자꾸 다시 읽게 만든다. 한 번 읽을 때 안 보이던 삶의 모습이 두 번째 읽을 때 다시 보이고, 세 번째 보니 또 다른 삶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깔깔 웃으며 재미있게 보게 되는 건 똑같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매력을 지닌 책이다.
* 《어린이문학》 201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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