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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책/옛날이야기 공부방

이게 정말 우리 옛이야기일까? <1>

by 오른발왼발 2018.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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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말 우리 옛이야기일까?

- 의좋은 형제-

 

 

 

언제부턴가 ‘이게 정말 우리 옛이야기일까?’라는 의문이 드는 옛이야기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옛이야기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증거를 하나씩 찾을 때면 당혹스럽기만 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비슷비슷하게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는 것이기에, 우리 옛이야기로 받아들이려 애를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민을 하면 할수록 우리 옛이야기가 아닌 걸 우리 옛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옛이야기 가운데는 우연히 외국에서 들어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전해지면서 우리 옛이야기화 된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라면 우리 옛이야기라고 해도 반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가 아니라 출판물을 통해서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된 것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아이들은 우리 옛이야기든 아니든 그런 건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여요. 그런데 굳이 그걸 따질 필요가 있을까요?”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아이들은 그런 구분 같은 건 안 한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재밌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면 문제가 될 게 없다.
  하지만 옛이야기란 본래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나누는 이야기였던 것이 현대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들, 그것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들이나 보는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구나 현대는 이야기문화는 사라진 채 어른들이 쓴 출판물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잘못 알고 전하는 옛이야기라 해도 그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 옛이야기 아닌 이야기를 우리 옛이야기라고 믿고 말이다.
  이런 고민이 시작된 지는 꽤 오래됐다. 정리할 엄두가 나질 않아서 미루고 또 미뤄뒀다. 하지만 얼마 전 옛이야기 그림책 원고를 쓰면서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내가 쓴 이야기가 바로, 내가 우리 옛이야기라고 믿지 않는 <의좋은 형제>였기 때문이다. 원고를 쓸 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지만 나는 굳이 이 이야기를 골랐다. 기왕 원고를 쓰면서 자료를 찾는 김에 시시비비를 가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의좋은 형제>를 시작으로 의심스런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보려한다.

 

# 의좋은 형제

 

  1. 방정환의 ‘의좋은 형제’

 

  농사가 그리 잘 되지는 못했으나, 가을이 되어 만곡이 익으매 그래도 농가에서들은 기쁜 마음으로 벼를 베느라고 바빴습니다.
  성칠이도 동네 사람들의 조력을 얻어 가지고 자기 논의 벼를 베어서, 논두덕에 널어 두었습니다. 며칠간 햇볕에 말려서 거둬들일 작정이었습니다.
  “나는 딸리는 식구가 없으니까 염려 없지마는, 형님은 식구가 많아서, 금년같이 풍년들지 못한 해에는 지내시기가 곤란하실 터인데…….”
  하루는 이런 생각이 나서,
  “오냐, 그냥 갖다 드리면 받지 않으실 것이니까, 밤중에 넌지시 내 논의 벼를 옮겨다가, 형님 논두렁에 더 놓아 드려야겠다.”
하고, 그날 밤에 형님도 동리 사람도 다 잠들기를 기다려서 넌지시 지게를 지고 나가서 자기 논두렁의 벼를 여러 차례 옮겨다가 형님네 논두렁에 보태놓고 두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입니다. 이튿날 나가 본즉, 훨씬 적어졌을 자기 논두렁의 벼는 조금도 적어지지 않고, 전에 있던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 내가 분명히 어젯밤에 형님 논으로 여러 짐을 져다 두었는데, 이것이 웬일일까?”
  하고, 형님 논으로 가 보니까, 거기도 전보다 별로 많아져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꿈을 꾼 것인가?”
  하고, 그 날 온종일 이상히 여기다가 그 날 밤에 또 동리 사람이 잠들기를 기다려서, 넌지시 나가 자기 논의 벼를 여러 짐 져다가 형님의 논에 널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나가 보니 참 이상합니다. 그래도 자기 논에는 벼가 줄지 아니하였고, 형님 논에 늘지도 않았습니다.
  “이건 참 귀신의 장난 같구나! 대체 어찌된 까닭을 모르겠다.”
하고, 또 그 날 밤이 되기를 기다려서, 자기 논의 벼를 거둬서 짊어지고 형님 논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 날은 날이 흐리어 별 하나도 없어서 몹시 캄캄하므로, 구렁에 빠지지 않으려고 길바닥만 보면서 가는데, 저편에서 무언지 시꺼먼 것이 이쪽으로 마주 오므로 깜짝 놀라서 발을 멈추고 우뚝 섰습니다.
  “그거 누구요?”
  “그거 누구요?”
  둘이 맞닥뜨리자 양쪽에서 똑같이 이렇게 묻고 보니까, 저편에서 오는 것은 형님이었습니다.
  형님 역시 동생 생각을 하고, 밤에 넌지시 나와서, 자기 논의 벼를 여러 짐 져다가 동생의 논에 놓아 주었더니 이튿날 보니까 자기 벼가 적어지지도 않고, 동생의 벼가 늘지도 않았으므로, 이상히 여겨 밤마다 넌지시 옮기다가 이날은 공교롭게 둘이 맞닥뜨린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형제는 서로 저편의 뜻을 감사히 받기 위하여 날마다 옮겨 나르던 벼를 서로 교환하여 먹었습니다.
-  《어린이》 7권 8호, 1929년 가을 특집호

 

  이 이야기는 현존하는 ‘의좋은 형제’ 가운데 가장 먼저 발표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1934년 《조선어독본》에 실린 뒤, 해방 이후까지 교과서에 반복해서 실리면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이런 사정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교과서에서도 형제의 우애를 강조하며 <의좋은 형제>를 싣고 있다. 그러니 <의좋은 형제>는 남북한 모두에게 친근한, 우리의 대표 옛이야기가 된 셈이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일본 교과서에도 <줄지 않는 볏단>이란 제목으로 ‘조선’의 대표 옛이야기로 실리기도 했다. 

 

 

 

  또한 농촌 들녘을 배경으로 한 형제간의 우애 넘치는 이 이야기는 ‘농심라면’의 상징으로 상품화되기도 했다. 1975년 롯데공업에서 나온 농심라면의 포장지는 우리가 <의좋은 형제>하면 떠올리는, 볏단을 지고 가다 달빛 아래에서 서로 만나는 바로 그 장면을 넣었다. 씨엠쏭 역시 <의좋은 형제>의 모티브를 따서 만들었다.

 

  “형님 먼저 드시오 농심라면,
   아우 먼저 들게나 농심라면”

 

  하는 씨엠쏭은 지금까지도 사람들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농심라면의 성공으로 롯데공업은 당시 삼양라면이 독점하고 있던 라면산업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3년 뒤에는 사명을 아예 ‘농심’으로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의좋은 형제>가 진짜 우리 이야기일까 하는 의심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다. 바로 《탈무드》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999년 방정환 100주년을 맞아 《어린이》 잡지를 보다가 <금도끼 은도끼>가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이솝 우화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만큼이나 충격이 컸다. 가만 생각해보면 《어린이》에는 <금도끼 은도끼>나 <의좋은 형제>뿐 아니라 많은 외국 이야기가 번안되어 실려 있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당시 《어린이》는 엄청난 부수가 발행되는 인기 잡지였다. 그만큼 파급력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더욱 널리 퍼졌던 건 이 이야기가 《조선어독본》에 실리고, 해방된 이후에는 교과서에 단골손님처럼 실리면서다. 아마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어독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나와 있던 여러 자료를 취합할 때 《어린이》에 실린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임석재의 《한국구전설화 1~12》나 《구비문학계》에서는 비슷한 제목의 이야기는 있어도 비슷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오로지 《탈무드》와 《조선어독본》 속의 <의좋은 형제> 뿐이다.

 

   2. 《탈무드》의 ‘의좋은 형제’

 

 옛날 이스라엘 어느 마을에 형제가 이웃에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하늘나라로 훌쩍 떠나서 형과 동생은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열심히 살았답니다.
  결혼을 한 형은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고, 동생은 아직 총각으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의좋은 형제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에서 함께 농사를 지었습니다.
  봄과 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을 모아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 뜨겁던 여름 햇살도 점점 식어 갔습니다. 산과 들에는 어느새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아침과 저녁에는 제법 서늘했습니다.
  “아우야, 저 들판에 누렇게 익은 밀을 봐라. 잘 익었구나. 참 수고가 많았다.”
  “수고가 많았다니요? 수고야 형님이 더 많았죠.”
  다음 날, 형제는 누런 밀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벌판으로 나가 추수를 시작했습니다.
  밀을 다 거둬들인 형제는 밀을 똑같이 나누어서 창고에 쌓았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형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앉았습니다.
  ‘아무래도 거둔 밀을 아우와 똑같이 나눠 가진 게 마음에 걸려. 그래, 내가 잘못한 거야. 아우는 앞으로 결혼해서 새살림을 차려야 하잖아. 그러자면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들어갈 테구…….’
  이렇게 생각한 형은 아내와 아이들이 깨지 않게 슬며시 밖으로 나와 자기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밀을 커다란 주머니에 담아서 어깨에 둘러메고 동생의 창고로 갔습니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음, 이만하면 아우가 새살림을 차릴 때 도움이 될 거야.’
  형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형은 곤히 잠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는,
  ‘아이 기분 좋다.’
  라고 하고는 편안하게 잠이 들었답니다.
  동생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이 모자랐던 거야. 추수한 밀을 형님과 똑같이 나눈 건 내가 정말 잘못한 거야. 난 혼자구, 형님은 형수님과 아이들이 있으니까 돈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하실 거야…….’
  이렇게 생각한 동생은 밖으로 나와 자기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밀을 커다란 주머니에 담아서 어깨에 둘러메고 형의 창고로 갔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음, 이만하면 형님 살림에 보탬이 될 거야.’
  동생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잠자리에 든 동생은,
  “아이, 기분 좋다.”
  하고는 편안하게 잠이 들었답니다.
  아침이 되자 형과 동생은 각각 자기 창고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형과 동생의 창고에는 밀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였던 거예요.
  “거참 이상하다. 어젯밤에 많은 밀을 아우 창고에 갖다 쌓았는데…….”
  바로 그때 동생도,
  “어라? 어젯밤에 밀을 형님 창고에 갖다 쌓았는데…….”
  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동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답니다.
  그날 밤, 형제는 다시 어제와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거참 이상하다…….”
  형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어라…….”
  동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창고에 가 보니, 밀이 줄어들지 않고 또 그대로였던 거예요.
  그날 밤, 형제는 또다시 똑같은 일을 하려고 각자의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형은 동생 창고로, 동생은 형 창고로 갔습니다.
  밤길을 얼마쯤 갔을까요?
  “거참, 이런 밤중에 누굴까?”
  “어라, 이런 밤중에 어딜 가는 걸까? 아니,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걸까?”
  형과 동생은 서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구름에 갇혀 있던 보름달이 고개를 쑥 내밀고 나와 길을 환히 비춰주었습니다.
  “아 아우야!”
  “혀 형님!”
  “아우야, 이제야 알겠다. 내 창고에 밀이 왜 줄어들지 않았는지 말이다.”
  “저두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어요.”
  형과 동생은 어깨에 멨던 밀 주머니를 내려놓고 서로를 얼싸안았습니다.
                           - 《초등학생을 위한 탈무드 111가지》(세상모든책) 중


 

 3. 《조선어독본》 ‘의좋은 형제’

 

 

 

 예전 어느 곳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동안에는, 힘을 같이 하여 지성껏 효도로 섬겼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집 재산을 분배하였는데, 누가 더 하고 덜함이 없이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이듬해에 두 형제는 이른 봄부터 아침 일찍이 들에 나가서 밤늦도록 부지런히 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해 가을에는 벼를 많이 추수하였습니다. 형과 아우는 누구의 소출이 많은가를 비교하여 보았더니, 이상하게도 두 형제의 소출이 똑같았습니다. 형은 생각하기를,
  ‘아우는 신접살림이니까 볏섬이나 더 있어야 되겠지.’
  하고 밤중에 가만히 자기의 벼 한 섬을 져다가 아우의 볏섬에 쌓아놓고 왔습니다. 아우는 그런 줄도 몰랐으나 우애가 깊은 그도 역시 형과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형님은 식구도 많으니까 나보다는 양식이 더 많이 들 것이다. 그래, 형님에게 더 갖다 드리자.’
  그래서 아우 역시 형이 모르도록 밤중에 볏섬을 갖다 두었습니다.
  이튿날 두 형제가 일어나 본즉, 볏섬은 줄지도 않고 전날과 똑같으므로 매우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날 밤에도 또 갖다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에 본즉 볏섬은 역시 줄지 않았습니다. 두 형제는 ‘이것이 웬 곡절인가’ 하고, 그날 밤에는 조금 일찍이 이 볏섬을 짊어지고 나섰습니다. 그랬더니 중로에서 볏섬을 진 형제가 서로 마주쳤습니다. 두 형제는 깜짝 놀라며 한참동안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바라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 형님이었습니다 그려. 벼를 갖다 주신 이가.”
  아우가 눈물을 머금고 먼저 말하였습니다.
  “응, 너였구나. 벼를 갖다 준 사람이.”
  하며 형도 역시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였습니다. 두 형제는 부지중 서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맑고 밝은 달이 의좋은 이 두 형제를 아름답게 비추었습니다.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5》(소화 9년) 1934년

 

  《어린이》에 <의좋은 형제>가 실린 것이 1929년이고, 《조선어독본》에 실린 것이 1934년의 일이니 그 사이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퍼졌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이렇게 <의좋은 형제>가 우리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결심을 굳힐 때쯤이었다. 이 이야기의 고향을 내세워 해마다 축제를 여는 곳을 발견했다. 충남 예산군이었다.

 

  4. 충남 예산군의 <의좋은 형제>

 

 

 

 

충남 예산에서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여말선초 시기에 이곳에 살았던 실존 인물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 증거가 조선왕조실록에도 있고, 연산군 대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효제비가 세워졌다고 했다.
  실제로 예산군에서는 1978년에 말로만 전해지던 효제비가 발견되면서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이야기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예산에서는 7차 교육과정에서 빠진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교과서에 재수록 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졌다고 했다.  
  예산군에서는 <의좋은 형제>를 예산군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2002년 ‘의좋은 형제상’을 건립한 데 이어 2004년엔 ‘의좋은 형제 테마공원’을 조성했고, 2008년부터는 <의좋은 형제>를 바탕으로 옛이야기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쯤 되니 정말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탈무드》 이야기 그대로인데……, 혹시 진짜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도 전해지고 있었던 걸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건가 싶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남아 있고, 효제비의 내용도 같은 내용이라니 일단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찾아보기로 했다.

 

  5. 《조선왕조실록》 기록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중외에 교서를 내리어, 효자·절부(節婦)·의부(義夫)·순손(順孫)이 있는 곳을 찾아 실적(實迹)으로 아뢰라고 했더니, 무릇 수백인이 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그 중에 특행(特行)이 있는 자를 추리라."
하고, 정초를 명하여 예조에 올린 행장 기록을 가지고 좌·우 의정과 의논한 결과 무릇 41인이었다.
대흥 호장(大興戶長) 이성만(李成萬)은 그 아우 순(順)과 더불어 부모를 잘 섬겨 마음을 다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매양 봄 가을에는 주식(酒食)을 갖추어 부모의 사랑하는 친구를 맞아서 연락(宴樂)하므로써 그 마음을 즐겁게 하고, 죽은 후에는, 형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고, 아우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며, 매양 아침 저녁에 형제가 서로 가고 오고 하여 한 상에서 같이 먹고, 비록 한 개의 음식을 얻어도 반드시 함께 먹었다.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월 21일 경신 3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을 아무리 뒤져도 이성만 이순 형제에 관한 글은 이것뿐이었다. 효제비의 내용도 같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형제간의 우애보다는 효에 초점이 맞춰진 내용이었다. 굳이 비슷한 점을 찾아보자면 ‘매양 아침저녁에 형제가 서로 오고가고 하여’라는 부분과 ‘의좋은 형제’ 이야기에서 서로 볏단을 지고 오고가고 했던 부분 이 겹친다는 것 정도랄까?
  나름 긴장을 하고 찾아본 것치고는 허탈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이들 인물에 대해서 찾아봤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형 이성만은 대흥 호장이었다. 대흥은 형제의 효제비가 있는 곳이고, 호장은 향리직의 우두머리로 대체로 그 직이 세습된다고 한다. 조선에 들어서면서는 힘이 약해졌지만, 고려시대까지는 지방의 토호로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직책이라고 한다.
  이성만 이순형제의 구체적인 생몰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인물이라는 점과 호장이 세습직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아무래도 이들 형제가 <의좋은 형제>의 주인공일 가능성은 없었다. 우선 호장 출신인 이성만 이순 형제가 직접 농사를 지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의좋은 형제>의 형제들처럼 서로의 살림을 걱정해줄 수준도 아닌 게 분명했다. ‘봄 가을에는 주식(酒食)을 갖추어 부모의 사랑하는 친구를 맞아서 연락(宴樂)하므로써 그 마음을 즐겁게 하고, 죽은 후에는, 형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고, 아우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는 일은 경제력이 탄탄한 가문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효이기 때문이다.   

 

  이리 저리 다시 고민해 봤지만 결론은 같았다.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이야기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야기자체가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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