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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우리창작

<토째비 주례 좀 서 줘>, <친구 도서관>

by 오른발왼발 2019.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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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아이들 일상으로 들어오다


《토째비 주례 좀 서 줘》
(김하늬 글/이광익 그림/국민서관/2008년)
《친구 도서관》(김하늬 글/이형진 그림/한겨레아이들/2008년/절판)  

 

 

김하늬. 그 이름이 어느 날 내 머리 속에 들어왔다.
뭔가 볼만한 책들이 없을까 뒤적거리며 근래에 나온 창작을 열댓 권쯤 쌓아놓고 보고 있을 때였다. 묘한 매력이 있는 책 두 권을 발견했다. 두 권 모두 김하늬의 작품이었다. 다소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이 두 권을 읽는 것으로 앞으로 관심을 갖고 계속 지켜보고 싶은 친숙한 작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옛이야기가 아이들의 일상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 사실 동화의 근간으로 옛날이야기가 주목받으면서 많은 작가들이 옛날이야기 공부를 하고, 옛날이야기를 동화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아쉬운 점이 많았다. 대개는 옛날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해 쓰거나, 이야기 속에 옛날이야기의 한 토막을 집어넣거나, 아예 시대 배경 자체를 옛날로 가져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옛날이야기는 아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겉돌거나 그저 또 다른 옛날이야기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달랐다. 옛날이야기가 아이들의 일상과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만족스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하나로 연결은 되어 있지만 조금은 적절치 못한 배합인 듯 또 조금은 도식적인 듯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눈에 띠었다. 하지만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싶었다. 기존의 작품과 다른 면이 분명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일이와 수일이도 아이의 일상 속에 옛날이야기가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좀 달랐다. 옛날이야기가 동화 속에 들어온 건 순전히 주인공 수일이가 또 다른 나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쥐가 손톱을 먹고 사람으로 변신을 하는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시작한다. 즉 옛날이야기는 주인공의 호명되고 나서야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옛날이야기는 주인공의 호명 없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수일이와 수일이보다는 한 보 전진한 것이 아닐까? 작가의 앞으로가 기대되는 건 이 때문이었다.

먼저 본 책은 토째비 주례 좀 서 줘였다. 토째비는 도깨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느닷없이 주인공 곤이 앞에 나타난 도깨비는 어찌 보면 옛날이야기 속 도깨비 모습 그대로다. 옛날이야기에서 무턱대고 씨름을 하자고, 돈을 빌려달라고 하듯이 도깨비는 곤이를 데리고 와서는 주례를 서 달라고 부탁을 한다.
도깨비가 결혼을 하는데 사람의 주례가 필요하다? 조금 황당한 듯 싶긴 해도 호기심이 생긴다. 그런데 그 사정이 딱하다. 옛날엔 많고 많았던 도깨비가 점점 사라져 도깨비 왕국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방법은 하나, 결혼을 해서 아기 도깨비들을 낳는 것이다. 도깨비의 결혼이라니? 다소 생뚱맞아 보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마치 허를 찔린 듯 당황스러우면서도 유쾌하다. 도깨비들을 되살리고 싶은 작가의 생각이 빤히 드러나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 주례를 서 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도깨비 모습이 절박함과 동시에 웃음을 함께 준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도깨비들은 그들의 결혼식에서 왜 꼭 사람의 주례가 필요했을까? 비록 셋 밖에 남지 않았다지만 나름대로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만약 그 방법만 찾았다면 지금처럼 도깨비 왕국이 사라질 정도로 그 수가 줄어들지도 않았을 거고, 주례를 맡아줄 사람을 찾느라 일어나는 소동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역시 주례는 사람이 서 주는 것이 맞다. 도깨비들이 줄어든 것은 전적으로 사람들 탓이다. 도깨비란 사람들의 믿음과 기억 속에서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도깨비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도 실은 사람들이 도깨비란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깨비들이 다시 번성하기 위해선 사람들이 매개가 될 수밖에 없다.
주례를 서 줄 사람으로 기껏 데려온 게 어린 곤이였고, 주례가 뭔지도 모르는 곤이에게 주례를 배울 시간까지 줘가면서 집착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벌어진 소동은 이 책을 살아나게 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도깨비만 보면 까무러치는 사람들만 만났기에 이렇게 어린 아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는 절박한 도깨비들의 사정도 함께 전해준다.
곤이가 실은 쌍둥이어서 나중에 엉뚱하게도 동생이 주례를 서게 되는 해프닝이 일어나고, 엄마 아빠도 실은 지금껏 결혼을 못 한 사정이 드러나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다 도깨비의 부활이라는 주제의 연장선에서 읽힌다. , 이 작품은 아이들의 일상에서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깨비의 부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아이의 일상이 중심에 올 수는 없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친구 도서관은 또 좀 달랐다. 친구 사귀기라는 아이들 일상의 고민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옛날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친구 도서관에는 옛날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 여우가 등장한다. 옛날이야기 속 여우는 악역이다. 겉으로는 달콤한 매력을 주지만 결국 그 본질을 드러내고 주인공을 파멸에 몰아넣는다. 아이들이 가장 숨죽이며 듣는 이야기 여우누이에서도 그랬고, 여우가 입에 넣어주는 구슬의 매력에 시름시름 앓게 됐던 아이가 나오는 여우구슬에서도 그랬다. 여우는 겉모습과 속모습이 다르다.
그렇담 이 책에서 파멸에 빠지는 인물은 누구일까? 그 답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이미 제목에서 많은 걸 말해주기 때문에다. 친구 도서관. 친구 도서관이란 말이 좀 낯설긴 하지만 어떤 곳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서 읽듯이 친구를 고를 수 있는 곳이다. 친구 때문에 한 번 쯤 고민을 해 본 아이들이라면 귀가 솔깃해질 만큼 달콤하다. 이 책에서 여우는 친구도서관의 관장이다. 물론 아이들은 관장이 여우라는 걸 모른다. 친구도서관이 있는 장소가 여우내라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친구에 대한 절박한 마음이 앞선 아이들은 친구도서관을 여우내라는 이름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목록 카드를 뒤적인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난 아이는 만난 아이대로, 마음에 드는 친구를 못 만난 아이는 친구랑은 상관없이 이곳이 주는 매력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이곳을 들락거린다. 결국 친구도서관을 드나드는 아이들 눈빛은 점점 멍해지고, 수많은 아이들을 만날수록 마음은 더 휑해진다.
주인공 진규가 본격적으로 사건에 휘말리는 건 이때쯤이다. 어느 날 감쪽같이 이곳에서 친구가 사라졌다며 친구도서관 곳곳을 살피는 한 아이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것들을 하나 하나 알게 된다. 사라진 친구의 목록 카드가 사라졌다는 점, 그 친구의 핀을 관장 할머니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 할머니가 쉬지도 않고 짜고 있는 것이 친구도서관을 덮을 망토이고 올해 안에 이 망토를 다 짜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친구도서관이 있는 여우내역이 올해가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결국 할머니 망토에 불이 붙으면서 친구도서관도 불에 타 사라지면서 관장 할머니가 여우였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친구도서관이 사라지고 나서야 아이들은 깨닫는다. 이렇게 친구를 사귀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 책은 친구도서관을 통해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비밀스럽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성으로 흡입력 있게 독자를 끌어들이는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치가 않다. 우선은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자연스럽게 친구도서관에 드나들던  아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책을 내려놓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다.
친구도서관이 판타지 공간이면서도 현실 공간에 있다는 사실도 걸린다. 친구도서관에 대해서 어른들에게 비밀이라지만 여우내골은 다른 곳에 가듯이 역에 가서 표를 끊고 기차를 타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구조다. 친구도서관이 불타 버리곤 난 뒤 어른들이 와서 보고 놀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판타지지만 섬뜩한 느낌이 든다. 물론 현실에서도 이처럼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해 놓고 아이들을 꾀이는 일이 많다. 이런 점에서 현실의 모습을 하나의 상징으로 보여준 거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이 달콤한 꾐에 빠져 그동안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모습이 마치 안이한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려 들면 안 된다며 아이들을 질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음이 착잡해진다.
김하늬의 작품 두 권을 읽으며 참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반가움과 희망이 앞서면서 한편으론 아쉬움이 함께 했다. 하지만 적어도 옛이야기가 요즘 아이들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접점을 이룰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 이 글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분기별로 펴내는 어린이문학2009년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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