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우리의 자화상
《나는 시궁쥐였어요》
(필립 풀먼 글/피터 베일리 그림/이지원 옮김/논장/2008년)
어느 날 한 아이가 나타났다. 그 아이는 자기 이름도 모른다. 심부름하는 하인의 옷을 입고 있지만 자기가 무얼 하다가 오게 됐는지도 모른다. 아는 것은 오로지 자기가 ‘시궁쥐’였다는 사실뿐이다. 아이는 자기가 시궁쥐였을 때의 기억은 확실하다. 하는 짓도 쥐의 습성이 뚜렷하다.
자, 이런 아이가 나타났을 때 우린 과연 어떻게 대할까? 겉모습만 사람일뿐 스스로도 쥐라고 하고 쥐가 하는 짓을 그대로 하니 그 아이 말대로 쥐가 둔갑한 걸로 봐야 할까, 아님 지금 아이 그대로의 모습만 보고 아이가 쥐의 습성을 버리고 제대로 교육을 받도록 해 줘야 하는 걸까?
이 책은 어느 날 갑자기 시궁쥐에서 사람이 된 한 아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편견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사회의 부조리는 결국 우리 인간의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제가 무겁다고 해서 이야기마저 무겁지는 않다. 아니, 무겁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빠른 전개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구성은 이 책을 아주 가볍게 읽게 한다. 이것이 혹시 패러디의 힘일까?
그렇다. 이 책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신데렐라’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신데렐라’하면 누구나 왕자와 결혼으로 행복한 결말을 내리는 신데렐라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신데렐라가 아니다. 주인공은 신데렐라가 마법의 힘으로 무도회장에 갈 때 시종으로 변했던 시궁쥐다. 주인공은커녕 주요 등장인물과도 거리가 멀다. 스쳐 지나가듯 나오긴 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단역 배우 같은 존재다. 더구나 시궁쥐라니! 지저분하고 징그럽다고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존재다. 그러니 시궁쥐였던 아이가 사람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 뻔하다.
다행히 시궁쥐였던 아이가 처음 만난 건 밥 아저씨와 조앤 아주머니 부부다. 밥 아저씨는 구두 수선공이고, 조앤 아주머니는 세탁부다. 그것도 조상 대대로. 쉽게 말하자면 밥 아저씨와 조앤 아주머니에게 내세울만한 환경은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는 뜻이다. 마치 시궁쥐가 시종이 되어 신데렐라를 무도회장까지 안내했지만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존재감이 없는 것과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두 사람에겐 자식이 없었다.
두 사람에게도 아이는 조금 이상해 보였지만 두 사람은 아이를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지금 현재의 모습이 사람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로저’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아마도 비슷한 공감대가 있고,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 관공서, 철학자, 과학자, 언론, 법관. 이른바 특별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 배웠다 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를 않았다. 로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기가 정해놓은 기준으로 단정 지었다. 로저는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로저는 박람회 전시회에서 쥐소년으로 괴물 노릇도 해야 했고, 도둑질을 하는 아이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시궁쥐’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로저의 불안한 앞날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사람들에게 쥐란 ‘박멸’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로저가 치즈 가판대를 뒤집어엎는 바람에 경찰서에 잡혀 갔을 때 경찰이 한 말은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조용히 해! 쥐라면 인간 사회에는 들어올 수 없어. 쥐는 박멸되어야 해.”
로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왕립 철학자는 로저에 대해 조사를 한다며 궁전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이는 로저가 자신을 보살펴 주던 밥과 조앤 부부와 헤어지고 갖가지 시련을 겪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로저가 궁전에서 도망치며 거리를 헤매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철학자의 조사 결과는 기가 막혔다. 철학자는 로저의 솔직한 대답을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인과 동일시하는 착각으로, 광기과 편집증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로저가 괴물 취급을 받아 재판을 받게 되자 증인으로 나와 이렇게 증언한다. ‘로저는 본질적으로 쥐이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해충이나 기생충과 똑같이 다루어도 된다’고,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철학자의 증언으로 법원은 로저를 ‘사악한 짐승’으로 처형하기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물론 여기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사람이 힘을 보탰다. 박람회 전시회를 하는 탭스크루는 로저를 아예 쥐 모습으로 꾸미고 반은 설치류요 반은 인간인 끔찍한 괴물 소년으로 전시회 볼거리로 만들기도 했었다. 그도 법원에서 증언한다. ‘짐승을 집으로 들일 수는 있으나 그를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라고. ‘아이는 야성을 지닌 사나운 짐승으로 그냥 놔두면 언젠가 당신의 목을 찢어 잘근잘근 씹어 먹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언론이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진실의 회초리 일보’는 결정적인 순간 이야기를 끌어간다. 실제 일어난 일을 그대로 보도하는 듯싶지만 한편으론 모든 사건을 가십거리로 만들고, 판매량을 위해서 기사를 부풀리고 왜곡한다. 그리고 모든 정보를 언론에 의지하는 대중을 기만한다.
로저를 괴물로 알린 것도 회초리 일보다. 하수도에서 지내던 로저가 발견되자 회초리 일보는 ‘반은 인간 모습을 한 괴물’로 표현하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 사악한 괴물을 박멸해야 하는지 여론조사까지 해가며 이슈화시킨다. 덕분에 25만부를 더 파는 성과를 올리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언제 그랬냐는 듯 왕자비와 괴물의 기적을 전하며 ‘많은 사람이 의심했던 대로 괴물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었다’고 전한다. 그 모습이 기가 막힌다. 물론 사람들은 다시 그 말을 믿고 말이다.
한 편의 동화 속에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이렇게 속속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도 힘든 일이다. 더구나 아이들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가볍게 다룬다는 건 더 힘든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건 나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한 아이가 “나는 시궁쥐였어요!”하며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할까? 나 또한 본질적인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고민 꽤나 하게 될 듯싶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34호(2008년 10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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