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린이책 관련/외국 동화

연보랏빛 양산이 날아오를 때

by 오른발왼발 2020. 12. 14.
728x90

 

 

 

나도 함께 날고 싶다!

《연보랏빛 양산이 날아오를 때》

(알키 지 글/정지혜 그림/정혜용 옮김/창비/2008년) 

  



 

 

방바닥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정리를 했다. 기왕 하는 김에 나중에 찾아보기 쉽도록 목록 작성을 하며 나라별 분류도 해 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영어권 책들이 정말 많았다. 일본, 독일, 프랑스 책도 많았다. 그런데 그 외의 나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갑자기 얼마 전 끝난 올림픽 메달 집계가 떠올랐다. 날마다 보여주는 메달 집계 순위에는 늘 보이는 나라만 보였다. 입장식 때 보였던 그 많았던 나라들은 마치 사라진 것처럼. 
얼마 뒤 『창비 어린이 2008 가을호』를 봤다. 마침 특집으로 김경연의 「외국 아동문학 번역의 현주소」가 실려 있었다. 최근 10년간 발행 종수의 추이와 번역 도서 비율을 꼼꼼히 다루고 있었는데, 여기에 실린 수치는 내가 정리한, 우리 방바닥에 쌓여있는 책들과 같았다. 방바닥의 쌓여있는 책들의 모습은 결국 우리 아동문학의 현주소였던 셈이다. 
문득,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책을 찾아 읽고 싶어 졌다. 마침 그리스 작가 알키 지의 작품 두 권이 나왔던 사실이 기억났다. 알키 지는 『니코 오빠의 비밀』(창비)에서 그리스 근대사의 아픔을 신비하고 매혹적으로 풀어냈었다. 새로 나온 두 작품 역시 기대가 됐다. 알키 지의 작품 외에 다른 그리스 작가의 작품도 궁금했지만, 다른 작품들은 찾지 못했다. ‘그리스’하면 뭔가 더 있을 듯싶은데, 『그리스 신화』말고는 그리스 책이 보이지 않았다. 성인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품 말고는 다른 작품을 찾지 못했다. 어쩐지 그리스가 ‘신화’ 속에 갇혀있는 나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알키 지의 작품은 그리스가 그저 신화 속의 나라가 아니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여전히 이 지구 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연보랏빛 양산이 날아오를 때』 역시 마찬가지다. 밝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전면에 그려있지만 그 속에는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아픔이 녹아있다. 
이야기는 오레스트와 필립이라는 두 쌍둥이 아이가 토요일마다 할머니에게 가서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쌍둥이들은 안달이 나서 ‘할머니 남동생들이 어렸을 때 어땠는지’, ‘독일 놈들하고 전쟁이 나기 전 여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그러고 나면 바로 할머니 이야기가 시작된다. 3인칭으로 시작되던 이야기는 할머니 어렸을 적 이야기로 들어가면서 바로 할머니가 화자가 되어 펼쳐진다. 
이야기의 중심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이다. 쌍둥이 손자들의 이야기는 시작하는 첫 장과 마지막 장뿐이다. 세대를 건너 뛴 할머니 이야기는 여덟 살밖에 안 된 손자들에게 옛날이야기처럼 친근하기만 하다. 할머니 남동생들의 놀이는 쌍둥이 형제들에게도 흥미진진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할머니 남동생들 역시 쌍둥이라는 사실은 쌍둥이 손자들을 더욱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이렇게 쌍둥이 손자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놀이와 삶, 그리고 할머니와 쌍둥이 동생들이 살았던 그 시절의 일상에 스며있는 역사에 한 발짝 발을 딛는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1940년대 그리스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역사가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할머니와 쌍둥이 동생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반영되어 있을 뿐이다. 2층에 사는 프랑스인 마르쎌 아저씨는 늘 전쟁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마르쎌 아저씨 조카 브누아는 레지스땅스 활동을 하는 엄마 아빠 때문에 낯선 그리스로 찾아온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전쟁의 위기 때문에 늘 긴장된 생활을 한다. 
사실 1940년대 그리스는 혼란 그 자체였다. 2차 세계대전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리스까지 다가오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그리스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 친구 빅토리아에게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터키인과 맞서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을 거냐고, 그걸 위해 싸울 거냐’고 묻곤 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1453년에 터키에게 정복당한 곳이지만 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 1,100년 이상 그리스어를 사용한, 그리스의 영향력 하에 있던 곳이다. 터키에 대해 400년 이상 계속된 감정이, 파시즘과 팽창주의가 만연하던 그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난다. 여자인 할머니에게는 더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할머니가 책을 읽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절이 어려워도 아이들은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놀이에 빠져든다. 장난꾸러기 쌍둥이 남동생들의 모습은 그 전형이다. 놀이의 절정은 연보랏빛 양산을 기구 삼아 하늘을 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이 연보랏빛 양산은 빅토리아 할머니의 양산으로, 쌍둥이 동생들은 늘 이 연보랏빛 양산을 훔쳐내려 한다. 쌍둥이들은 연보랏빛 양산을 기구 삼아 고양이 미미를 집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 위로 데리고 올라가 양산 꼭지가 아래로 가게 양산을 펼치고 안에다가 미미를 태워 떨어뜨려 보고 싶어 한다. 
마침내 연보랏빛 양산을 훔쳐내지만 계획은 차질이 생긴다. 집주인은 벚나무를 잘라냈고, 고양이 미미는 배가 불러서 조정사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아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상상 속에서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양산 살에 달아 기구를 만들어 바구니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여행을 떠난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볼 수 있다. 비록 상상 속에서의 여행이지만, 아이들은 이 여행을 통해 성장한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다 끝나고 다시 쌍둥이 손자들이 할머니 집에 오는 마지막 장, 쌍둥이들은 등을 맞대고 게임기에 열중이다. 게임기에 빠진 아이들은 할머니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할머니에게 이런 손자들의 모습은 낯설다. 세대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할머니와 손자들 사이는 다시 메워진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할머니 이야기를 또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통해 이어진 이야기가 세대를 껴안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쉬움은 이 책이 그리스어가 아니라 불어판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함께 나온 『용이 걸어오는 소리』는 영어판 번역이다. 나는 외국어를 못하지만 이런 번역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이야기를 일본어로 옮긴 뒤 다시 낯선 나라의 언어로 옮겨졌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국내에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영어판을 기본으로 하면서 이야기와 관련 있는 나라가 있을 때 그 나라 언어를 전공한 사람이 번역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났지만 조금은 씁쓸하다. 몇 가지 언어의 편중되어 있는 현실은 단순히 출판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32호(2008년 9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728x90
반응형

'어린이책 관련 > 외국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과 함께  (0) 2021.04.07
피기스의 전쟁  (0) 2021.03.25
나, 후안 데 파레하  (0) 2021.02.22
텔레비전 속 내 친구  (0) 2021.01.22
나는 시궁쥐였어요  (0) 2020.10.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