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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외국 동화

피기스의 전쟁

by 오른발왼발 2021.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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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다

《피기스의 전쟁》(로버트 웨스톨 글/김중철 옮김/지민희 그림/웅진주니어/2007년/절판)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당황스러웠다. 독특한 글의 형식이, 그리고 글의 내용이 모두 충격이었다.
이 책은 1990년 발발한 걸프전에 관한 이야기다. 십 여 년 동안 어린이 책을 읽어왔지만 걸프전에 관한 책은 처음이었다. 물론 걸프전에 관한 책을 못 본 거지 걸프전 외에 다른 전쟁에 관한 책은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꼭 걸프전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이 책처럼 아랍인의 입장에서 적나라하게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물론 어른들 책에서라면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린이 책은 아니었다. 아랍인의 입장을 이야기하더라도 아랍인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 정도로 쓰이거나, 애써 돌려서 이야기하곤 했다.
그건 아마도 걸프전이 어떤 의미에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인 탓도 있을 것이다. 걸프전은 끝났지만 그 걸프전은 결국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9.11 사건으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이어지면서 민감한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라크 파병 문제, 아프가니스탄 인질 문제 등 민감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남긴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랍인의 입장을 듣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입장을 공감하게 만든다. 여기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아랍인의 입장을 듣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피기스가 겪는 전쟁의 고통이 너무나 절절하기 때문이다. 그저 머리 속으로만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전쟁을 겪어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또 그 상황을 겪어내는 게 지금 이라크에서 미국에 맞서 싸우는 있는 이라크 병사가 아니라 이라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지내던 영국의 중산층 소년이라는 점 때문이다.
만약 피기스가 이라크 소년이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는 이야기였다면 어쩌면 덜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한 발 물러서 관조하듯 걸프전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작가는 걸프전을 독자에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걸프전이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임을 일깨운다.
‘우리 주위에는 깊이 갈라진 틈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이 있다. 피기스는 깊이 갈라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던 아이였다.’
사건이 다 끝난 뒤 피기스를 회상하는 장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마도 작가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굳이 피기스에게 그 힘든 상황을 맡긴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이쯤에서 책 속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 책에는 한 가족이 등장한다. 화자인 ‘나’ 톰과, ‘나’가 어릴 적 상상의 친구였던 피기스란 이름을 붙여준 동생 앤디,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에게 거인처럼 여겨진 아버지는 건물을 짓고 수리하며 아버지의 왕국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새 차를 좋아했고 특히나 럭비를 좋아한다.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영국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엄마는 시의회 의원으로 집안일 보다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해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는 엄마보다는 아버지에 가까운 인물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릴 적 피기스란 상상의 친구랑 놀지만 동생이 태어나자 동생을 피기스라 부른다. 같은 엄마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동생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동생 피기스는 ‘나’의 일부였다고 해도 좋음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기스를 통해 동생과 이어져 있었기에 ‘나’는 피기스의 특별함을 눈치 챌 수 있었고, 결국 이 책의 가장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피기스가 보인 이상한(!)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억할 수 있었다.
동생의 원래 이름은 앤디. 하지만 여기서 앤디란 원래 이름은 큰 의미가 없다. 앤디였을 때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일 뿐이다. 물론 가족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데 익숙한 엄마와 좀더 가까웠다. 그리고 피기스가 ‘나’와 동생의 매개가 되었던 것처럼 동생은 피기스가 되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사람, 세계와 다리를 놓았다.
동생이 다리를 놓은 세계는 걸프전이 한창인 이라크 소년 라티프다. 물론 처음부터 이곳에 다리를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 전에 이미 피기스의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피기스는 점차 라티프가 되어 간다. 처음엔 잠자는 동안 꿈처럼, 그러다 몽유병처럼 움직이고, 생전 배운 적도 없는 아랍어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걸프전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그리고 라티프가 점점 위기에 처할수록 피기스는 점점 라티프가 되어 간다. 이와 반대로 아버지는 점점 걸프전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전적으로 환호한다. 아버지에겐 후세인이 핵무기를 만들기 전에 미국이 갖고 있는 무기를 이라크에 쏟아 붓는 게 당연하다. 아버지는 건물을 지으며 보이는 세상에 매달려 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피기스와 한방에서 지내며 조금씩 그 모습을 보아왔고, 또 가끔은 동생이 라티프에서 피기스로 돌아오는 순간을 이용해 그 이야기를 들어오던 ‘나’와는 달리 엄마와 아버지는 문제가 심각해진 다음에야 그 사실을 눈치 챈다. 엄마와 아버지의 눈에 피기스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라티프가 죽는 순간, 피기스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 순간은 미국이 융단폭격을 시작하고, 결국 걸프전에서 승리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생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랑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몰랐다. 피기스는 사라졌다. 동생은 ‘나’보다 더 아버지랑 비슷해져간다. 가족들은 마치 동생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만 중요한 듯 더 이상 집 밖의 일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 현실이 아무래도 씁쓸하다.
그렇다면 피기스는 무엇이었을까? 피기스였던 동생조차도 모든 걸 잊어버린 걸 보면 다소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많다. 치열한 투쟁의 현장에서 괴로워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마치 기억상실에 걸린 듯 모든 걸 다 잊은 듯 지내는 모습을 보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니까. 오히려 아빠를 동경하던 ‘나’는 피기스를 보며 그 모습이 사실이라는 자각을 하며 괴로워하고, 또 고민하며 피기스처럼 되어 간다.
책을 읽으며 불편했던 건 이 때문이다. 작가는 말한다. 비록 모두가 잊었다고 해도 ‘나’가 피기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지켜보고 기억하는 것처럼 독자들도 피기스를 기억하라고.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06호(2007년 8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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