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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책/옛날이야기 공부방

내 복에 산다

by 오른발왼발 202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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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복은 어디서 오나?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과연 누구 복에 살까?
이야기 속 셋째 딸은 “너는 누구 복에 사느냐?”는 아버지 물음에 당당하게 답한다.
“나는 내 복에 먹고 살아요.”
지금껏 자신이 먹여주고 키워줬으니 당연히 자신의 덕이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셋째 딸을 내쫓는다.
이야기에서 셋째 딸은 결국엔 부자가 된다. 반면 아버지는 눈먼 거지가 되고 만다. 결국 복이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셋째 딸이었다. 그리고 ‘내 덕에 먹고 산다’는 셋째 딸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셋째 딸처럼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준비 없이, 아무것도 없이 내쫓기고 나면 아무리 노력해도 일어서기 힘들다. 옛날 사람들도 이런 현실쯤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특별히 복이 많은 셋째 딸에 관한 이야기일까?
곰곰 생각해 봤다. 내 복도 과연 나에게 있을까?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니, 확실히 부모 복이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난 뒤, 부모 탓에 어려움을 겪은 일도 떠올랐다. 부모 복이 있을 때는 고마움을 몰랐지만, 부모 탓이 있을 땐 원망이 가득했다. 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무슨 일이든 부모 탓에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여겼다. 
한참을 그렇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부모 탓, 누구 탓만 할 줄 알았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중심에 서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어디에 가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멀리 내동댕이쳐진 상태였다.
그제야 나는 이런 상황을 만든 게 누구 탓이 아니라 바로 내 탓이었음을 알았다. 어찌 됐건 판단하고 행동을 한 것은 나였다. 
그때부터였다. ‘나’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다시 보니, 더 이상 누구의 탓은 안 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복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결정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이 이야기가 소중하다. 이 이야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잘 되면 내 덕’, ‘안 되면 남 탓’만 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셋째 딸


이야기의 결말만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는 ‘복 많은 셋째’의 이야기다. 하지만 모든 걸 결론만 가지고 따질 수는 없다. 아버지 물음에 “내 복에 산다”고 말한 대가는 녹록지 않았다. 살던 집에서 그대로 쫓겨나 깊은 산 속에 사는 숯장수의 아내가 되어야 했다. 이 지점에서 과연 셋째가 복이 많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복이 많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복을 차버린 답답한 사람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셋째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셋째 딸은 숯가마의 이맛돌이 금덩이인 것을 발견한다.
셋째는 남편에게 말한다.
“숯가마의 이맛돌을 빼서 집에 가지고 가자.”고.
하지만 숯가마가 자신이 사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는 남편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터전이 완전히 해체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남편은 셋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금덩이를 팔아오라고 한다. 
“값대로만 쳐주시오.”라고 말하라고 한다.
숯장수 남편은 금덩이를 지고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다. 지금껏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의 값어치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숯장수 남편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좀 궁금하다.
금덩이는 누구의 것일까? 숯장수가 그동안 열심히 일한 대가가 금덩이로 표현된 것일까? 아니면 금덩이를 알아본 셋째가 아니었다면 평생 숯가마의 이맛돌 노릇밖에 하지 못했을 테니 금덩이를 알아보는 눈을 갖고 있던 셋째의 것일까?
예전엔 이 금덩이는 성실하게 살아온 숯장수가 노력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엔 생각이 달라졌다. 무엇이든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야 그 가치만큼 쓰이는 법이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 있다 해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쓸모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예전부터 궁금하던 것 하나가 해결됐다. 이맛돌로 쓰인 금덩이의 금이 녹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금이 녹는 온도는 1064도, 숯가마의 온도는 최대 1000도 이상 올라간다. 이맛돌이야 1000도 이상의 온도로 올라가는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숯가마에 금덩이돌을 사용했다는 건 불안하기만 하다. 어쩌면 숯장수가 만들어 팔은 숯은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만 같다. 당연히 좋은 값도 못 받았을 테고,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기 어려웠을 거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이맛돌만 금덩이가 아니라 가마가 다 금덩이 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금덩이 돌은 이미 그 자체로 가치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금덩이 돌로 쌓은 숯가마는 숯가마로서의 가치가 높지 않다. 

아버지와 셋째딸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 딸의 갈등에서 사건이 시작한다. 
“너는 누구 복에 잘 사느냐?”
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버지 복에 잘 삽니다.”
두 언니는 출제 의도에 맞게 대답한다. 
하지만 이 답은 그때는 맞는 답이었는지 몰라도 진실이 아니다.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정답만 외우는 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답이 진실이 아님에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첫째 둘째가 그리 잘 살지 못한 건 그 때문이다.(‘내 복에 산다’와 같은 서사구조를 가진 제주 신화 ‘감은장아기’에서는 두 언니가 청지네와 두엄더미의 말똥버섯이 된다.) 
그런데 왜 가장 어린 셋째는 언니들처럼 대답하지 않았을까? 너무나 뻔한 답이기도 하지만, 이미 두 언니가 답하는 걸 보기도 했을 텐데 말이다. 셋째가 남달랐기 때문이라 퉁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두 언니의 모습이 셋째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가부장 질서가 확고한 사회에서 이에 반하는 답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셋째도 두 언니처럼 대답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가부장 질서가 확고한 집안에서 셋째 역시 그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했을 때 지금 당장은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대놓고 모든 것이 자신의 덕이라 여기는 아버지가 있는 집안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가부장 질서 속에서 셋째 딸은 억눌리고 무시당했을 것이다. 반발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 뜻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대놓고 질문을 던진 날, 셋째는 꾹꾹 참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어린 셋째는 기존의 질서 체계가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기존의 질서 체계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확고한 틀 때문에 숨겨진 진실과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고, 결국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 반면 셋째는 세상을 향한 열린 시선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옛이야기에서 어리숙해 보이던 셋째 혹은 막내가 결국엔 성공을 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 복에 산다’는 셋째의 말은 정말 자신이 복이 많다고 생각했기에 한 말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복을 찾아가겠다는 선언일지 모른다.

자기 세계를 구축한 셋째


잘살게 된 셋째는 열두 대문 기와집을 짓는다. 이 집에서 특이한 것은 대문을 여닫을 때 셋째 딸의 이름 소리가 나게 만든다는 점이다. 

색시는 쑥구쟁이과 나에 이름은 니나니느꺼니 대문을 열구 닫구 할 적마다 니나니 니나니 하는 소리가 나두룩 짜서 달라구 했다.(내 복에 산다. 임석재전집 평북 1, 112)

이 처녀가 대문의 목수를 보고 돈을 많이 줄 테니 그 대문 한 번 열었다 닫았다 할 때마다 소리를 나게 해달라고 하며 한 번 열 때마다 자기 이름인 “옥점아” 닫을 때마다 “옥점아”하게 해달라 하더래. 돈을 많이 주고 어떻게 그렇게 해주더래.    (숯 장수 이야기-구비문학대계, 강원 강릉 홍제동)

셋째는 여닫을 때마다 자기 이름이 나도록 대문을 만든다. 대문은 ‘이 집이 누구의 집이다’라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문패이다. 흔히 문패는 남자의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이렇게 대문에 자신의 이름 소리가 나게 하였다는 것은 이 집의 주도권이 셋째에게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드디어 셋째는 자신의 만든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는 처음 셋째가 가부장 질서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던 상황과 대비되며 상황의 반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셋째 딸 집까지 온다. 아버지가 대문을 열 때마다 셋째 딸의 이름이 들린다. 이제 아버지는 자신의 낡은 세계가 아닌 딸이 세운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낡고 고정되어 바뀌지 않는 것은 쓰러지고 만다


견고해 보였던 아버지의 가부장적 질서는 무너졌다. 어쩌면 셋째 딸의 세계도 시간이 흘러 낡고 변하지 않으려 한다면 마찬가지 결말을 맺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셋째 딸의 복은 자신의 세계가 바뀌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밖으로 나온 데에 있었으니, 그 세계를 유연하게 지켜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궁금증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 당연히 그림책으로 많이 나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보이질 않는다. 왜일까? 
무엇이 이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걸 두려워(?)하게 하는 걸까? 혹시 ‘내 복에 산다’는 말이 어린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그림책을 검색해 보니 단행본으로는 《내 복에 살지요》(엄혜숙 글/배현주 그림/애플트리태일즈)가 유일하다. 그 외에 제주 신화 《감은장 아기》(서정오 글/한태희 그림/봄봄) 정도뿐이다.
그래도 전집에서는 눈에 띈다. 웅진에서 나온 호롱불 옛이야기에 있는 《내 복에 산다》(이상희 글/윤정주 그림)가 보이고, 그 외에 차일드아카데미, 한국톨스토이, 한국헤밍웨이에서 나온 옛이야기 그림책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셋째 딸의 이야기가 아니라 ‘효도’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셋째 딸의 세계는 사라지고 다시 가부장 세계로 회귀한 모양새다. 
씁쓸하다.
언젠가 셋째 딸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그림책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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