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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책/옛날이야기 공부방

반쪽이

by 오른발왼발 2021.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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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이처럼 살기 황만근처럼 살기

 

 

1.
어깨 근육이 또 뭉쳤나 보다. 뭉친 어깨 근육을 풀어본답시고 열심히 어깨를 움직여 보지만 너무 단단하게 뭉쳐버린 탓인지 쉽게 풀리질 않는다. 노력을 해보지만 어깨는 점점 무거워만 오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진다. '어떻게든지 빨리 뭉친 어깨를 풀어야 밀려있는 다른 일들을 할텐데……' 하는 생각뿐이다. 마음이 조급해지다보니 어깨는 점점 더 아파 온다.
그런데 갑자기 아라비안 나이트 가운데 하나인 '선원 신드바드의 항해 이야기'가  떠오른다. 신드바드가 난파해 한 섬으로 오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신드바드가 우물 건너편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하는 한 노인을 떠메게 되는데, 노인이 내리지를 않고 두 다리로 목을 감아 바싹 죄는 바람에 옴짝달싹 못하고 짊어지고 다니는 이야기 말이다.
갑자기 내 어깨에도 끔찍한 노인이 올라타서 나를 옥죄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단순히 어깨 운동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방법은 단 하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옥죄고 있는 노인을 내 어깨에서 떨쳐버려야 한다.
그럼 내 어깨를 누르고 있는 노인의 정체는 뭘까? 정해진 시간 내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는 욕심이 아닐까?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한번 쉬어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시간이 넉넉해진다.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하고, 집에서 안자던 낮잠도 자고, 좀 나태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늘어져 본다. 며칠을 이러고 나니 어깨도 풀리고 확실히 일도 능률이 오른다.

2.
옛날 이야기는 정말 별나다. 처음에 옛날 이야기를 보고들을 땐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점점 그게 아니다. 무슨 고민되는 일이라도 생기면 이상스럽게도 옛날 이야기가 떠오른다. '맞아. 그 이야기는 아마 이래서 생겼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든다.
때론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잘 안 될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가도 한참 뒤에 내가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갑자기 그 뜻이 다가오기도 한다. 신드바드의 어깨 위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노인의 이야기도 그랬다. 다른 사람은 나와는 다르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내 처지와 다른 사람의 처지가 조금씩 다르듯이 이야기의 뜻도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여질 거다. 하지만 조금씩 다르긴 해도 결국 그 뜻은 서로 통할 거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옛이야기는 좋다. 이렇게 받아들이든 저렇게 받아들이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통하는 걸 발견하게 되고 결국 각자가 받아들인 이야기의 뜻은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브루노 베텔하임의 책을 봤을 때 생각이 난다. 옛날 이야기가 사람들의 무의식 세계를 그린 거라는 해석에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비약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점점 수긍을 하게 된다. 친한 사람끼리는 척 하면 서로 통하는 게 있듯이 옛날 이야기가 전해지던 공동체 속에는 서로 통하는 게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걸 상징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그 상징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고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는 자기가 의식하지 않아도 그 상징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브루노 베텔하임이 말한 것처럼 옛날 이야기는 사람들의 무의식 세계가 담겨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3.
이야기하는데 별 재주가 없는 나는 몇 가지 이야기만을 골라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반쪽이' 이야기다.
몸이 반밖에 없는 아이 '반쪽이'. 아이들은 그 '반쪽이'를 참 좋아한다. 만 세돌이 된 유경이도 밤에 잠들기 전에는 '반쪽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유치원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반쪽이'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가끔 "어떻게 사람 몸이 반쪽만 있어요? 말도 안 돼!" 라며 딴지를 거는 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아이들도 일단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그냥 '반쪽이'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간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반쪽이가 끙 하고 힘을 써서 나무를 뿌리째 뽑고, 바위를 번쩍 들고, 호랑이를 물리치는 장면을 흉내내며 재미있어 한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기가 반쪽이가 된다. 처음 '반쪽이' 이야기에 딴지를 걸던 아이도 이 부분에서는 완전히 반쪽이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무서운 호랑이를 손가락으로 퉁겨서 잡다니! 이제 아이들은 반쪽이와 함께라면 무서울 게 없다.
왜일까? 옛이야기 속의 다른 주인공들과는 그 모습부터 모자라기만 한 '반쪽이' 이야기를 아이들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혹시 아이들이 자신들의 처지와 반쪽이의 처지를 같다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이거 먹으면 손 커져? 발도 커져?"
"난 엄마만큼 아빠만큼 보다 더 커질 거야."
"나 발 커졌지? 나도 이제 할 수 있지?."
요즘 유경이가 가장 많이 하는 말들이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 아빠랑 자신의 몸을 견준다. 아이의 목표는 빨리 엄마 아빠처럼 커지는 거다. 아이에게 몸이 커진다는 건 그냥 단순히 몸만 커진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몸이 커진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뜻이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도 뭐든지 할 수 있게 된다는 걸 뜻한다.
유경이 뿐 아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본다. 작은 아이들은 좀 주눅이 들고 큰 아이들은 큰 소리를 친다. 아이들이랑 이야기를 해보니 아이들은 체격이 크면 빨리 어른이 될 수 있고, 체격이 큰 아이는 빨리 어른이 될 거라고 믿는다. 키가 크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른이 되었을 땐 어렸을 때 큰 아이가 작아지고, 작은 아이는 오히려 키가 더 클 수도 있다고 말해주지만 아이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들이다. 이런 현상은 청소년 시기까지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몸은 이미 어른이 된 아이들은 진짜로 어른이 다 됐다고 믿고 어른처럼 행동하는 미숙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아이들은 어른들의 반도 못되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반쪽이'를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체격의 차이는 아이와 어른, 힘센 자와 약한 자를 구분 짓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어른들 세계에서도 체격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칠 때가 많은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반쪽이가 된다. 그래서 반쪽이가 생각지도 못한 큰 힘을 발휘하는 걸 보고 기뻐한다. 자기들도 반쪽이처럼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갖는다. 바위도 번쩍 들고, 나무도 뿌리째 뽑아 내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도 손가락으로 탁 퉁겨서 잡을 수 있게 될 거라 믿는다. 지금은 아니지만 조금 자라면 반드시! 아이들은 반쪽이의 모습에 열광하며 온쪽이가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마지막에 반쪽이가 욕심 많은 부잣집 영감하고 내기에서 이겨 부잣집 딸과 결혼하는 장면에 이르면 다들 입가에 미소가 가득 찬다. 아이들에게 결혼이란 완전한 행복을 뜻한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됐다는 걸 뜻한다. 완전한 어른이란 반쪽 몸뚱이가 아니다. 이제 반쪽이는 온쪽이 됐다. 아이들도 온쪽이 된 미래의 자신을 본다.

4.
'반편'이란 말이 있다. 원래의 뜻은 '한 개를 절반으로 나눈 한 편짝'을 말하지만 실제로 쓰일 때는 '다른 사람보다 모자란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는 게 보통이다.
'반쪽이'도 마찬가지다. 겉모습이 보통 사람과 달리 절반밖에 안 되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진짜로 몸이 반밖에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보통 사람보다 못한 사람, 바보스러운 사람, 고지식한 사람……, 이런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땐 한참 모자라 보이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들도 자신이 바보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가끔은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할 정도로 멍청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땐 누구나 '내가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고 자기가 진짜로 바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옛날 민중들도 자신을 반쪽이처럼 여기진 않았을까? 아무리 피땀흘려 일해도 먹고 살기도 힘든 자신의 처지를 호의호식하는 양반들과 견주며 스스로를 반쪽이로 여기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반쪽이가 형들을 이기고, 양반과의 내기에서 이기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되는 건 민중들의 소망이었으리라. 비록 양반들이 자신들을 바보 취급을 하고 있지만 자신들은 결코 당하고만 있는 바보가 아니며, 결국 싸워 이길 힘을 길러 마침내 사람다운 삶을 살아보고야 말겠다는 소망 말이다.
결국 어른이나 아이나 반쪽이 처지에 놓이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질 때마다 사람들은 반쪽이가 된다. 힘이 약하면 약할수록 더 자주 반쪽이가 된다. 그래서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자주 반쪽이가 된다. 그리고 반쪽이는 타고난 모자람 때문에 놀림을 받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자신의 힘을 발견한다.

5.
이제 반쪽이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옛날 이야기에서는 삼형제 가운데 막내가 주인공인 경우가 참 많다. 반쪽이도 삼형제 가운데 막내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들과는 달리 반쪽이는 반편이다. 그렇다고 반쪽이가 그런 자신의 모습 때문에 고민을 하진 않는다. 형들과의 갈등이 드러나는 건 형들이 과거 시험을 보러 길을 떠나면서 반쪽이가 따라오지 못하게 하면서다. 그리고 이때부터 반쪽이는 굉장한 힘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 결국 부잣집 딸과 결혼을 해 행복하게 잘 살게 된다.
그냥 듣기만 해도 재밌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이야기에 접근해 보자. 앞에서는 형들과 반쪽이의 관계에 대해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집을 떠나 과거를 보러 가면서 갈등이 시작됐을까? 왜 같이 태어난 쌍둥이 형제인데 반쪽이만 모습이 다를까? 두 형들은 왜 갑자기 이야기에서 사라져버렸을까?
반쪽이 마음과 꼭 닮아있는 아이들 눈으로 이야기를 들여다보려고 애를 써본다. 그리고 문득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서부터 내뱉던 말들이 떠오른다.
"엄마 미워!"
"나 혼자 할거야."
"난 엄마 아빠보다 훨씬 커질 거야."
"나도 할 줄 알아."
"호랑이가 나타나면 몽둥이로 때려잡을 거야. 그리고 조금 크면 나도 반쪽이처럼 손가락으로 퉁겨서도 잡을 수 있다."
아이는 언제부턴가 엄마 아빠를 자기 경쟁자로 여기는 듯하다. 가끔은 자기가 못하는 일들에 대해서 기가 죽을 때도 있지만, 조금 있으면 "나도 크면 다 할 수 있어!"라며 큰소리를 쳐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반쪽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건 부모를 이기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둘을 넘어서는 것은 무의식 속에서 부모 두 사람보다 더 잘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부모와의 관계속에서 어린이는 자기가 야단이나 맞고, 대단치 않으며, 소홀히 대접받는다고 느낀다. 부모를 능가한다는 것은 어떤 형제를 이기는 것 이상으로 그 자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모를 능가하려는 자기의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어린이는 스스로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옛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을 하찮게 생각하는 두 명의 형제들을 능가하는 것으로 위장된다. - (《옛이야기의 매력》부루노 베텔하임, 시공주니어)

아이한테 있어 세계란 엄마 아빠와 자신 이렇게 세 명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아이는 늘 세 번째 자리에 자기를 가져다 놓는다. 엄마 아빠(혹은 아빠 엄마) 다음에 말이다. 다른 가족이 더 있건 없건 마찬가지다. 다른 가족들은 엄마 아빠와 자신이 있고 나서 네 번째 다섯 번째가 되고 만다. 이 때 아이 눈에 비친 부모는 완벽한 모습이다. 완벽하다는 점에서 부모는 차별성이 없다. 반면 자신은 부모랑 견줄 때 반쪽밖에 안 되는 모자라는 존재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에 나오는 반쪽이 부모는? 반쪽이를 낳은 부모는 수태 능력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다.1) 이건 아마도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자식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걸, 시간이 좀 지나면 자식한테 자리를 내줘야한다는 걸 암시해 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아이가 아무리 부모를 이기고 싶다 해도 그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아이는 부모와, 그리고 내면과 끊임없는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갈등이 해소되면 또 다른 갈등으로 계속 채워지면서 말이다. 이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냥 마음에 담아두면서 포기해버리거나, 무조건 부모에게 반항을 하거나 해서는 제대로 해결이 안 된다. 자신을 스스로 잘 다스려야하지만 부모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결국 아이에게 부모란 갈등의 대상이자, 넘어서야 할 대상이고 동시에 도움과 가르침과 격려를 받아야할 대상이기도 하다.
반쪽이는 두 형들이 과거를 보러 떠나면서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형들은 반쪽이를 떼어놓고 가려고 하고 반쪽이는 따라가려 한다. 형들이 반쪽이를 창피하게 여겨서 달아나는 걸로 되어 있지만 진짜로 그랬을 거란 생각은 안 든다.
아이는 자아의식이 생기면서 부모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때 아이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왜 나만 미워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어렸을 때처럼 부모의 품에서 아기처럼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뒤섞여 있다고나 할까? 이런 마음은 이제 막 자아의식이 생기는 유아기에서 시작해 청소년기를 거칠 때까지 계속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형들이 과거를 보러 가면서 반쪽이를 떼어놓고 가려고 했던 것도 사실은 부모와의 갈등에서 오는 반쪽이 마음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왜 나만 미워해?"라는 말을 할 때 아이가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고립감을 느끼듯이 말이다.
반쪽이는 바위에, 나무에 묶인다. 하지만 '끙'하고 힘을 쓰는 것만으로 땅에 박혀 있는 바위를 번쩍 들고, 땅 속 깊이 박힌 나무를 뿌리째 뽑아 올린다. 그리고 그걸 집으로 가져온다. 형들을 위해서, 혹은 어머니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말이다.
아이는 위기에 처하면 어떡하든지 그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다. 해결 방법은 본능적이다. 바위에, 나무에 묶인 반쪽이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끙'하고 힘을 썼던 것처럼. 한 가지 갈등이 마음에서 해소되면 아이는 다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엄마, 사랑해!"하며 너스레를 떨어보기도 한다. 잠깐이지만 아이와 부모는 아무런 갈등도 없는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세 번째로 형들을 쫓아간 반쪽이는 꽁꽁 묶인 채 호랑이 굴에 던져진다. 앞서의 상황과 확실히 다르다. 앞에서는 묶이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묶인 줄을 풀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호랑이들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부루노 베텔하임은 땅 속 세계로 들어간다는 건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하는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바위나 나무도 땅에 묻혀 있는 거다. 그렇다면 반쪽이가 앞서 바위와 나무를 뽑아 올린 것은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를 밖으로 끄집어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과도 통할 것 같다. 호랑이 굴도 마찬가지다. 굴이란 땅 속 공간이니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바위나 나무는 땅에 박혀 있어 겉으로 들어난 부분이 더 크지만, 굴이란 완벽한 땅 속 세계라는 점이다. 이건 반쪽이가 앞서의 두 번의 위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좀더 깊이 탐색을 하게 됐다는 걸 뜻하겠다 싶다. 게다가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앞서처럼 그저 '끙'하고 자기도 미처 몰랐던 힘만 쓴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힘을 주는 것으로 밧줄을 끊어버리고 나면 여기저기서 덤벼드는 호랑이를 물리쳐야 한다. 반쪽이는 손가락으로 탁 퉁기면서 많은 호랑이들을 다 잡는다. 이제 반쪽이도 아이도 모두 완벽한 자신감을 갖는다.
이쯤 되면 이제 부모의 품을 떠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차례다. 반쪽이는 호랑이 가죽을 벗겨서 내려온다. 이제 현실에서 실제 삶과 부딪혀 이겨내야 한다. 그 힘이 되어 주는 건 호랑이 가죽이다. 결국 호랑이 가죽은 반쪽이가 그동안 갈등을 극복하면서 쌓아온 내재된 힘을 보여주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재된 힘'이란 말 그대로 내 속에 숨겨있는 잠재된 힘이다. 따라서 이 잠재된 힘을 밖으로 끌어내 실제로 힘을 발휘하려면, 일상에서 이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래서 반쪽이는 한 번의 시련을 더 겪는다. 부잣집 영감과 내기를 벌이는 것이다. 부잣집 딸을 몰래 데려갈 수 있으면 부잣집 사위가 되지만, 그러지 못하면 호랑이 가죽을 내놓기로 한다.
부잣집 영감과 내기에서 반쪽이는 앞서와는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단순한 힘이 아니라 지혜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잣집 영감과 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을 때를 피해, 삼일이나 기다려 사람들이 지쳐 잠이 들었을 때를 택한다. 상투를 잡아매거나 솥뚜껑을 씌워 놓고, 다듬잇돌, 유황, 자갈, 장구들을 이용해 부잣집을 혼란에 빠뜨려 놓는다. 그리고 딸 방에다 빈대와 벼룩을 쏟아 부어 딸이 스스로 나오게 만든다.
반쪽이는 부잣집 딸과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산다. 간혹 반쪽이가 부잣집 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업어가 결혼을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에 담긴 다른 뜻은 보지 않고 딸 입장만을 봤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딸이 '스스로' 나왔다는 점이다. 부잣집이 혼란에 빠졌을 때 방에 들어가서 강제로 업고 나올 수도 있으련만 스스로 나오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건 반쪽이와 딸의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반쪽이는 더 이상 반쪽이가 아니다. 둘의 결혼으로 반쪽이는 온쪽이가 된 거다. 온쪽이가 됐다는 건 이제 자기 스스로 모든 걸 해 나갈 수 있는 사람, 즉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는 말이다. '반쪽이' 이야기의 여러 다른 판본 가운데는 간혹 반쪽이가 온쪽이로 모습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변하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이란 것 자체가 이미 온쪽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거니까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온쪽으로 모습이 바뀌지 않는 게 더 좋다. 어차피 반쪽이란 모습이 진짜 반쪽뿐인 모습이 아니고, 그게 유아기의 흔적이라면 그건 이미 자기의 일부이니, 그것조차도 자기의 일부로서, 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6.
아이들은 반쪽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감을 갖는다. 비록 지금 자기 처지가 반쪽이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반쪽이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강해진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남들과는 다른, 부족한 반쪽이 모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반쪽이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지만,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을수록 금세 반쪽이에 쏙 빠져들어 간다. 처음 '끙'하고 힘을 쓸 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고, 호랑이를 손가락으로 탁 퉁겨서 죽일 때쯤이면 완전히 빠져든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반쪽이가 겉모습은 좀 보자라 보이지만 사실은 보통 사람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반쪽이는 아이들 마음 속에 쏙 들어가 앉는다. 이제 아이들은 반쪽이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쉽게, 자연스럽게 반쪽이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반쪽이 이야기는 아이들에게만 의미있는 이야기일까? 그건 아닐 거다. 진짜 옛날옛날, 옛날 이야기가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땐 어른들도 반쪽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 아이들이 느끼는 것 같은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를 세계의 중심으로 알던 아이들이 반쪽이 처지에 공감했던 것처럼, 어른들은 가족의 울타리가 아닌 더 넓은 세계와 부딪치며 스스로 반쪽이처럼 느낄 때가 많았을 거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할 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배우지 못해서 업신여김을 당할 때……. 사람은 누구나 다 스스로 반쪽이처럼 모자란 존재로 느껴질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반쪽이 이야기처럼 약한 사람의 편에서 위안을 주는 이야기도 없다 싶다.

7.
성석제의 단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황만근의 모습이 천생 반쪽이 그대로다. 동네 사람들 누구라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황만근을 '팔푼이, '반그이(반근)'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그렇다. 반쪽이나 황만근이나 반편 신세를 면치 못한다. 황씨 성이 오십여 호 모여 사는 집성촌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황만근을 바보 취급이다. 있으나마나 한 존재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땐 한참 모자란 인물이다.
하지만 반쪽이가 진짜 반쪽이가 아니었던 것처럼, 황만근도 진짜 바보가 아니었다. 겉모습에만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이 그걸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반쪽이가 자기의 잠재된 힘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행복을 찾았듯이 황만근도 모자람 덕분에 오히려 자신을, 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농민궐기대회를 떠나기 전날 밤, 황만근은 황씨 집성촌에 이방인처럼 들어와 사는 민씨에게 이런 말을 한다.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 카이.”
“기계화영농 카더이마 집집마다 바퀴 달린 기계가 및이나 되나. 깅운기, 트랙터, 콤바인, 이앙기, 거다 탈곡기, 건조기에…… 다 빚으로 산 기라. 농사지어봐야 그 빚 갚느라고 정신없다.”
“그런 기 다 쌀값에 언차진다. 언차져야 하는데 사실로는 수매하마 먹고살기 간당간당한 돈을 준다. 그 대신에 빚을 준다, 자금을 대준다 카는데 둘 다 안했으마 좋겠다. 둘 다 농사꾼을 바보 멍텅구리로 만든다.”
“지 입에 들어갈 양석, 곡석을 짓는 사람이 그 고마운 곡석, 양석한테 장난치겠나. 저도 남도 해로운 농약 뿌리고 비싸고 나쁜 비료 쳐서 보기만 좋은 열매를 뺏으마 그마이가?”
“내가 왜 빚을 안 졌니야고. 아무도 나한테 빚 준다고 안캐. 바보라고 아무도 보증 서라는 이야기도 안했다.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면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작과비평사)

무슨무슨 자금해서 인심좋게 빌려주던 척 하던 자금도 황만근한테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황만근은 빚을 안 졌기 때문에 오히려 온갖 가지 이름으로 농민들이 떠안는 자금의 본질을, 농촌의 현실을 누구보다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황만근이 바보 취급을 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모자람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마치 반쪽이가 두 형들에게 나무에 묶이고, 바위에 묶이고, 호랑이 굴에 던져지면서 자신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힘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반쪽이나 황만근이야말로 진짜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가끔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멍청한 짓을 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면 처음엔 스스로 창피하고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그랬나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괜히 창피한 생각이 앞서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감추려고만 들어서도 안 된다. 그럼 겉으로는 자신의 모자람이 드러나지 않겠지만 자기 스스로는 끝없이 주눅이 든다. 내면을 들킬까 겉으로만 더 잘난 척하게 된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속은 황량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겉모습만 신경쓰듯이 남들도 겉모습만 보고 세상의 겉모습만 보고 본질을 놓치고 말 가능성이 많아진다.
반쪽이의 두 형, 황씨 집성촌의 사람들은 모두 겉모습에만 익숙하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 살아왔다는 점에서 어쩌면 반쪽이나 황만근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법도 한데, 오히려 그 때문에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겉으로는 멀쩡하기에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도 갖지 못한다. 황만근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는 사람은 황씨 집성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민씨뿐이다. 민씨는 황만근의 겉모습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선입견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황만근은 반쪽이의 결말과는 좀 다르다. 반쪽이는 예쁜 색시랑 결혼해서 잘 살게 되지만, 황만근은 정작 자기는 빚도 없으면서 혼자서만 행동강령 그대로 경운기를 타고 나갔다가 일주일이 지나서 겨우 한 항아리의 뼈로 돌아오고 만다. 살아서도 바보 취급만 받더니 결국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싶기도 하다.
헌데 책을 덮으면 죽어서도 걸쭉하게 웃어 재끼는 황만근의 얼굴이 떠오른다. 죽어 버린 황만근이 곁에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자기와는 관계도 없는 일에 바보같이 남들보다 더 정직하게 나섰다가 죽고 말았지만,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황만근이 사라진 뒤에야 마을 사람들은 황만근이 마을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한다. 황만근은 마을에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아니라 꼭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황영석은 마을회관 변소에서 분뇨를 퍼내면서, 아이들은 소꿉장난을 하다 시비가 생기면서 황만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염습과 산역같이 남이 꺼리는 일, 똥 구덩이를 파고 우리를 짓고 벽돌을 찍는 일, 마을길 풀 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 용왕제에 쓸 돼지를 산 채로 묶어서 내다가 싫다가 요동질하는 돼지에게 때때옷 입히는 일……, 동네 일, 남의 일, 궃은 일에는 늘 황만근이 있었다. 그 동안은 이런 일을 헐값에 시키고도 공치사를 하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모든 일을 직접 하며 황만근을 기억하게끔 되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옛날에 황만근이란 사람이 살았지. 반편 같은 놈이었지만 말야……." 하며 황만근 이야기를 전할 거라 여겨진다. 마치 반쪽이 이야기를 하듯 말이다.
그렇다면 황만근의 삶도 그다지 비극적이지만은 않은 셈이다. 살아서 약은 척, 잘난 척하며 잘 살았지만 죽고 나서 온갖 욕을 다 얻어먹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삶이 아닌가.
아이들만 반쪽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가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다. 나도 반쪽이를 보며, 황만근을 보며 그들처럼 살아 보려 한다. 반쪽이처럼, 황만근처럼.

 


1) 많이 알려져 있는 그림책 <반쪽이>(보림)에서는 '어떤 아주머니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고 쓰여 있다. 보통의 판본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늙도록'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힘이 없는 부모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통은 할머니 할아버지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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