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색 크레파스, 누구의 살색이죠?
1. 살색 이야기
어렸을 때 너무 헷갈리던 색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초록색' 이 바로 내가 헷갈리던 문제의 색이다. 물론 나는 이 색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 색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유치원은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채 처음 학교라는 곳에 갔는데, 선생님은 내가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색을 두 가지 이름으로 설명하는 게 아닌가! 나는 정말 얼떨떨 했다. 미술시간엔 '초록색'으로 부르는 색이 사회 시간에 신호등을 배울 때는 갑자기 '파란색'으로 둔갑을 했기 때문이다. 신호등은 빨강, 파랑, 노랑불이 있고 파란불이 켜졌을 때 건너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언제나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덕분에 나는 사회 시험에서 신호등 문제가 나오면 언제나 헷갈려 하고, 거의 대개는 틀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고비를 넘긴 뒤 나는 다시 색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일이 없었다. 그저 당연히 크레파스나 물감에 있는 색이 맞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혹시 모르는 색이 있을 때는 그 색 이름을 알기 위해 크레파스나 물감을 살폈고, 내 머리에는 크레파스나 물감에 써있는 색의 이름이 그 색의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나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때때로 친구들과 "너 이 색이 무슨 색인지 알아?" 하며 서로 많은 색을 알고 있다고 자랑을 해대곤 했던 기억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우린 모두 크레파스 색을 신봉했다.(물감은 더 커서야 쓰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나뭇잎은 초록, 나무기둥은 고동색, 하늘은 하늘색, 해는 빨간색……그리고 얼굴은 살색, 이렇게 칠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오히려 이상했던 건 머리색을 까망으로 칠하지 않고 노랑으로 칠하는 아이들이 간혹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색 이름에 전혀 의문을 갖은 적은 없었다. 그림에 재주가 없던 나는 미술 시간말고는 그림을 그릴 일도 없었고, 학교를 마친 뒤에야 그림을 정해진 색으로만 그리는 게 안 좋다는 생각을 했을 뿐 색의 이름 자체에 대한 고민 따윈 전혀 없었다.
2. 살색 없애기 = 인종차별의식 버리기 = 이기주의 버리기
그런데 이런 나에게 의문을 갖게 한 일이 생겼다.
어느 날이나 마찬가지로 바쁘다는 핑계로 신문을 대충대충 제목만 훑어보고 나한테 필요한 기사(!)를 찾고 있을 때, 한쪽에 눈에 띄는 기사가 보였다. "크레파스의 '살색' 참 우스꽝스러워"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한겨레신문 2001. 1. 26)
내용은 경기도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 소장인 김해성 목사가 '살색 없애기 캠페인'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색을 없애야 할 까닭은 '우리 스스로 외국인들을 차별하는 의식을 갖게 만드는 것은 물론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거부하게 하는 것'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서야 '아하!' 하며 무릎을 쳤다. 주변의 사람들만 봐도 다 피부색이 다른데, 더구나 다른 종족들과는 피부빛이 확연히 다른데……, 말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이지 사실 같은 황인종이라도 동북아시아 쪽 사람들하고 동남아시아 쪽 사람들하고 얼마나 다르고, 흑인들도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데……. 그럼 이 색이 살색이면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저런 생각이 몰려들었다.
너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우리가 '살색'이란 부르던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살아왔던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어릴 적 미술 시간이 다시 생각이 났다. 사람을 그릴 때면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은 무조건 살색으로 칠하던 모습 말이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랬고, 또 선생님도 아이들이 얼굴에 색을 칠하지 않으면, '얼굴은 살색으로 칠해야지' 하시며 살색을 집어주시던 일까지 있었으니까.
내 어렸을 때의 모습만은 아닌 것 같다. 가끔 아이들이 그림 그린 것을 보면 요즘 아이들도 여전히 얼굴엔 살색만(그것도 크레파스에 있는 그대로의 색으로!)을 칠한다. 진짜 그 사람의 '살색'과는 관계없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특별히 색이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색이 아니라면 아이들이 꼭 그 색만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색에 처음부터 '살색'이란 이름이 안 붙었다면 아무도 그게 살색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고, 사람의 피부를 칠할 때 나름대로 색을 만들어서 써 보려고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라들의 피부빛이 모두 같지 않은 것처럼 백인도 무조건 하얗지만 않고, 흑인도 무조건 새까맣지 않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피부빛이 다른 것처럼 우리와 피부빛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 사람의 하나의 '신체적 특징'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너무 획일적인 교육에 익숙했기 때문일까?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한번 '이게 뭐다'라고 머릿속에 들어오면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살색뿐이 아니다. 하늘색 덕분에 아이들 그림에서 하늘은 언제나 깨끗한 한 가지 색으로만 표현되었고 구름이 그 깨끗한 하늘에 한두점이 하얗게 떠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정말 교육의 힘이 무섭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살색이나 하늘색이나 색에 대한 고정관념을 주는 건 마찬가지지만 살색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문제가 심각해 보인다.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민족에 대해서 너무나 폐쇄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꼭 흑인이나 백인처럼 우리랑 확연히 차이가 보이는 종족에 대해서만 폐쇄적인 게 아니다. 우리랑 비슷하게 생긴 중국이나 일본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는 너무나 폐쇄적이다.
세계 어디서나 성공한다는 중국인. 그 중국인들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가 있단다. 바로 우리나라였다. 사실 중국인이 성공을 하든, 혹은 하지 못하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중국인들이 왜 우리나라에서만 성공하지 못하느냐는 점이다. 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별난 민족차별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보면 중국 사람에 대해서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사람(백인)이나 일본사람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미국'이나 '일본'이라는 전체를 상징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대적인 모습을 보일 정도로 애정을 보이면서, 막상 미국이나 일본 사람 개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게다가 중국, 중앙 아시아, 러시아에서 어렵게 살다가 들어온 동포들에게는 단일민족을 내세우면서 민족애를 과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우리와 다른 사람'임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살색'이라는 건 우리의 삐뚤어진 외골수 공동체(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 어찌보면 가족이기주의의 확대판)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서로 피부빛이 다른 것도 문제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나'와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배척'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해성 목사의 '살색 없애기 캠페인'은 그래서 가슴에 와 닿았다. 김해성 목사의 고민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에서부터 시작했겠지만, 어쩌면 '살색'은 단순한 '피부빛'이 아니라 나와 관계 맺고 있는(나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것들 외엔 무조건 배타시 하는 우리의 삐뚤어진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가족, 학연, 지연, 민족, 국가…….
살색이 없어진다고 이런 모든 게 사라지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 하나는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요즘엔 '살색'이란 말 대신 '살구색'이라고 표현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살구색도 적당한 표현 같지는 않습니다.
2001년에 쓴 글이지만, 다시 올립니다.
'살색'의 문제는 단순히 색깔 이름의 문제만은 아니니까요.
살색 크레파스, 누구의 살색이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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