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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한겨레신문-책읽어주는엄마

글씨 읽기, 글 읽기

by 오른발왼발 2021.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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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2. 15.

 

글씨 읽기, 글 읽기


내가 알고 있는 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처음 본 건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그 아이는 책읽기가 서툰 편이었다.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소리를 내서 읽는 것도 익숙지 않았다. 굉장히 더듬거렸고 읽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눠보면 아이는 그 누구보다 이야기를 잘 했다.
이렇게 6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순간, 아이의 책 읽는 게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눈에 띈 건 책을 큰 소리로 자연스럽게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대화글에서는 인물의 감정까지 넣어가며 읽기 시작했다. 내용을 제대로 잘 이해하고 있는 건 물론이고 책이 재미있어서 집에서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고 했다.
나는 궁금했다. 아이가 이렇게 변화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 원인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아이의 달라진 모습을 칭찬해주자 아이 스스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새 책을 볼 때요, 우리 엄마가요,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줘요. 그리고 제가 혼자 읽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나는 무릎을 쳤다. 역시 엄마가 직접 책을 읽어주는 게 이렇게 효과가 있구나 싶었다. 글씨를 읽어내는데 얽매이던 아이가 엄마가 책을 읽어주는 덕분에 이야기를 이해하고 부담없이 책을 보게 됐구나 싶었다.
몇 달인가 지나서 아이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때 나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아이가 한글을 너무 일찍 깨쳤다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손주가 글씨를 읽는 게 너무나 반가워서 자꾸자꾸 글씨를 읽어보게 했고, 그러면서 아이는 책을 볼 때 글씨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안 갖게 되었다고 했다.
“글씨를 너무 빨리 깨친 게 문제였죠. 그래서 앞으로도 그냥 책을 쭉 읽어주려고요. 아이도 좋아하고요.”
아이가 글씨를 깨쳤다고 이제 책을 혼자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부모님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글씨를 읽는다는 건 글을 읽는 것과 분명 다른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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