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것 셋, 아니면 긴 것 하나?"
"긴 것 하나!"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면 6살짜리 딸아이와의 사이에서 늘 오가는 말이다. 잠자리에서 아내가 책을 읽어주었는데 저녁이 되면 목이 많이 잠겨서 얼마전부터 내 차지가 되고 말았다.
짧은 것은 글이 적고 쪽수가 얼마 안되는 그림책이고, 긴 것은 글이 많고 쪽수도 많은 그림책을 말하는 것이다. 밤마다 한아름 책을 가져와 다 읽어달라고 하는 아이와 나름대로의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사실 짧은 책으로 3권을 얼른 읽고 잤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인데, 이런 내 의도를 간파했는지 아이는 언제나 긴 것만을 고집한다.
오늘도 영락없이 그 책만 아니면 좋겠는데 하는 책을 들고 온다. '핀두스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이 시리즈는 그림책 치고는 글이 워낙 많아서 잠자리에서 읽어주기에는 만만치않은데, 요 몇 달 사이에는 계속이다.
핀두스 시리즈는 모두 다섯 권인데 그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책이 《아주 특별한 생일 케이크》다. 이 책에서 핀두스는 생일이 일년에 세 번이라고 나온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생일이 한 번인 것 보다는 세 번인 게 훨씬 더 재미있기 때문이란다. 아이에게 이처럼 매력적인 말이 또 있을까! 생일이 일 년에 세 번이라니! 가끔 책을 보지 않을 때도 '나도 생일이 세 번이었으면 좋겠어' 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면 아이는 무척 부러워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생일이 세 번이나 되는 핀두스 이야기에 빠진 아이는 결국 그 긴 이야기를 통째로 다 외어버린 듯하다.
언제부턴가 잠자리에서 《아주 특별한 생일 케이크》를 읽기 시작하면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되고 한다. 그 모습이 재미나서 늘 내심 짧은 책을 바랬던 마음을 훌훌 털고 《아주 특별한 생일 케이크》를 읽기 시작한다.
책을 펼치면, 딸아이는 주인공 꼬마 고양이 핀두스가 되고, 나는 핀두스와 같이 사는 마음씨 좋은 페테르손 할아버지가 된다. 물론 옆집 사는 고약한 영감 구스타프손은 아내의 몫이다.
책 읽기가 시작되면, 아이는 숨을 죽이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다가 핀두스의 대사를 자기가 직접한다.
"핀두스, 네가 케이크 반죽을 먹었니?" 하면 "저는 케이크 반죽을 먹은 적 없는데요!"하고 소리를 높이고,
"핀두스, 네가 자전거 뒷바퀴에 구멍을 냈니?" 하면 "아니요, 저는 자전거 뒷바퀴에 구멍을 낸 적이 없는데요!" 하면서 아주 펄펄 뛴다.
이 대목은 아이가 유난히 좋아하는 부분이다. 핀두스 시리즈는 이렇게 어린 핀두스가 페테르손 할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부분이 반복해서 나오는 게 특징이다. 친구처럼 지내면서도 또 한편으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먼저 핀두스를 의심(!)하는 듯하는 페테르손 할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어른들의 모습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럴 때 핀두스는 당당하게 "아니요." "그건 할아버지가 ~ 하셨잖아요?" 하며 대답을 하고, 결국 핀두스의 말이 맞는 걸로 판명이 되는데 아마 이런 모습에 쾌감을 느끼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좀 더 읽다보면, 핀두스가 꼬리에 알록달록한 커튼을 묶고 황소를 유인하기 위해 달려가는 장면이 있다. 이 대목을 읽을 즈음해서는 아이는 어느새 아내의 스카프를 찾아다가 묶고서 꼬리에 커튼을 묶은 핀두스가 되어 있다. 그리고 황소를 유인하러 핀두스가 뛰기 시작하면 아이도 자기도 뛰기 시작한다. 침대 위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며 온 방안을 정신없이 뛴다. 그러다 핀두스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씩씩거리며 돌아오는 장면에선 어김없이 아이도 씩씩거리며 다시 옆에 와서 앉아 있다. 저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책을 빨리 읽든 천천히 읽든 아이는 그 대목에선 어김없이 정확하게 자리로 돌아온다. 그 절묘한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책의 막바지에는 아내의 몫인 구스타프손이 나온다. 그런데 아내는 대개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선잠이 들고 만다. 하지만 아내도 결코 피해가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를 흔들며 말한다.
"엄마, 구스타프손 차례야! 빨래 해."
결국 아내는 아이의 성화에 못이겨 몇 마디 안되는 대사를 몇 번이나 물어보면서 겨우 마친다.
책읽기가 끝나면 아이는 불을 끄고 아내 품속으로 달려든다.
"이번엔 옛날 이야기!"
오늘도 마지막은 엄마의 옛날이야기다.
"무슨 이야기 해줄까?"
"반쪽이."
하지만 앞서 아이와 책을 읽는 동안 졸음이 몰려온데다, 옛날 이야기를 늘 눈을 감고 잠자리 이야기로 들려주던 습관이 있던 아내는 아이보다 먼저 잠에 빠져 비몽사몽간에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아이에게 간혹 항의를 받기도 한다.
"반쪽이가 호랑이를 ... 소금 주세요! 소금 주세요"
"엄마, 근데 반쪽이가.... 왜 그러냐고?"
"어, 그게 아니고 반쪽이가 호랑이를 다 잡아서.."
"....."
이렇게 깜빡 깜빡하면서 우리 세 식구는 하루를 마감한다.이렇게 깜빡 깜빡하면서 우리 세 식구는 하루를 마감한다.
이 글은 한솔교육 웹진 2004년 03+04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은 남편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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