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를 위한 그림책
아이를 키우며 보면 좋은 책
《에드와르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존 버닝햄 글, 그림/비룡소)
VS
《내 이름은 자가주》(퀜틴 블레이크 글, 그림/마루벌)
“넌 정말 왜 그렇게 버릇이 없니?”“빨리 안 씻을래? 넌 왜 이렇게 지저분하니?”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런 말 한 두번쯤 안 해본 부모는 없을 것이다. 처음엔 정말 사랑스럽기만 했던 아이지만 자라면서 점점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하나씩 고개를 들고 나타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잦아지고, 강도도 세지고 만다. 방학이라도 하면 아이와 엄마는 극으로 치닫게 된다. 엄마는 아이가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 같고, 그래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말을 해주지만 아이는 엄마 말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오히려 엄마가 말을 하면 할수록 자주, 아이는 말을 듣기는 커녕 반대로 나갈 때가 많다.
엄마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참으려고 노력을 해보지만 엄마도 사람인지라 아이랑 부딪칠 때마다 감정이 상하기 마련이다. 이러다 보면 결국 아이와 한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어느 집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엄마 입장에선 ‘자식이 아니라 웬수(!)’가 되는 일도 벌어진다.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때로는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인데, 이를 몰라주는 아이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부모로서 엄마의 입장이다. 그러니 아이의 입장 역시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무래도 자식 이야기에는 감정이 앞서니 말이다. 이럴 땐 책 속의 아이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다. 한발 물러서서 아이와 부모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와르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는 가히 ‘어린이들의 대변인’이라 할 만한 존 버닝햄의 작품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에드와르도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꼬마야.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입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서 장난치며 놀다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곤 했지.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 라는 제목과는 달리 그냥 우리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아이의 모습 그대로다. 존 버닝햄은 이처럼 평범했던 에드와르도가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건을 발로 걷어차기, 시끄럽게 떠들기, 어린아이들을 못살게 굴기, 동물들 괴롭히기, 방을 엉망으로 만들기, 세수하고 이 닦는 걸 까먹기! 에드와르도가 어른들에게 적발(!)된 문제들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에드와르도의 이 못된 행동 한 두가지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늘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적어도 가끔은 말이다. 에드와르도가 늘 그랬는지 어쩌다 그랬는지는 몰라도 에드와르도의 이런 문제를 적발해 낸 어른들은 에드와르도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세상에서 가장 버릇없는 녀석,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녀석, 세상에서 가장 심술궃은 녀석,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녀석, 세상에서 가장 뒤죽박죽 엉망인 녀석이라고. 문제는 어른들이 이렇게 말할 때마다 에드와르도의 상황은 더욱더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세상에서 제일가는 말썽쟁이로 낙인 찍히고 만다.
하지만 과연 에드와르도가 어른들의 말처럼 그렇게 구제불능의 말썽쟁이기만 할까? 존 버닝햄은 이번엔 앞서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전혀 다르게, 아주 착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바로 앞서와는 다른, 에드와르도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 때문이다.
어느 날 에드와르도가 화분을 발로 차자 화분은 흙 위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어른은 에드와르도에게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냐며 다른 식물들도 더 심어보라고 말한다. 에드와르도는 식물 기르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사람들이 에드와르도에게 자기들 정원도 손봐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말이다. 또 하루는 개를 기다리다 냅다 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개 주인은 야단은 커녕 지저분한 우리 개를 씻겨 줘서 고맙다고 칭찬을 한다.
앞서의 상황이 별로 나쁜 의도 없이 한 행동들이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으면서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별로 좋은 의도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우연히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어른들의 칭찬을 받게 되고 그때마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변해가는 셈이다. 결국 에드와르도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말썽쟁이로 만드는 것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로 만드는 것도 다 어른들이 아이를 어떻게 대하느냐,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건 에드와르도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때때로 어수선하고, 사납고, 지저분하고, 방도 어지럽히고, 눈치 없이 굴고, 시끄럽게 떠들고, 못되게 굴고, 버릇없이 굴기도 한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상황은 여전히 이야기의 처음 상태 그대로다. 이는 아이와 부딪치는 문제는 적어도 아이가 독립을 하기 전까지는 늘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때마다 아이에게 윽박지르기 보다는 아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 책을 떠올리는 건 어떨까?
이렇게 말하면 ‘말은 맞지. 하지만 현실은 달라! 어떻게 늘 그렇게 대할 수가 있어?’하고 푸념을 하실 분도 계실 것이다. 그만큼 아이를 키운다는 건 힘든 일이니까. 이럴 땐 《내 이름은 자가주》를 보고 기분을 전환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아주 행복한 생활을 하던 한 부부의 생활 속에 자가주라는 아이가 끼어들면서(?) 겪는 희노애락을 익살스럽게 보여준다.
처음엔 사랑스럽기만 했던 자가주는 어느 날 커다란 새끼 대머리독수리로 변해 끔찍한 소리로 울어댄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자가주는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며 말썽을 부려댄다. 새끼 코끼리로 변해 살림을 망가트리다가, 멧돼지로 변해서 온 집안을 흙투성이로 만들고, 아주 못된 새끼 용으로 변해 여기 저기 불을 붙이고, 박쥐로 변하기도 한다. 자가주의 모습이 얼마나 정신없이 변하는지 엄마는 ‘뭐든지 하나로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변한 뒤, 어느 날 자가주는 이상하고 낯선 털북숭이로 변해 있었다. 이번에 여러 가지로 바뀌는 대신 날마다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덥수룩해졌고, 점점 더 이상해져 갔다. 그 끔찍한 모습에 엄마 아빠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를 걱정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만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모습으로 머무는 건 아니다. 어느 날 아침, 드디어 자가주는 예의 바르고 말끔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말썽을 피우는 모습을 시시콜콜 설명하는 대신 천방지축 말썽을 부리는 모습을 새끼 대머리 독수리, 새끼 코끼리, 멧돼지, 못된 새끼 용, 박쥐의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 모습에 ‘맞아. 맞아!’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더불어 자가주가 변할 때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하며 골머리를 썩는 엄마 아빠의 모습은 그림만으로도 그 심정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게다가 더 이상 이렇게 정신없이 변하지 않기를 바랄 때쯤이면 이상하고 낯선 털복숭이의 모습으로 쑥쑥 자라면서 엄마 아빠를 불안에 떨게 한다. 차라리 다시 코끼리나 멧돼지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할만큼 말이다. 이처럼 불안한 청소년기를 지나고 나서야 자가주는 다시 아기 때처럼 사람다운 모습으로 깔끔한 청년이 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엔 놀랄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말끔한 청년이 된 자가주는 곧 예쁜 아가씨와 친해져 결혼을 하려고 부모님을 찾아가는데……. 이번엔 엄마 아빠가 커다란 갈색 펠리컨으로 변해 있었다! 펠리컨이 된 엄마 아빠는 자가주의 이야기를 듣고는 부리를 딱딱거리며 좋아한다.
특이한 건 앞서 자가주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할 때마다 엄마 아빠의 표정이 난감해지곤 했는데, 펠리컨이 된 엄마 아빠를 바라보는 자가주와 여자 친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엔 엄마 아빠와 자가주, 여자 친구, 이렇게 넷이 어깨를 걸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인생은 정말 굉장하다니까요!’라는 마지막 글귀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키우며 지지고볶는 파란만장한 우리네 인생이 정말이지 굉장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자가주가 여러 가지 동물로 변해가면서 온갖 말썽을 피우는 모습이나 그런 자가주를 보며 난감해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자가주가 말끔한 청년이 되어 나타날 때쯤이면 ‘그래, 이게 자식 키우는 맛이지’ 싶어지고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엄마 아빠가 펠리컨으로 변해버린 건 왜일까? 앞에서 자가주가 계속 여러 동물들로 변했기 때문에 엄마 아빠의 변신 또한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가주가 동물로 변할 때 그 동물의 특성과 자가주의 말썽이 관련이 있었다는 점에서 펠리컨의 존재 또한 궁금해진다. 짧은 지식으로 그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프랑스의 시인 알프레드 뮈세의 ‘오월의 밤’이라는 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시에서 어미 새 펠리컨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 새들을 해변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러 떠나지만 한 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와서는 굶주린 새끼들을 위해서 자신의 심장과 내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는다. 어미새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새끼들을 살려내는 것이다. 진짜 펠리컨의 습성이 이런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시 속의 어미 펠리컨의 모습이 펠리컨으로 변해버린 자가주의 엄마 아빠 모습과 겹쳐지는 건 사실이다. 이제 자가주도 다 자라서 어엿하게 결혼을 하게 됐지만, 그래서 어느 정도 한숨을 놓았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자식이 필요할 때면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부모니까 말이다.
《에드와르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 《내 이름은 자가주》. 이 책들을 볼 때 그림도 집중을 해서 봐줬으면 싶은 마음이 든다. 사실 이런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두 작품은 그림 하나하나에 눈길이 가게끔 하는데, 이는 바탕을 흰색으로 남겨두고 아이와 어른, 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물건들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의 시선은 그림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금 아이와 어른의 관계가 어떤 상황인지, 아이와 어른이 어떤 심정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어, 평범해 보이기만 하던 에드와르도는 어른들이 윽박지를 때마다 점점 지저분하고 괴상망칙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나중에 칭찬을 받게 되었을 때는 반대로 점점 의젓해지고 깔끔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말이다. 이렇듯 그림만으로도 에드와르도가 처해 있는 상황과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에드와르도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말썽쟁이’가 되었을 때와 마지막 장면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었을 때를 견줘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퀜틴 블레이크의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동물들로 변한 자가주가 집안에서 말썽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구체적인 말이 없어도 누구나 그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그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엄마 아빠의 심정까지도.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자라면서 말썽만 피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존 버닝햄과 퀜틴 블레이크 두 사람 모두 영국 출신의 작가이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그림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아이들이 이렇게 말썽을 부리는 것이 이 아이들이 특별나서가 아니라 누구나 똑같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다.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면 이 두 책을 보면 좋을 듯 싶다. 그럼 마음도 풀리고 아이랑 관계도 좀 좋아지지 않을까!
이 글은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독서교육> 2007년 봄호 통권 2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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