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를 위한 그림책
마음이 배고파 질 때면……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쿠어트 바우만 글/스타시스 에이드리게리치우스 그림/마루벌/절판)
VS
《벤의 트럼펫》(레이첼 이사도라 글, 그림/비룡소/절판)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계속 고파 엄청나게 먹는 때가 있다. 속이 허할 때, 화가 날 때, 혹은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을 때 생기는 일이다. 먹을 것 대신 술로 대신 하기도 한다. 한참 정신없이 먹고 마시다 보면 조금은 기분이 풀리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왜 이랬나?’하는 자책감이 들기 마련이다. 그럼 다시 자괴감이 밀려온다. 그러다 뭔가 계기가 생기면 또 다시 폭식과 과음으로 이어지고 만다.
때로는 아무리 먹고 마셔도 답답한 속이 풀리지 않기도 한다. 그만큼 속에 맺힌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럴 땐 폭식이나 과음이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멈추고 싶어 하면서도, 멈추기는 쉽지 않다. 이를 대신해 줄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은 사실 그리 편한 책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이야기나 그림은 모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이 방앗간 주인의 밭 농작물을 몽땅 먹어치우고, 자기가 살던 숲도 먹어치우고, 방앗간 집 딸에게 청혼을 하지만 문 밖으로 내던져진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나타나 이들을 먹어치우고, 방앗간과 농장을 먹어치우고, 감옥에 갇혀서는 쇠사슬도 먹어치우고, 결국 간수들마저 잡아먹는다. 상당히 불편하고 고약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오른쪽 면에 이어지는 그림에는 아주 그로테스크한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가만 보면 손이나 옷은 그림이 아니다. 즉 한 사람이 계속 가면을 바꿔 쓰고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림책만의 장면 구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다른 분위기의 바탕을 배경으로,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고 있는 모습이다. 그 외에는 텍스트가 있는 왼쪽 면의 아래에 그려있는 작은 목탄화 정도다.
그런데 불편해서 금방이라도 덮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도 덮고 나면 자꾸자꾸 생각이 나게 한다. 이는 아무래도 불편한 이야기 속에 우리의 모습이, 우리 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사람이 있었어.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
그래서 밭에 있는 농작물을 몽땅 먹어치웠어.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고, 그래서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사람. 작가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이 왜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고, 기운이 하나도 없을지는 어렴풋이나마 짐작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이 허해서, 화가 나서, 스트레스가 쌓여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도록 뭔가를 먹고 싶거나 실제로 먹게 되는 상황 말이다.
이런 상황의 밑바탕에는 자기 상실감이 깔려 있다. 자기 상실감의 원인은 각자 살아온 삶에 따라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공감하게 되는 건 이런 자기 상실감이 왔을 때의 상황이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각자 자신이 겪은 자기 상실감과 쉽게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적인 자기 상실감에 관한 이야기로 한정할 수만은 없다. 여기에는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 말고도 등장하는 사람이 몇 있는데, 그 가운데 중심은 방앗간 주인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이 먹은 농작물은 바로 방앗간 주인 것이었고, 방앗간 집 딸에게 청혼도 한다. 결혼을 반대하는 방앗간 주인에게 배고픈 사람은 말한다.
“저기요, 방앗간 주인님.
오랫동안 난 혼자서 살았어요.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과 사랑을
조금도 받지 못했어요.
아내라면 그걸 베풀 수 있겠죠.
허전해서 자꾸 먹어대는 겁니다.
세상 여기 저기 널린 것을 다 내 뱃속에 넣는 거예요.”
하지만 배고픈 사람은 이 말을 마친 뒤 문 밖으로 내던져지고 만다. 그리고 칠년 뒤 다시 나타나 방앗간 집 주인과 딸을 먹어치우는 것을 시작으로 엽기적인 폭력을 저지른다. 만약 배고픈 사람이 방앗간 주인에게 진심으로 말했을 때 방앗간 주인이 이를 받아들여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본다.
문득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었던 조승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혹시 조승희의 처지도 배고픈 사람의 처지와 같은 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우리는 때때로 배고픈 사람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방앗간 주인처럼 누군가 도움을 요청할 때 여러 가지 핑계를 빌미로 이를 외면하기도 하는 양면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이 불편했던 건 이처럼 우리 자신이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굳이 한 사람에게 여러 가면을 쓰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일 테고 말이다.
다시 책을 처음부터 펼쳐보니 배고픈 사람이 변해가는 모습이 들어온다. 초점을 잃은 듯 공허한 눈빛은 한결같지만 얼굴은 점점 마르고 흉측해진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는 파란 바탕을 배경으로 자연을 상징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제야 괴기스러움은 사라지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어디론가 사라져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던 배고픈 사람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서야 행복을 찾은 걸까?
《벤의 트럼펫》은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과는 반대로 그냥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수 있는 책이다. ‘재즈 시대’라고 불린 1920년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흑백 그림책이다.
저녁이면 벤은 비상계단에 앉아 지그재그 재즈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지그재그 재즈 클럽에 들러 연주자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본다. 피아니스트, 색소폰 연주자, 트럼본 연주자, 드러머, 트럼펫 연주자. 아마도 어린 벤에게 이들은 우상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벤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트럼펫 연주자다. 벤은 날마다 재즈를 듣고, 재즈 리듬에 맞춰 몸을 들썩인다. 그리고 비록 빈손이지만 손으로 트럼펫 연주를 하는 시늉을 한다. 마치 자신이 진짜 트럼펫 연주자인 듯 언제 어디서나. 엄마와 할머니, 동생에게도 연주를 해 주고, 아빠와 아빠 친구들을 위해서도 연주하고, 그냥 집 앞 계단에 앉아 있을 때도 트럼펫을 분다. 누가 자신의 연주를 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재즈가 좋아서, 트럼펫이 좋아서 연주를 한다. 실제로 벤이 트럼펫을 연주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엄마, 할머니, 동생, 아빠, 그리고 아빠 친구들 모두 벤의 트럼펫 연주와 상관없이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벤은 이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연주에 몰두한다. 벤에게 트럼펫 연주는 단순한 시늉이 아니라 진짜 연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벤이 트럼펫을 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지나가며 말한다.
“멋진 트럼펫이구나.”
바로 지그재그 재즈 클럽의 트럼펫 연주자였다! 이 말을 들은 벤의 기분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아마 이 지그재그 재즈 클럽의 트럼펫 연주자는 트럼펫에 몰두하고 있는 벤의 모습에서 꿈과 희망을, 트럼펫에 대한 열정을, 트럼펫에 빠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기분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다음 날, 클럽에 들러 트럼펫을 부는 벤을 보고 사탕가게 앞에 있던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말한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트럼펫이 어디 있다고 그래?”
단 하루 만에 벤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벤은 집 앞 계단에 앉아 지그재그 재즈 클럽의 반짝이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잠깐 쉬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트럼펫 연주자가 벤을 보고 다가와 묻는다.
“네 트럼펫은 어디 갔니?”
“트럼펫 같은 거 없어요.”
이 말만으로 트럼펫 연주자는 벤의 상황을 눈치 챈다. 벤이 날마다 재즈와 트럼펫에 빠져 지그재그 재즈 클럽을 눈여겨봤던 것처럼 트럼펫 연주자도 벤을 눈여겨봤던 게 틀림없다. 트럼펫 연주자는 벤에게 멋진 선물을 한다. 벤의 손에 진짜 트럼펫을 들려주는 것이다.
정말 멋진 장면이다. 벤의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벤과 트럼펫 연주자 두 사람 모두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어진다.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을 열망하던 벤의 모습이나 이런 벤을 관심 있게 지켜보다 이를 실현시킬 수 있게 도와준 트럼펫 연주자. 이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지는 이유다.
게다가 이 책은 그림책만의 볼거리도 아주 풍부하다. 일단 눈에 띄는 건 날카로운 직선들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면지에서 속표지까지 가득 메운 지그재그 모양이다.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혹은 하얀 바탕에 검은색으로 채워져 있다. 색에 따라, 또 지그재그 모양의 변화에 따라 느낌이 참 다르다. 지그재그는 재즈를 연주하는 트럼펫의 선율이다. 이렇게 선만으로 트럼펫 소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재즈 클럽 이름도 지그재그였다.
또 단순한 직선은 대담한 화면 분할로, 또 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상처와 상실감을 표현하는데 쓰였다. 같은 직선이지만 때로는 멋진 트럼펫의 선율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재즈 연주자들의 모습은 윤곽만으로 그리기도 했지만, 연주자별로 그 연주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해 보여주기도 하는데 단순한 윤곽은 연주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고, 연주 장면을 클로즈업한 모습 속에는 온힘을 다해 연주하는 그들의 열정이 느껴진다. 눈여겨 볼 점은 연주자들을 하나하나 클로즈업해서 보여줄 때도 트럼펫 연주자의 얼굴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트럼펫 연주자는 마치 검은 바탕에 흰색 그림자 모양으로 보여준다. 대신 연주할 때의 다양한 포즈를 연속해서 보여주는데, 그 모습에서 재즈의 선율이 느껴진다. 벤에게 말을 걸고 갈 때도 춤추듯 걸어가는 뒷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트럼펫 연주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벤이 시름에 잠겨 앉아 있을 때다. 비스듬하게 모자를 쓰고 다가와 클럽으로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벤에게 진짜 트럼펫을 가르쳐주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벤이 충분히 꿈과 희망을 갖고 있을 땐 지켜보고 있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이 떠오른다. 배고픈 사람도 트럼펫 연주자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반대로 벤이 트럼펫 연주자 대신 방앗간 주인과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또 달라졌을 테고 말이다.
배고픈 사람과 벤의 모습이, 방앗간 주인과 트럼펫 연주자가 자꾸 엇갈려 나타난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떤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이 글은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독서교육> 2007년 가을호 통권 2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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