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를 위한 그림책
새로운 세상의 길을 찾아
《자유의 길》(줄리어스 레스터 글/로드 브라운 그림/낮은산)
VS
《엄마가 수놓은 길》(제클린 우드슨 글/허드슨 탤봇 그림/웅진주니어/절판)
인생을 살아가는 길은 선택의 연속이다. 이쪽 길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저쪽 길을 선택할 것인가. 누군가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결국 최종 결정은 자신의 몫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느 길을 선택하건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 길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좋은 것만, 예쁜 것만, 희망이 있는 것만 골라서 보여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최선은 아니다. 때로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도 보여줘야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길이 아닐까?
여기 두 권의 책이 있다. 두 권 모두 흑인 노예의 삶을 다룬 책이다. 자유를 찾아 몇 대에 걸쳐 험난한 길을 가야 했던 흑인 노예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인간이란 이름으로 이런 잔인한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 참혹함에 애써 눈길을 돌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애써 눈길을 돌린다고, 아이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있었던 사실이 사라지고, 우리한테 있는 부조리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 두 권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다.
《자유의 길》은 바다에 내던져진 흑인들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노예선에서 병들거나 죽었기 때문이다. 노예 상인들에게 노예란 물건과 똑같았기 때문에 병들거나 죽은 사람은 마치 쓸모 없어진 물건 마냥 바다에 던져진 것이다. 다음 그림은 더욱 끔찍하다. 판자로 만든 선반 같은 곳에 채곡채곡 들어차 있는 발바닥, 그리고 머리. 발과 머리는 모두 쇠사슬에 묶여 있다. 판자 사이의 간격은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다고 해도 몸을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 높이다. 볼 일도 누운 채로 보아야만 했다. 몇 층이나 쌓인 판자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똥오줌이 흘러내렸다.
‘설마? 믿을 수 없어!’ 혹은 ‘이건 아주 아주 옛날, 그것도 우리와는 상관없는 나라의 일이잫아?’ 하고 애써 눈감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마음을 눈치챈 듯이 독자들을 향해 제안을 한다. 상상해 보라고. 상상한다는 것은 과거에 살과 피와 영혼을 불어넣는 일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고. 그러니 아프리카 사람이 느꼈을 감정을 상상해 보라고.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아프리가 사람이 되어 생각해 보라고.
아프리카 흑인이 되는 상상은 그들의 분노를 상상하고, 그 사람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작가는 흑인들에게도 솔직해지자고 외친다. 노예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또 무자비하게 매를 맞아 목숨을 잃는 노예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과 함께 때리는 사람이 되어 보라고도 한다.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말이다. 자기는 그렇게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누군가를 때렸는데도 다른 사람이 칭찬하고 잘한 일이라고 한다면, 귀신이 사람을 홀리듯 나쁜 짓도 사람을 홀리게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상상해 보니 이 일이 지금 우리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이렇게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노예로 팔려가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불안과 분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불안과 분노는 내 경험 속의 불안과 분노로 치환되기도 했다. 또 이들이 노예의 후손이라는 걸 부끄러워했듯이 나 역시 이런 저런 이유로 전혀 부끄러울 것 없는 것들을 괜히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외면하고 싶어했던 적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됐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악함이 전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자신 또한 없어진다. 어쩐지 작가는 독자에게 단순히 그 시대를 떠올릴 수 있는 상상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또한 단순히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역사책이 아니라 제목에서 말하듯 진정한 ‘자유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불편하기만 한 게 아니라 참 어렵다. 담고 있는 내용도 어렵지만 읽어내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글은 흑인 노예들의 삶을 ‘시’처럼 함축적으로 내뱉기도 하고, 한편으론 노예선에 실려갈 때부터 시작해 노예 시장에서 팔려나가고, 그 가운데 도망을 칠 수밖에 상황에 놓이는 노예들의 삶에 대해 말해준다. 그러면서 때로는 화자의 이야기가 끼어들기도 하고, 또 독자에게 상황을 상상하도록 독려하면서 노예 제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노예들은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도망치는 노예에게 의지할 건 오로지 북극성뿐. 자유를 찾아 나서는 일은 무모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잡히면 어떡하지?
도망치다가 다치거나 죽으면 어떡하지?
먹는 건 어떡하지?
자유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 다음엔?
어디서 살지? 어떻게 살아가지?
이런 두려움은 자유를 찾아 나서는 노예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두려움은 있다. 때문에 자유를 조금 저당 잡히는 한이 있어도 괜히 두려운 일을 겪고 싶어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두려움을 이겨 내려면 두려워하는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자유, 자신과 자신이 살아온 시간에 책임을 지는 일.
자유, 자신을 인정하는 일.
자유,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일.
자유, 어떻게 지켜 가야 할지 지금도 배워야 하는 일.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들이 간절히 바랬던 자유는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와 하나인 셈이다.
이 책은 보통의 그림책과는 달리 그림이 먼저 있었고, 그 그림에 글을 붙였다. 그림을 그린 로드 브라운은 ‘노예’를 주제로 7년 동안 서른여섯 점의 그림을 그려 뉴욕과 워싱턴에서 전시를 했다고 한다. 그의 사실적이고 강렬한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백 마디 글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글을 쓴 줄리어스 레스터는 이미 노예의 삶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썼음에도 로드 브라운의 그림을 보고 아직도 더 써야 할 게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그림이 지닌 본질에 깊이 있게 다가서는 글, 즉 미국 노예의 삶과 그들 조상의 삶이 정면으로 만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 먹는다. 이 책은 이렇게 탄생했다.
《엄마가 수놓은 길》에는 8대에 걸친 미국 흑인 가정의 가족사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가족사는 한편으론 미국에서 흑인 노예의 역사이기도 하다. 무려 8대에 걸친 긴 세월을 하나로 이어주는 건 조각보다. 조각보는 단순한 조각보가 아니다. 조각보 속에 수놓아 있는 별과 달과 길은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갈 수 있는 길잡이인 비밀 지도이기도 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흑인 노예들에게 조각보 속에 담긴 비밀 지도는 아주 소중한 존재다.
조각보로 연결된 가족사는 수니의 증조할머니가 일곱 살이란 어린 나이로 엄마 아빠랑 헤어져 혼자 팔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8대의 이야기면서도 그 중심에 ‘수니’가 있는 건 수니가 8대의 중간이기도 하지만 노예 해방과 함께 태어난 수니의 엄마 이름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수니의 딸인 조지아나, 조지아나의 쌍둥이 딸인 캐롤라인과 앤, 앤의 딸인 이 책의 화자인 ‘나’, ‘나’의 아기 토쉬 조지아나로 이어진다.
수니의 증조할머니의 엄마, 즉 고조할머니 역시 노예였지만 이야기가 수니의 증조할머니부터 시작하는 건 조각보로 이어진 가족사가 여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수니의 증조할머니는 팔려가면서 조각보의 재료 - 엄마가 준 헝겊 조각 하나와 주인집에서 얻은 바늘 두 개, 산벚나무 열매로 밝게 물들인 붉은 색실 - 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팔려간 그곳에서 노예 아이들을 보살피는 왕 할머니로부터 색실로 달과 별과 길을 수놓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밤이면 자유를 찾아 달아난 노예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증조할머니의 조각보 만들기는 딸 마티스 메이에게로 이어진다. 마티스 메이는 엄마한테 바느질을 배웠고, 엄마처럼 일곱 살 때 먼 곳으로 팔려가며 엄마의 조각보 조각을 가져간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마티스 메이는 주인 집 식구들의 옷은 물론 노예들의 옷까지 도맡아 만든다. 물론 밤이면 엄마가 만들었던 것처럼 달과 별과 길이 수놓아있는 조각보 비밀지도를 만들곤 했다. 노예들은 조각보 조각을 얻기 위해 찾아와서는 야밤을 틈타 사라지기도 했다.
마티스 메이와 결혼한 청년은 남북 전쟁 때 북쪽으로 달아나다가 목숨을 잃었고, 수니의 엄마는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다. 이렇듯 수니는 증조할머니가 살았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에겐 자유가 생겼다. 하지만 조각보 만들기는 계속되었다. 조각보는 여전히 ‘북쪽으로 가는 길’, ‘조각보 비밀 지도’라 불렸다. 비밀 지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지만 조각보는 살아가기 위해서, 또 기억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기억하기 위해서!
그들이 기억해야 할 건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이들의 투쟁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함을 뜻할 것이다. 비록 노예 해방은 됐지만 이들의 진정한 자유를 가로막는 것들이 도처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수니의 손녀인 쌍둥이 캐롤라인과 앤은 일곱 살 때 흑인과 백인을 따로 살게 만든 법을 바꾸기 위해 사람들과 줄을 서서 걷는다. 수니 할머니가 준 조각보 조각을 핀으로 옷 속에 꽂고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를 얻었다. 조각보란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찾아나가기 위한 든든한 안내자였던 것이다.
하나 하나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드는 조각보처럼 8대의 이야기도 이렇게 이어진다. 그림 역시 마치 조각보처럼 조각조각 나뉘어서 그 속에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유의 길》 그리고 《엄마가 수놓은 길》은 모두 진정한 자유를 찾아나가는 길이다. 두 책은 똑같이 흑인 노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접근하는 방식은 조금 차이가 있다. 《자유의 길》이 직접적인 ‘나’의 문제로 이어지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면, 《엄마가 수놓은 길》은 나와 더불어 아이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건 딸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각별한 관계 때문이다. 엄마에게 딸만 있었을 리 만무하다. 딸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관계가 부각되는 건 조각보라는 소재의 특성 때문일 테고, 아들에게는 조각보가 아닌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조각보가 됐던 무엇이 됐던 아이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진실을 향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면 될 것이다.
자칫 아이를 힘들게 만들까 두렵다면 《자유의 길》의 한 대목을 다시 떠올리는 건 어떨까?
두려움을 이겨 내려면 두려워하는 그 일을 하는 길밖에 없어.
이 글은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독서교육> 2007년 겨을호 통권 2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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