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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그림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by 오른발왼발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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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노인경 글, 그림/문학동네/2022. 2. 23. 초판

 

 

 

 

임금님 귀가 변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임금 자리에 오른 뒤 귀가 당나귀처럼 커진 왕은 커진 귀를 감추기 위해 복두쟁이를 불러 귀를 감출 커다란 왕관을 만들어 쓴다. 그리고 복두쟁이에게는 자신의 귀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다짐을 받는다.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던 복두쟁이는 그만 병이 난다. 그리고 죽기 전 대나무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 외친다.

그 뒤부터 바람이 부는 날이면 그 대나무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고, 결국 모든 사람이 그 비밀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전하는 이 이야기는 신라 48대 경문왕의 귀에 얽힌 이야기다.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나라에도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미다스 왕의 귀 이야기로 등장한다. 미다스 왕도 모자로 당나귀 귀를 가리고 다녔다. 비밀을 아는 건 오직 이발사뿐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을 말하지 못해 답답했던 이발사는 땅에 구멍을 파고 말한 뒤, 그 구멍을 막는다. 하지만 구멍 속에서 갈대가 자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번져나가게 됐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의 에니세이 강변의 오소우네스 왕, 아일랜드 신화의 라브레이드 로잉서치 왕 이야기도 비슷하다. 왕은 커다란 귀를 감추려 하고, 그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결국에 우물 혹은 나무에 털어놓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그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임금님도 귀가 변한다.

 

 

임금님 귀는 왜 길어졌을까?

 

임금님들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로 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경문왕 이야기에서는 정확한 이유가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이야기에 따라서 경문왕은 자신의 비밀이 밝혀진 뒤 자신의 귀가 길어진 것은 백성들의 말을 잘 들으라는 뜻으로 알고 백성들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는 내용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미다스 왕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폴론과 판의 연주 대결에서 심판이 아폴론의 승리를 선언하자 미다스는 판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자 화가 난 아폴론이 화가 나서 미다스의 귀를 잡아당겨 길게 늘렸다고 한다. 앞으로는 잘 듣고 음악을 제대로 평가하라면서 말이다.

두 이야기가 조금 다르긴 해도 공통점이 있다. 귀가 커진 이유는 잘 들을 수 있게 하려고라는 것이다. 경문왕은 백성의 말을, 미다스 왕은 음악을.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떨까?

 

옛날옛날 어느 나라에서 왕들이 자꾸만 죽었습니다.

왕이 되면 머지 않아 목숨을 잃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444대 왕이 된다.

하지만 행복은 단 하루뿐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귀가 당나귀처럼 커졌기 때문이다.

이전 왕들의 일기를 꺼내 읽던 444대 왕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앞서 수없이 많은 왕들 역시 왕이 되자 모두 당나귀 귀가 되었고, 커다란 왕관으로 귀를 가렸다. 하지만 당나귀 귀는 무작정 가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커져버린 왕관이 문제가 되서 죽기도 했고, 마음의 병이 생겨 죽기도 했다.

444대 왕은 결심한다. 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로. 비밀이 없어지니 마음은 가벼워지고 아프던 곳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말이 잘 들렸다.

그러니 444대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을 테고, 모두가 행복했을 거다.

 

멋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야기를 이렇게 재해석해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내다니!

원래 이야기처럼 임금님 귀가 커진 까닭이 제대로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라는 의미는 잘 살아있으면서도, 이야기의 반전을 통해 빤한 이야기로 빠지는 대신 독자의 눈이 번쩍 떠지게 한다.

이야기는 간결하고, 반복을 적당히 사용함으로써 이야기의 긴장감과 재미를 높이고 있다. 그림 또한 단순하고 유쾌하다.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다양한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최근 본 그 어떤 책보다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그림책이라 여겨진다.

 

 

옛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말

 

옛이야기는 원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구술자의 입장도 들어가고, 시대의 흐름도 담기며 조금씩 변해간다. 하지만 현재는 구전의 전통이 끊어져 옛이야기들이 화석화된 채 책 속에 갇혀 있다.

따라서 비록 책을 통해서이긴 해도 옛이야기는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이야기의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듯이, 같은 이야기라도 다양한 해석이 담긴 옛이야기 책이 나와야 한다.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창작 활동도 꼭 필요하다. 옛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옛이야기는 살아있는 우리의 문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쩐지 우리의 정치 현실을 떠오르게 한다.

444대 왕은 이전 왕들의 일기를 보면서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가 된 이유를 눈치챘다. 왕이란 백성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하기에 귀가 커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전의 왕들은 자신이 당나귀 귀가 된 이유를 모르고 왕이라면 당연히 백성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한다. 그리고 귀를 가리기 위해 더 큰 왕관을 만들어 쓰고(권위로 백성들의 말을 누르려) 지내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명을 재촉하게 된다.

이전 왕들의 이런 모습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의 정치 현실이 떠오른다고 했지만, 굳이 정치 현실이 아니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숱한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너무 뻔하다고만 생각했던 이야기, 하지만 작가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과거에 갇혀 있던 이야기를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로 새롭게 재탄생시켜냈다.

 

임금님의 백성들의 말을 잘 듣게 되자 모두가 행복해졌다. 그 장면은 글 없이 팝업북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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