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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책/옛날이야기 공부방

연이와 버들도령

by 오른발왼발 202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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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계모 이야기와는 다르다

- 연이와 버들도령, 연이와 버들잎 소년, 연이와 반반버들 -

 

 

 

 

 

 

1. 다른 계모 이야기와 다른 점은……

 

연이와 버들도령이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대표적인 계모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다른 계모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모가 연이를 괴롭힌다는 점에서는 다른 이야기들과 비슷하지만, 계모가 버들도령을 죽이고 버들도령이 살던 곳을 불 지르는 것은 계모 이야기의 일반적인 유형이라 보기엔 아무래도 좀 낯설었다. 계모가 연이를 죽도록 미워했다면 <백설공주>의 왕비가 백설공주를 죽이려 했던 것처럼 연이를 죽이려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보면 볼수록 이 이야기 속에는 일반적인 계모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2. 생명의 기운이 담긴 계모,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 연이

 

이야기는 동지섣달 아이를 가진 계모가 연이에게 나물을 해오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생명과 죽음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계모는 몸 안에 생명을 가졌고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나물을 원한다. 하지만 연이는 가장 춥고 해가 가장 짧은 날 즉, 생명의 기운이 가장 떨어진 동지섣달에 홑옷을 입은 채 나물을 해와야 한다. 자연스럽게 연이의 모습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그런데 이 생명과 죽음의 모습은 분리되는 게 아니라 하나로 겹쳐진다.

동지섣달이란 빛과 어둠의 경계의 날이다. 생명의 기운은 땅속에 간직한 채 밖으로는 싸늘한 죽음의 모습만 내보이고 있던 식물들은 동지섣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땅속 생명의 기운을 밖으로 내놓기 시작한다. 즉 동지섣달은 죽음과 삶의 경계의 순간인 것이다.

 

한편 산을 헤매던 연이는 빛(온기)이 새어 나오는 돌문(바위)을 발견한다. 그리고 힘들게 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은 따뜻한 햇볕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곳의 주인 버들도령은 연이에게 나물을 주고, 다음에 오게 될 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주문도 알려준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던 연이에게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 찾아온 것이다.

 

3. 계모가 궁금하다!

 

계모는 생명의 기운을 안고 돌아온 연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즉 계모가 없애고 싶은 것은 연이가 아니라 연이가 품은 생명의 기운이다. 그래서 연이에게 생명의 기운을 가져다 준 버들도령을 처참하게 죽인다.

다른 계모 이야기와 다르다고 느낀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계모는 왜 연이가 아니라 연이가 품은 생명의 기운을 없애려 했을까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계모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다.

 

흔히 계모 이야기에서 계모는 진짜 계모가 아니라 아이들이 느끼는 친엄마의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느끼는 엄마의 부정적인 측면은 낯설음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에게 헌신적으로 잘 해줬던 엄마가 더이상 나를 그렇게 대해 주지 않으면 아이는 달라진 엄마가 낯설고 두려워진다. 즉 계모처럼 느끼게 된다

그래서 계모 이야기는 대개 계모가 죽는 것으로 끝난다. 아이는 성장을 하며 지금껏 알던 엄마의 모습 말고 계모의 모습을 한 것 역시 엄마의 모습임을 알게 된다. 이는 두 엄마의 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모에 대한 환상은 깨지고, 이것이 계모의 죽음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계모는 죽지 않는다. 이건 이 이야기에서 계모는 일반적인 계모의 상징과는 다르다는 뜻이지 않을까? 더구나 이 이야기에서 계모는 연이를 죽이기보다는 연이에게 생명의 기운을 가져다준 버들도령을 죽이는 존재다.

계모의 낯설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혹시 이 이야기에서 계모의 낯설음이 엄마의 낯설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낯설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춘기에 갑자기 내 안에 찾아온 낯설음 같이 말이다.

이렇게 보면 계모는 실은 연이 자신의 또 다른 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한 장면이 펼쳐진다.

 

계기가 뭐가 됐든 별다른 꿈도 없던 아이에게 뭔가 자신을 일깨우는 소망이 생겼다. 무언가 하고 싶다는. 하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형편은 되지 않는다. 집에서도 강하게 반대를 한다. 소망이 없을 때는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 수 있었지만, 강력한 소망을 품은 상황에서는 이를 이룰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그 아이의 삶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가 죽음의 문턱에서 괴로워하며 자신이 소망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소망은 아이에게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가서 직접 부딪쳐봐!”

소망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마지막 힘이 되기도 한다.

 

아이를 가진 계모는 생명의 기운이 담긴 나물을 해오라고 연이를 내쫓는다. 잔인하게만 보이는 이 상황이 실은 죽음이 드리워진 연이에게 자신의 소망을 찾아가라고 말하는 그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4. 돌문 안, 버들도령이 사는 곳의 정체

 

산을 헤매던 연이는 돌문을 발견하고 힘겹게 돌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간다.

돌문 혹은 바위에 들어간다는 것은 흔히 새로 태어남을 뜻한다. 바위 속은 자궁과 같이 외적인 요인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면서 자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위에 들어가 있는 기간은 아이가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간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아기 장수 우투리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드러나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연이도 힘들게 바위를 밀치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연이는 그곳에서 머물지 않는다. 나물을 한 소쿠리 얻어 나올 뿐이다.

이 역시 다른 이야기들과는 좀 다른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바위 속이 다시 태어남의 상징일 경우 주인공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깊이 침잠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이는 그렇지 않다. 당장에 숨통을 틔워줄 나물을 얻은 것에 만족하고 돌아간다. 물론 달라진 점도 있다. 처음엔 어렵게 열었던 돌문은 버들도령이 알려준 주문 덕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또 생명이 가득한 그곳에서 자신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어느 정도 거둬낼 수 있었다.

연이는 바위 속에서 자신의 소망을 맛보았지만 아직은 불안정해서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듯 싶다. 이쪽과 저쪽을 왔다갔다하는 건 연이의 갈등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물론 바위 속에서 버들도령을 만나면 만날수록 소망이 성취되는 맛을 점점 알아갔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위 속은 연이의 흔들리는 내면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이쪽과 저쪽을 계속 오가는 사이 연이의 마음 한편에는 불안이 쌓일 수도 한다. 애초에 자신의 소망은 금지된 것이었고, 자신이 품어서는 안 되는 소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두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두려움이 폭풍처럼 몰려오면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것을 짓밟아버리는 얼토당토 않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계모가 버들도령을 해치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5. 내 안의 생명을 일깨우는 건 바로

 

우리는 간혹 어떤 일을 마구 저질러 놓고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다.

 

연이는 버들도령의 죽음을 본 뒤에야 정신이 번쩍 든다. 버들도령을 다시 되살리는 건 자신이 짓밟았던 소망을 되살리는 길이다.

연이의 내면이라 할 수 있는 바위 속 버들도령의 집은 서천꽃밭과 닮았다. 동지섣달이 빛과 어둠의 경계의 날이듯, 서천꽃밭은 삶과 죽음의 세계가 교차하는 공간이다. 서천꽃밭은 죽음 세계의 일부지만 삶으로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엔 다양한 환생꽃들이 있다. 연이는 그 환생꽃으로 버들도령을 되살린다.

 

버리데기는 그토록 힘들게 갔던 멀고 먼 서천꽃밭이지만 연이는 제법 쉽게 서천꽃밭에 도달한 셈이다. 버리데기는 부모를 만나 살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지만 부모의 명으로 서천꽃밭을 찾아가는 존재였기에 그 길이 멀 수밖에 없었겠지만, 연이에겐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은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서천꽃밭은 결국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졌다. 나를 죽이고 살리고 하는 모든 것들이 실은 내 안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연이가 찾아간 동굴 속 자신의 내면세계가 서천꽃밭을 닮은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 그리고 연이는 그 서천꽃밭에서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으로 버들도령을, 자신의 소망을 살려낸다.

 

서천꽃밭의 많은 꽃 가운데 어떤 꽃을 선택할까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서천꽃밭엔 생명을 살리는 환생꽃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멸망꽃도 있으니 말이다. 연이는 환생꽃을 택했다. 나도 어쩌면 내면의 서천꽃밭에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꽃을 택할지는 오로지 내 몫이 될 것이다.

 

<연이와 버들도령>(백희나/책읽는곰/2022년 초판)
<연이와 반반 버들잎>(이성실 글/김은정 그림/애플트리테일즈/2010년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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