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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권정생 추모

복사꽃 외딴집

by 오른발왼발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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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께

 

선생님, 잘 지내시죠?

이제 3시간만 지나면 5월인데, 이상하게 날씨가 좀 쌀쌀하네요.

조금 전에 잠깐 산책을 다녀왔는데 패딩을 입은 사람들도 여럿이었어요. 5월을 앞둔 모습치고는 좀 낯설었어요.

보름 전쯤엔 이게 4월 날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더워 정신을 못 차리게 하더니 말이에요.

 

선생님 계신 그곳은 따뜻한가요?

복사꽃이랑 꼭 어울리는 날씨였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복사꽃 외딴집을 읽었어요.

? ?

선생님 두 눈에 이렇게 물음표가 생겼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 전인 1973년에 새생명5월호에 발표한 뒤, 단행본으로는 나오지 않았던 작품이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구하기도 힘든 그 옛날 잡지, 더구나 기독교 신자도 아닌 제가 기독교 잡지를 찾아 읽은 건 아니에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선생님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던 어떤 사람(!)이 숨겨져 있던 선생님의 여러 작품을 발견하고 이를 엮어 단행본으로 냈어요. 그리고 <복사꽃 외딴집>은 꼭 일 년 전인 20225월에 그림책으로도 나왔어요.

저는 그림책으로 나온 복사꽃 외딴집을 읽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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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이렇게 선생님 눈이 둥그레졌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작품이 이렇게 단편 모음으로, 또 그림책으로 나오게 될 거라는 걸 생각지도 못하셨을 테니까요.

 

-

그리고 이번엔 이렇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시겠지요.

복사꽃 외딴집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면서요.

 

 

추억.

추억은 좀 묘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실은 무척 힘들고 고달팠던 경험도 왠지 조금은 좋았던 기억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학창 시절의 괴롭던 시간이 지금은 행복했던 추억으로 느껴지는 것처럼요.

 

이 작품은 선생님이 1965년 상주에서 3개월 동안 거지 생활을 할 때 만났던 친절한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를 생각하며 썼다고 들었어요.

선생님의 삶에서 가장 힘들던 시절의 추억인 셈이지요.

제가 이번에 편지를 쓰면서 지난해에 쓴 편지를 다시 찾아 읽어보니 추신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더라고요.

 

올해는 잠깐이라도 하늘나라에서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려 보세요.”

 

그런데 이번에 복사꽃 외딴집을 보며 저는 선생님의 즐거웠던 추억 대신 다른 추억을 만나게 됐어요.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선생님께서 어느 봄날, 복사꽃 외딴집에 서서 추억에 잠겨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어요.

 

봄이 왔습니다.

외딴집 뒤꼍 복사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

외딴집에 둘이서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년 전에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 남은 할머니는 어디론지 모르는 곳에 가 버렸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요.

마치 선생님이 그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하시는 것만 같아요.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친절을 베풀어주신 분들의 이야기 잘 기억하려 노력하시는 것 같았어요.

힘든 사연을 갖고 외딴집에 사는 두 분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친절을 베푸셨는지를 알려주고 싶은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져요.

 

그리고 책을 다 봤을 때는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이 다름 아닌 선생님의 모습이구나 싶었어요.

 

아이들은 문고리에 달린 자물쇠를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감나무 잎이 돋았습니다.

할머니의 마음 같은 따스한 봄볕이 외딴집을 포근히 쌌습니다.

아이들은 거기서 할머니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고는 마음속에 지난 일을 한 가지씩 간추려 곱게 간직했습니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할머니의 냄새는 가슴 속 뿌듯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복사꽃이 피면 함께 할머니의 생각도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요.

읽고 또 읽어봐요.

읽고 또 읽어봐도 봐도 아이들의 마음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건 아이들의 정서가 아니라, 바로 선생님의 추억과 정서였어요.

 

그래서 실은 조금 아쉬웠어요.

작품을 쓰실 때 선생님이 추억에 너무 잠겨 계셨던 건 아닌가 싶었거든요. 우리가 과거를 추억할 때 몇몇 기억은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조금은 아스라하고, 무언가는 일그러지기도 하잖아요.

그래서일까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도, 아이들의 모습도, 친정 가는 길에 이곳에서 아기를 낳은 새댁의 모습도 스쳐 지나가는 듯 선명하게 다가오진 않았어요.

작품의 중심인물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두 분을 추억하는 선생님이기 때문이라 여겨졌어요.

 

만약 선생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독자라면 선생님의 추억이 담긴 이 작품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을 잘 모르는 독자라면 공감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어쩌면 선생님이 이 작품을 생전에 출간하지 않으신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했어요.

 

그래도 저는 오늘 복사꽃 외딴집을 보면서 선생님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됐어요.

제가 부탁드렸던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대신 젊은 시절의 고단했던 추억이지만 선생님과 추억의 일부를 공유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뿌듯해졌어요.

 

그리고...

선생님, 아세요?

이 편지가 열여섯 번째 편지에요!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는 것 같아요. 처음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여섯 번째라니요.

선생님과 저 사이의 추억도 켜켜이 쌓이고 있는 셈이에요.

 

내년에는 또 어떤 이야기로 선생님과의 추억을 쌓게 될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기대하고 있으세요.

제가 내년에 다시 편지 들고 찾아올 테니까요.

 

어느덧 시간은 2023430일에서 51일로 넘어가고 있네요.

내년에 또 편지 들고 올게요.

 

오진원 드림.

 

권정생 글/김종숙 그림/단비/2022. 5.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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