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막아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림형제의 ‘찔레꽃 공주’ 혹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
1. 내 기억 속 이야기의 파편
내 기억 속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나는 장면이었다. 아, 물론 공주의 탄생 축하 잔치에서 요정들이 축복을 내려주고 있을 때 나쁜 요정이 나타나 물레에 찔려 죽을 거라는 저주를 내린 것도 기억난다. 마지막에 남아 있던 요정이 죽음 대신 100년간 잠이 드는 것으로 저주를 마무리가 했을 때는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공주가 물레에 찔려 쓰러지는 장면은 이야기의 절정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공주가 정말 깨어날까, 못 깨어나면 어떡하나 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공주는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났다. 왕자는 마치 공주의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도대체 뭘 봤던 건가 싶기도 하다.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인 그림형제의 ‘찔레꽃 공주’, 페로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바실레의 ‘해와 달과 탈리아’에 이어 디즈니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유튜브에서 찾아봤다. 모두 내 기억과는 조금씩 달랐지만 그림형제와 디즈니 이야기가 비슷했고, 페로와 바실레의 이야기가 비슷했다.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바실레와 페로 이야기는 공주가 깨어난 뒤에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반면 그림형제와 페로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에 깨어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내 기억 속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그림형제 이야기인 것이 분명하다.
2. 공주는 15세(혹은 16세)가 되면 물레에 찔려 죽을 것이다!
공주의 탄생 축하 잔치에 초대된 마법사(요정)들은 공주에게 축복을 내려준다. 하지만 갑자기 초대받지 못한 마법사가 등장해 ‘공주는 15세가 되면 물레에 찔려 죽을 것이다’라는 저주를 내린다. 마지막에 남았던 마법사가 급히 ‘공주는 죽지 않고 대신 잠이 들 것’이라 말하며 저주를 누그러뜨렸지만 그렇다고 왕과 왕비의 불안이 사라지진 않는다. 왕은 온 나라의 물레를 없애라 명령한다.
참 이상하다. 물레는 알다시피 실을 뽑는 기구다. 물레가 없으면 실을 뽑을 수 없고, 실이 없으면 천을 짤 수도 없으니 옷을 해 입을 수도 없다. 전통 시대에는 집집마다 여자들이 물레를 가지고 실을 자았다. 그러니 나라 안의 물레를 없애라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물레에 찔린다고 죽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왜 나쁜 마법사의 저주가 물레에 찔려 죽는 것이었을까?
공주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주 흔한 여자들의 물건인 물레라는 점을 눈여겨보게 된다. 이는 공주에게 내려진 저주가 실은 공주 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고 여자라면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일이라는 뜻처럼 보인다. 저주가 내려지는 나이가 15세(디즈니에서는 16세다)라는 것, 또 물레에 찔려 죽게 된다는 것, 이 두 가지에서 연상되는 것이 있다. 사춘기, 그리고 초경이다. 개인차는 있지만 이 시기는 누구나 온다. 이 시기가 되면 급작스러운 몸의 변화와 함께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해지며 반항심이 강해지기도 한다. 이차 성징의 발달과 함께 성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
그래서 흔히 사춘기를 암흑의 시기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난다고도 한다. 이는 죽음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잠 역시도 마찬가지다. 잠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나쁜 마법사가 내린 저주는 사실 전혀 나쁜 것이 아니었다. 공주가 앞으로 닥쳐야 할 일을 미리 알려주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온 나라에 있는 물레를 다 없애버리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일들은 누가 막는다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죽음처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3. 딸바보 아빠의 바보 같은 바람
“전 완전 딸바보예요. 딸이 더 자라지 않고 이 상태로 머물러줬으면 좋겠어요. 딸이 남자를 만난다고요? 말도 안 돼요. 남자는 다 늑대잖아요. 딸을 보호해야죠. 정말이지 딸이 나중에 커서 결혼을 하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텔레비전에서 몇몇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마 공주의 부모인 왕과 왕비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옛날에 왕과 왕비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이렇게 말했다.
“아, 아기가 있었으면!”
- 그림형제, 찔레꽃 공주
왕과 왕비는 귀하게 공주를 얻는다. 귀한 만큼, 왕과 왕비는 공주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늘 자신들의 품에 있는 모습만 상상하고 싶을 것이다. 사춘기가 되어 사랑에 눈을 뜨고 자신의 품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림형제 이야기에서는 마법사들을 초대할 때 그릇이 12개 밖에 없어서 1명을 초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왕이 그릇 하나가 부족하다고 마법사 한 명을 빼먹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왕은 겉으로는 부정하지만, 속으로는 마지막 마법사가 공주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올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주에게 그런 시기가 오지 않기를, 그 시기가 되면 공주가 자신과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텔레비전에서 봤던 딸바보 아빠의 바보 같은 소원처럼 말이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물레에 찔려 죽을 것이다.”
결국 누구나 겪어야 할 시기를 애써 부정하려던 왕의 선택은 더 나쁜 선택이 되고 말았다.
“공주는 죽지는 않지만 백 년 동안 아주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다행히 남아 있던 한 마법사가 나쁜(?) 마법사의 저주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선물을 한 덕에 고비를 넘기게 됐지만 말이다.
4. 죽음과 잠
죽음과 잠은 서로 묘한 상관관계에 있다. ‘죽었다’는 말 대신 ‘잠들었다’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깊이 잠든 모습을 보고 ‘죽은 듯이 잔다’고도 한다. 하지만 죽음과 잠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죽음이란 ‘다시 태어남’을 뜻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라짐’을 뜻한다. 따라서 ‘죽을 것이다’는 저주는 공주의 사라짐을 뜻하게 된다. 사춘기의 충동성을 생각한다면 물레에 찔리는 사소한 상처가 뜻밖에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가출을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잠은 다르다. 죽음과 비슷하게 쓰이긴 하지만 잠은 일시적인 것으로 결국 다시 깨어남을 뜻한다. 또 사람은 잠을 자는 동안 뇌의 노폐물을 청소하며, 일상에서 겪은 일들을 분류하고 정리한다. 꿈을 꾸며 욕구를 해소할 수도 있다. 사춘기가 되면 유난히 잠이 많아지는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때 충분한 잠은 사춘기를 지혜롭게 보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100이란 숫자는 진짜 100을 뜻하는 게 아니라 ‘충분한’, ‘많은’이란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100년 동안 잠을 자게 된다는 것은 사춘기가 되어 물레에 찔리는 일이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할 만큼 충분히 잠을 자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5. 다시, 불만스러운 입맞춤
내가 그림형제 이야기에서 늘 불만을 품고 있던 건 공주의 모든 문제가 왕자와의 입맞춤으로 해결되는 것 같아서였다.(심지어 디즈니 이야기에서는 ‘100년’이란 기간 대신 ‘진실한 사랑의 첫 입맞춤’이 공주를 깨운다고 나온다.) 물론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눈을 떴다는 건 공주를 오랜 잠으로 이끌었던 문제에 대한 답이 왕자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대단원의 막이 왕자의 입맞춤으로 끝이 나니, 공주의 오랜 잠이 갖는 의미는 사라지고 마치 왕자가 공주를 구해낸 수훈자인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페로나 바실레의 이야기에서는 공주가 깨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 행복해 보였던 공주에겐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오고, 이 시련을 극복한 뒤에야 공주와 왕자는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이야기를 견주며 볼 때는 페로나 바실레의 이야기가 더 좋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페로나 바실레의 이야기를 함께 견줘보고 싶다. 오늘은 여기까지!
참, 그래도 그림형제 이야기에서 모든 것이 잠들고 다시 깨어나는 장면은 기가 막히다. 마치 눈앞에서 일이 벌어지는 듯 생생하다. 옛이야기는 묘사 대신 사건 중심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성질이 있다고는 하지만, 때로는 생생한 묘사가 사건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6. 오랜 잠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공주는 15세에 물레에 찔리면서 오랫동안 잠이 들었다. 이 이야기가 공주의 이야기라서 공주의 서사로 펼쳐지긴 했지만, 사춘기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온다. 공주의 이야기와 서사의 내용은 달라지겠지만 왕자에게도 오랜 잠이 필요하리라.
그리고, 사춘기는 아니라도 때때로 잠이 필요할 때가 있다. 뇌의 노폐물을 청소하며, 일상에서 겪은 일들을 정리하고, 욕구를 해소할 일은 사는 동안 너무나 많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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