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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책/옛날이야기 공부방

선생 장가 보내기

by 오른발왼발 2025.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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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쩌면 혁명적!

- 선생 장가 보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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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을 장가들인 학동의 이야기가 있다.

난 요즘 아이들의 생각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20대 딸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학동은 홀아비 선생에게 장가들게 해 주겠다 한다.

그리곤 과부집에 가서

“우리 선생님 여기 계시죠?”

하고 묻는다.

과부는 처음엔 별스럽지 않게 ‘네 선생이 왜 여기 오느냐?’ 반문했지만 학동이 한번 두번 반복해서 묻자 화가 난다.

학동은 선생에게 자기가 과부를 집 밖으로 나오게 할 테니 그사이에 과부네 안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누워 있으라고 한다.

학동은 과부에게 또다시 “우리 선생님 여기 계시죠?”하고 묻고, 화가 난 과부는 학동을 잡으러 집 밖으로 나온다. 학동은 선생이 방 안에 들어갔을 때쯤 과부에게 붙잡히며 말한다.

“그럼 집에 가서 확인해 보자!”

집에 가 보니 선생은 안방에 옷을 벗고 누워 있었고, 당황한 과부는 소문이 나지 않게 해 달라면서 학동에게 떡을 한 말 해 준다. 학동은 과부에게 받은 떡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자기 선생님과 과부가 혼인했다고 말한다.

 

선생님이 쓰레기네.”

아이는 듣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사실 딸의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래도 또다시 물었다.

?”

학동은 어리니까 그렇다 쳐. 하지만 선생님이 학동 말을 믿고 과부를 농락한 거잖아.”

맞다. 이야기에선 이 모든 것이 똘똘한 학동이 꾸민 일로 초점을 맞춰져 있다. 선생은 학동이 이끄는 데로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선생의 역할은 학동이 잘못된 일을 꾸미는 걸 알았을 때 이를 바로잡아주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잘못을 저지른 건 학동이 아니라 선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이익(장가를 들 수 있다는)을 위해 학동의 잘못된 행동을 눈감고 이를 받아들인다. 아니, 어쩌면 이런 행동은 잘못이 아니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옛날엔 이런 일이 남자 입장(!)에서는 흠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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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현대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가 틀림없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 짓기엔 뭔가 찜찜했다. 관점을 바꿔 보면 지금껏 보이지 않던 다른 모습이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현대적 관점이 아닌, 이 이야기가 전해지던 옛날,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힘없는 약자로 살아야 했던 과부의 입장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더구나 이야기에서 과부는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고, 과부의 그 어떤 생각도 드러나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시절, 과부가 된 여자는 개가를 꿈도 못 꿨다. 어린 학동이 나이 많은 과부에게 건방지게 ‘~하며 택호를 불러대던 시절이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누이동생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자 집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 뒤 시댁에는 동생이 급사했다 속이고 동생을 개가시켰다고 한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과부란 굴레는 죽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과부의 신세가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개가를 꿈꾸지 못하는 건 당연했고, 양반가의 경우 열녀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열녀문을 받으면 조세와 부역이 면제되기도 했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벼슬을 내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망인(남편이 죽었음에도 죽지 못한 여자)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열녀를 높이 사는 분위기가 팽배해질수록 과부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에서처럼 어린 학동이 과부에게 “~이라 하며 하대하듯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당 선생이 자신의 방에 누워 있는 것을 봤을 때도 과부는 시시비비를 가릴 여유란 없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소문이 나면 그대로 생매장당할 처지니 말이다. 학동에게 떡을 해주며 빌듯이 비밀을 지켜달라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참으로 비참한 처지다.

 

그러나 이렇게 열악한 처지이기에 과부에게는 자신을 보호해줄 울타리가 필요할 때가 많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 울타리가 되어줄 사람은 남성이다. 그리고 그 남성을 얻는 방법은 혼인뿐이었다.

문제는 과부의 개가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과부가 개가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보쌈을 당하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가거나, 이회영 여동생의 경우처럼 죽은 사람이 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을 생각할 때 어쩌면...어쩌면, 이야기 속 과부는 다른 과부들의 처지보다는 나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래도...그래도, 자기가 살던 곳에서 개가를 한 셈이니까 말이다.

이야기에서 과부의 입장은 전혀 나오지 않으니 개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학동이 자기 선생이 왔는지를 물을 때마다 화를 내는 건 수절을 하는 과부로서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과부가 개가에 대해, 선생과의 혼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판단할 수는 없다. 혹시 속으론 기왕 이렇게 된 거 선생과 잘 될 수는 없을까?’하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하더라도 일단은 당황스러움과 함께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날에는 큰일 난다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다. 과부로서는 학동의 입을 막는 것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기존 질서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해도 이를 실현하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 도전했다가는 패가망신에,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기존 질서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숨긴 채, 불만이 있어도 기존 질서 속에 안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학동은 기어코 쐐기를 박고 만다. 과부가 해 준 떡을 돌리며 마을 사람들에게 두 사람이 혼인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제 좋건 싫건 과부는 선생과 공식적인 부부가 됐다. 과부는 꾀죄죄한 선생을 보살펴야 하는 노동이 추가된 대신 사회적으로 볼 때는 선생이라는 그럴듯한 울타리를 갖게 됐다.

과부와 선생이 잘 살았을까? 대부분의 옛이야기는 잘 살았다로 끝나지만, 사실 그들이 잘 살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부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과부와 선생은 나름(!) 잘 살았을 것이라 믿고 싶다. 과부는 금기시 돼던 개가를 성취하며 자신을 보호해줄 울타리를 얻었다. 선생 역시 꾀죄죄함을 면했을 것이고 말이다. 물론 과부와 선생도 모든 부부가 다 그렇듯 가끔 싸우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또 서로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가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문득문득 오는 찰나의 행복을 느끼기도 하며 살았을 것이다.

 

#.

이야기를 보며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자지만 과부인 여성, 꾀죄죄한 몰골의 선생, 선생에게 대담한 제안을 하며 일을 꾸미는 어린 학동.

이 셋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과부는 사회적 약자이지만 대신 부자이고, 선생은 사회적 지위가 있지만 꾀죄죄함을 못 벗어나고 있고(이는 홀아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난이 한 원인일 수도 있다), 어린 학동은 어른에게 견주면 약자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즉 셋은 약자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 그 무언가는 상대를 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부자인 과부는 선생의 꾀죄죄함을 구하고, 선생은 자신의 지위로 과부를 구할 수 있다. 이를 연결해주는 건 어린 학동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사회적 약자인 세 사람의 만남이 만들어낸 혁명적 이야기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볼 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 학동은 혁명을 지휘한 혁명가라 볼 수도 있을 듯 싶다. 이 둘을 서로 연결시키고, 과부의 개가를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하게 만든 존재니까 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과부는 아무런 준비 없이 사건에 휘말리게 됐으니 일면 피해자인 부분도 있다. 하지만 결국 과부는 그 과정에서 혁명적인 사건의 1호 주인공이 됐다.

이제 이 마을에서는 앞으로 2, 3호의 주인공도 계속 나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과부의 개가라는 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 됐을 땐, 또 다른 혁명적인 사건도 일어날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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