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이야기, 보여줄까? 말까?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가운데 지금은 절판된 책이 두 권 있다. 두 권 모두 절판 이유는 같다. 무섭고 잔인하다는 이유로 학부모의 항의가 심했다고 한다. 이 두 권처럼 절판이 되지는 않았지만 상담이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옛이야기인 ‘여우누이’다. 좋다고 추천을 받아서 보여줬는데, 아이가 무섭다고 우느라 잠을 못 잔다는 것이다.
이 책뿐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책이 아이들이 너무 무서워하기 때문에, 혹은 엄마가 보기에 너무 무섭고 잔인해 보이기 때문에 논란이 되곤 한다. 그래서 옛이야기의 경우 어린이 책으로 낼 때는 원래의 내용과 달라지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말이다.
무서운 이야기로 공포에 맞서다
그런데, 정말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는 안 좋은 걸까? 괜히 아이들의 공포감만 키우고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걸까?
외국에서도 이런 논란은 있는 듯싶다. 특히 빨간 모자에 나오는 늑대에 관한 경우가 흔하다. 여우누이의 여우처럼 늑대는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때마다 부모는 늑대 그림을 불태워 보이며 나쁜 늑대는 이제 없다고 알려줬다고 한다. 어느 날 아빠와 숲으로 산책을 가게 된 아이는 누군가 어디 가느냐고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늑대 있는데요.”
오제핀느 빌츠라는 심리학자는 이를 두고 ‘늑대 이야기를 듣고 밤마다 불안에 떨던 예민한 아이가 무서운 늑대와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는 늑대 때문에 그저 공포에 떨고 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 그 공포와 맞서 싸우고 있었고, 어느 순간 맞설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반면 옛이야기 연구가인 루츠 레리히는 아이의 마음에 불안을 남기는 이야기를 피해 들려주었던 한 부부의 사례를 보여준다. 부부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 믿었지만 아이는 어두운 방에서 한 번 불안에 빠지자 그 불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불안과 공포에 맞서 싸울 저항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가 무섭고 잔인하고 공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괜히 제한하거나 고치거나 하는 건 더 위험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무서운 이야기에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무서워서 그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이야기에 빠져든다. 아이들 사이에서 전하는 귀신 이야기는 이를 확인시켜 준다. 이야기 문화가 사라졌다는 현대에, 아이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건 바로 귀신 이야기다. 그런데 이 귀신이야기는 큰 아이들보다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더 인기를 끈다. 그것도 남자아이들보다는 여자아이들한테. 즉, 겁이 많은 아이들일수록 귀신 이야기에 더 예민하다. 귀신 이야기를 하는 친구를 향해 하지 말라고, 듣고 싶지 않다고 귀를 막는 척하면서도 은근슬쩍 귀를 열어두고 귀신 이야기를 듣곤 한다. 듣고 나선 무서워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담담해진다.
공포에서 삶의 진실을 배운다
이쯤 되면 무서운 이야기가 갖고 있는, 조금은 억울한 누명을 벗겨줘야 할 듯싶다. 괜히 미리 막고 어른들이 보기에 좋은 방향으로 고쳐 쓰고 했을 땐 역효과만 나타난다. 아이가 이를 극복할 힘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이들 책이 음성적으로 말단의 자극만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보통 무서운 이야기 속에는 무서움만 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삶에서 배워야 할 진실이 함께 있다. 하지만 이들 책은 무서움과 잔인함, 공포만을 즐기게 만든다.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는 게임을 즐기듯 말이다.
결국 책을 볼 때 무서운 장면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게 아닌 셈이다. 무서움만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이야기는 과감하게 떨쳐내야 하지만, 무서운 장면이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장치로 적절하게 쓰였다면 잠시 동안의 무서움은 더욱 값진 것으로 되돌아온다. 아이와 함께 무서운 이야기를 읽어보자. 어느 순간, 아이가 달라진 모습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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