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와 국악의 만남
《옛이야기 들썩, 우리 음악 얼쑤!》(이효분 글/홍선주 그림/웃는돌고래/2013년)
1. 옛이야기 책의 새로운 흐름
요즘 새로 나오는 옛이야기 책들을 살펴보면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흐름이 눈에 띈다. 옛이야기에 새로운 분야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순수한 옛이야기 책이 아닌 지식 책으로 분류가 될 만한 책들이다.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옛이야기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를 곁들이는 식이다.
물론 이런 책들이 요즘 들어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엔 그 수가 많지 않았고, 독자들의 관심도 크게 받지 못했다. 독자들의 관심은 순수한 옛이야기에 가 있었고, 이런 책들은 상업적인 출판물로 여기는 경향이 높았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을 보면 옛이야기 책의 흐름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예전처럼 순수하게 옛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책들이 훨씬 더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이제 독자들의 관심은 이런 옛이야기 책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판매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인터넷 서점을 기준으로 살펴봐도 새로 출판되고 있는 옛이야기 책들의 판매량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고, 대신 옛이야기에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곁들인 새로운 방식의 책들은 나름대로 선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국악을 접목한 옛이야기
『옛이야기 들썩, 우리 음악 얼쑤!』는 옛이야기에 국악을 접목한 책이다. 글쓴이는 오랜 세월 가야금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한 할머니 선생님이다. 주말마다 만나는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옛이야기는 모두 10편. 각각의 이야기마다 판소리, 정간보와 여민락, 가곡, 사물놀이 등 국악과 관련된 이야기가 덧붙여 있다. 차례만 봐서는 각각의 이야기와 국악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끼어 맞춘 건 아닐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책을 펼쳐 읽는 순간, 이런 의심은 모두 사라졌다. 가야금 할머니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책 속에 가득했다. 이야기의 시작을 우리 음악처럼 박을 한 번 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고서 다시 박을 세 번 치는 것으로 마치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옛이야기와 국악 이야기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녹아서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3. 날것의 지식이 아닌 삶이 녹아있는 지식
국악은 우리 음악이긴 하지만 우리에겐 낯설고 어려운 분야다. 판소리나 가야금, 사물놀이, 장구 정도는 알겠지만 정간보와 여민락, 가곡, 시나위, 십이율 같은 내용은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낯섦은 호기심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알고 싶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만큼 국악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낯설고 어려운 이야기를 국악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통해 전한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다. 옛이야기를 아무리 살펴봐도 딱히 국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차례를 보자.
1장. 알 속의 세상, 알 밖의 세상 - 판소리
2장. 세상에 나온 해와 달 - 정간보와 여민락
3장. 비나이다, 칠성께 비나이다 - 가곡
4장. 까마귀가 만든 엉터리 명부 - 사물놀이
5장. 세 갈래 길의 삼형제 - 장구
6장. 삼신 할멈과 꽃씨 다섯 개 - 처용무
7장. 견우와 직녀 - 해금
8장. 바리데기 공주와 오귀굿 - 시나위
9장. 우륵이 전한 가야의 혼 - 가야금
10장. 하늘나라 열두 동물의 달리기 시합 - 십이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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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과 9장, 10장 정도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 같지만 나머지는 옛이야기가 국악과 어떻게 연결이 될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하지만 옛이야기는 국악과 보기 좋게 하나로 이어졌다. 이는 글쓴이가 이야기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녹여 넣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즉, 옛이야기와 국악이라는 지식이 글쓴이가 갖고 있는 삶의 연륜으로 버무려져 새로 태어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글쓴이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알 속의 세상, 알 밖의 세상’이라는 주제로 반고의 창세신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이 거대한 알 같은 존재였던 시절, 그 속에서 잠들어 있던 반고가 알을 깨고 일어나면서 세상이 창조되고, 반고의 몸 또한 해와 달, 강, 풀과 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보통 사람이라면 과연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글쓴이는 반고가 잠들어 있던 알 속 세계를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 뱃속은 반고가 잠들어 있던 알 속과 같다는 점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판소리 ‘심청가’에서 심청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소리’나 ‘아니리’, ‘발림’, ‘추임새’ 같은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반고가 세상을 창조할 때의 고통, 엄마가 아기를 낳을 때의 큰 고통은 당시엔 큰 시련처럼 여겨지지만 결국엔 그 고통이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을 안겨준다는 삶의 진실까지 함께 이야기한다.
또 ‘바리데기 공주와 오귀굿’에서는 이승을 떠나는 영혼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바리데기의 의미와 옛 사람들이 생각하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한다. 낯선 주제지만 상여와 꼭두, 굿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저승길이 무서운 길이 아니라 편안하고 즐겁게 갈 수 있는 길이 되길 바라는 옛사람들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굿 역시도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해 혼령에게 정성을 다하는 의식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굿이 미신이고 헛된 의식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굿판에서 음악이 빠지지 않듯 이 대목에서 음악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이치다. 망자에게 머나먼 하늘길 겁내지 말라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 듯 활기차고 자유분방하게 펼쳐지는 시나위 이야기가 한바탕 펼쳐진다.
이처럼 글쓴이는 옛이야기를 통해 우리 음악, 악기에 대한 이야기로 영영을 확장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음악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은 물론이지만 옛이야기란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도 새삼 일깨운다.
3. 옛이야기의 확장
옛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급속하게 일어나던 1990년대 중후반, 사람들의 관심은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린 옛이야기를 되살리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들려주는 문화가 사라지고 옛이야기가 어린이를 위한 전래동화로만 인식이 되면서 작가들의 입맛에 따라서, 혹은 어린이에게 적당한 이야기로 만든다는 이유로 옛이야기는 심하게 왜곡되고 단순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옛이야기 책은 또 다른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옛이야기 책이 나왔던 탓인지 새로 나오는 옛이야기 책들이 예전만큼 독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개인적으로는 똑같은 이야기라도 또 다른 작가에 의해 다시 쓰이고 또 다시 쓰이는 것이야말로 옛이야기의 들려주기 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라 생각하지만, 출판 시장의 사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긴 해도 나는 새로운 옛이야기 책의 흐름을 환영하고 싶다. 이 흐름은 기존에 나온 옛이야기 책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틀 위에서 나온 것이고, 옛이야기가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옛이야기란 본래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어떤 이야기와도 결합할 수 있다. 옛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면 들려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며 더 많은 세계와 만나게 된다. 요즘에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옛이야기 책의 흐름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삶이 묻어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덧붙이며 풍부해지는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책이다.
4. 아쉬움 한 가지
애정이 가는 책인 만큼 아쉬움도 있다. 여기 나오는 옛이야기 가운데 반고의 천지창조 이야기인 ‘알 속의 세상, 알 밖의 세상’과 ‘세상에 나온 해와 달’은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의 이야기다.
엄밀히 말해 우리 음악이 많은 부분 중국에서 들어온 것을 생각한다면 중국의 이야기를 함께 다루는 것이 큰 무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 이야기는 분명히 중국 이야기라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우리 음악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독자는 중국 이야기 역시 우리 이야기로 여길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우리 이야기를 썼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접을 수는 없다. 생명의 탄생과 관련해 ‘알’을 매개로 삼기 위해서 반고 이야기를 가져온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르겠다. ‘알’은 우리나라 천지창조 이야기에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해와 달’ 관련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에서 가져와도 무리가 없었을 것 같은데 굳이 중국의 이야기를 가져온 건 아무래도 아쉬운 점이다.
- 이 글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분기별로 펴내는 《어린이문학》 2014년 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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