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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우리창작

꽃신

by 오른발왼발 2020.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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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간 아이들

《꽃신》(김소연 글/김동성 그림/파랑새/2008년)

 

 



흔히 옛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길을 떠나는 것으로 세상에 나온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기 전에 특별히 뭔가 결심을 하고, 준비하지는 않는다. 마치 길을 떠날 때가 됐기 때문인 듯 때가 되면 길을 나설 뿐이다. 그 길에는 수많은 모험이 기다리고 있고, 그들은 그 속에서 성장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도 길을 떠난다. 하지만 옛이야기 주인공들이 길을 떠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난다. 떠나기 전까지 그들의 가슴엔 많은 갈등과 번민이 오고간다. 그래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책에는 「꽃신」,「방물고리」,「다홍치마」, 이렇게 세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각 작품마다 주인공의 신분이 다르다. 「꽃신」에서는 대갓집 딸인 열두 살 선예가, 「방물고리」에서는 가난한 살림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열다섯 살 덕님이가, 「다홍치마」에서는 노비의 아들인 열다섯 살 큰돌이가 나온다.
각자의 신분이 다른 만큼 이들이 길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도 다르다.


「꽃신」의 선예는 어머니와 은곡사 나들이를 왔다 아버지가 역모죄로 끌려갔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어머니는 상황을 살피러 집으로 발길을 돌리고 선예는 유모와 단 둘이서 은곡사에 남겨진다. 역모죄로 엮인 죄인은 가족까지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내려진 상황이다. 이제 선예는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라도 떠나야만 한다. 일곱 살이 넘어서부터는 바깥사랑채에도 함부로 나다니지 못했던 선예는 이제 유모를 따라 강원도 정선까지 가야한다. 대갓집 딸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몰래 숨어서 가야하는 도망자 신분으로 말이다.


「방물고리」의 덕님은 달걀을 팔고 남의 집 삯빨래를 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암퇘지를 샀다. 그리고 장날이면 주막에서 일을 거들어주고는 구정물을 얻어다 돼지에게 먹일 만큼 억척스럽게 산다. 덕님의 소원은 돈을 벌어 남의 집 선산에 묻힌 아버지 산소를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덕님의 상황은 먹고 살기에도 빠듯하고, 몇 해째 앓고 있는 어머니에게 약 한 첩 해 드리기도 힘들기만 하다. 덕님이 기르던 돼지가 새끼를 낳던 날 어머니는 돌아가신다. 육촌 오라비뻘인 성택 형제는 상주마냥 장례를 이끄는 척 하고는 덕님을 시집보내고 집과 돼지를 차지하려 한다. ‘집안 어른’임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당해낼 도리는 없다. 집문서는 비록 성택 형제에게 뺏겼지만 덕님은 아직 남아있는 돼지를 몰래 가져다 판다. 그리고 그 돈으로 방물고리를 산다. 이제 덕님은 장돌뱅이로 새로운 인생길을 나서려 한다.

 

「다홍치마」의 큰돌이가 지금껏 가 본 곳은 아랫마을이 다다. 그도 그럴 것이 큰돌이의 아버지 어머니는 도망친 노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상한 고기를 제사상에 올린 죄로 곤장 오십 대를 맞았고, 뱃속의 아기를 위해 대신 맞겠다는 아버지도 함께 곤장 오십 대를 맞았다. 광에 갇힌 아버지 어머니는 광에 난 들창을 부수고 도망을 쳐 산골로 들어와 숯을 굽기 시작했다. 그 뒤 아버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마을로 내려와 본 적이 없다. 큰돌이는 열세 살 때부터 그 숯을 팔고 장을 보는 일을 도맡았기 때문에 겨우 아랫마을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런 큰돌이가 길을 떠난다. 마을에 귀양을 와 있다가 또 다른 역모에 엮여서 어디론가 다시 귀양길에 오른 양반 때문이다. 그 양반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줬고, 두창에 걸린 동생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다.

 

길을 떠나는 이들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야기는 길을 떠나는 것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쩌면 더 흥미진진할 수도 있는 길 떠난 뒤의 모험을 뒤로 한 채 이들이 길을 떠나는 것에서 이야기를 끝냈다. 세 편 모두 뒷이야기가 이어진다면 각각 한 편의 장편 작품으로 완성될 수도 있었을 듯싶은데 말이다.
하긴 굳이 이렇게 길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편이 더 좋은 것 같긴 하다. 앞으로 이들이 어떤 일을 겪고 어떻게 성장할지는 몰라도 지금 길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은 희망이 느껴진다. 뻔히 험난한 앞날이 예상되면서도 희망이 느껴지다니, 조금은 아이러니한 듯싶기도 하다.
아마 이들의 희망은 이들이 길을 떠나기 전 만났던 사람들과 교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이다. 처음엔 서로 잘 몰랐기 때문에, 혹은 편견 때문에 그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 교감이 이루어지는 순간, 주인공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본다.

 

「꽃신」의 선예는 절에서 부모를 모두 돌림병으로 잃은 화전민 아이 달이를 만난다. 대갓집 딸과 화전민 딸. 나이는 같지만 두 아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할 만큼 거리가 있다. 일이라곤 전혀 해 보지 않은 선예의 눈에 눈길을 쓸고 짚신을 직접 삼아 신는 달이는 신기하면서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다. 둘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서도 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두 사람에게 공통된 건 부모를 향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두 아이를 연결해준다.

 

「방물고리」의 덕님은 주막에 갈 때마다 만나는 김 행수 상단의 막내 등짐장수 홍석을 마음에 두고 있다. 하지만 홍석에게 덕님은 억세고 그악스러운 계집애일 뿐이다. 덕님이라고 홍석에게 왜 여자답게 안 보이고 싶으랴마는 가난한 생활은 덕님을 억척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억척을 부려도 여자라는 이유로 받는 여러 가지 부조리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덕님에게 여자란 의미는 참으로 기가 막힌 운명이다. 홍석은 김 행수의 도움으로 덕님의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홍석은 여자로는 아닐지 몰라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덕님의 새로운 길을 돕는다.

 

「다홍치마」의 큰돌은 아버지 어머니의 처지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양반을 미워했다. ‘기죽은 양반은 사람 꼴이 나나 안 나나’ 보자며 귀양 온 양반 구경을 간 큰돌은 ‘임금이든 양반이든 백성이든 다 똑같다’고 말하는 양반을 만난다. 큰돌은 그 양반은 글을 가르쳐주고, 새로운 세상을 가르쳐주고, 동생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 선비를 위해, 그 선비가 가장 귀하게 여긴 다홍치마를 전하러 멀리 황해도 해주까지 길을 떠난다.
이처럼 주인공이 만난 이들과의 교감은 하나의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고, 이들은 그 물건을 가지고 길을 떠난다. 험난한 이들의 길이 희망적인 건 바로 이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40호(2009년 1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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