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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납치되고 있다! - 땅속 나라 도둑 괴물

by 오른발왼발 2021.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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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채록된 민담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그래서 그림책 <땅속 나라 도둑 괴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림책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하겠습니다.

여자들이 납치되고 있다!

- '신랑과 괴적' 혹은 '지하도적 퇴치' 이야기

 

1.

땅속 나라 도둑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한국구전설화>(평민사)<한국구비문학대계> 속 제목은 신랑과 괴적’ ‘지하도적 퇴치등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군수 부인 잡아가는 괴물이야기 정도가 더해진다.

사건의 시작은 여자가 괴물에게 납치되어 가면서다. 여자들이 괴물에게 납치되는 이야기는 우리 옛이야기에서는 흔치 않은 소재다.(내가 아는 이야기 가운데는 여자를 납치하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가 거의 유일하다.) 괴물은 평범한 여자를 납치하기도 하지만 양반집 부인, 공주도 납치한다.

그런데 <한국구전설화>에 수록된 이야기의 대부분은 평북 지역에서 채록됐다. 왜 하필 평북에만? 이야기를 의심의 눈으로 보게 된다.

 

물론 <한국구비문학대계>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채록 연도가 빠른 게 1979, 그리고 대부분이 2015년 이후 이야기이다. 또 이야기의 짜임새도 부족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한국구전설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2.

이야기가 채록된 평북 지역을 눈여겨보게 되는 이유는 그 지역이 중국 사행길의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대부분의 이야기가 중국의 경계인 의주와 그 아래 지역인 선천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에 이야기가 집중된 까닭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떤 골간에는 색시가 많이 갇혀 있구 어떤 골간에는 금은보구가 많이 싸여 있구 해서 색시덜은 모두 다 저으 집이루 가라 하구 내 주구

-<신랑과 괴적>(한국구전설화 2/평북 2/85쪽)

 

이야기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곳에 여자들이 여럿 갇혀 있는 경우가 보인다. 도대체 괴적은 왜 여자들을 그렇게 잡아온 것일까?

이야기가 전하는 길목, 여자들을 납치해 간 괴적이 하나로 합쳐지자 생각나는 건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조선과 중국을 이어주는 사행길은 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해 들어오는 길이 되고 만다. 병자호란으로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는다. 청 태종은 50만 명 이상의 포로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무자비한 포로 사냥이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신분과 상관없이 약 20만 명의 여자들을 포함해 모두 50만 명 이상이 포로로 끌려갔다. 사대부가의 여자들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노예로 팔거나 조선에 돌려줄 때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있어서 더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여자들은 끌려가면서도 온갖 수모를 당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았다. 나중에 일정 금액을 내고 속환을 할 수 있게 됐지만, 이때 우선순위는 남자들이었고, 여자들은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약 25천명에서 5만 명 사이의 여자들은 돌아올 수 있었으나, 이들 중 1만명 이상은 고향에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안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뻐서 얼떵 색시한데 가서 나왔음메 하는데두 색시는 눈을 빨멘 “요놈으 새끼 와 왔네?” 하구 시큼둥해 개지구 말두 않구 골간에다 가두었다.

-<한국구전설화 2/평북 2>, 88쪽

 

색시는 자기 남편을 보더니 별놈으 자식이 다왔다 하면서 종보고 저쪽에 있는 울 안에다 가두 노라고 했다. 이 색시는 벌서 도적놈에게 정이 들어서 본 남편 같은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구전설화 5/경기>, 248쪽

 

이야기 가운데는 남자가 도적을 물리치고 여자와 잘살게 되는 이야기도 있지만, 위와 같이 여자가 남자를 외면하고 옥에 가두는 이야기도 있다. 왜 여자는 자신을 구하러 온 남편을 반기지 않았을까?

환향녀들의 기구한 삶을 생각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남자의 정조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자의 정조는 칼같이 지켜져야 했다. 그래서 운 좋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여자들은 결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여자는 아마 그런 운명을 알았기에 그곳에서의 삶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새시방은 “머이 어드래? 너 같은 화낭넌에 간나새끼는 장수놈한데루 가라” 하멘 검으로 배를 쨌다. 그러느꺼니 뱃속에서 핏덩이가 하나 튀어나오멘서 “아이 분해. 사할만 참았더면 내레 이 원수를 갚갔넌데” 하멘 마당으루 오뚝오뚝 뛔다녔다. 새시방은 이걸 보구 머이 어드레? 하구 검으로 툭테서 팽개텠다.

<한국구전설화 2/평북 2>, 80쪽

 

김정승은 도죽놈이 죽은 걸 보구서 저 색시한데 가서 요놈에 에미나 죽어 봐라 하멘 검으루 색시 배를 째서 밸(창자)를 꺼냈다. 밸을 꺼내 보느꺼니 저에 색시는 볼세 도죽놈에 아를 개저서 그 아레 밸 안에서, 사할만 참아라 사할만 참으멘 내래 원수갑갔다 하구 있었다. 김정승은 그걸 꺼내서 말리워서 담배 주머니에다 넸다. 그리구 가싯집에 갔다. 가스오마니레 김정승이 힘 쓰는 걸 보구 어드렇게 해서 그같이 힘을 쓰능가 물었다. 김정승은 색시 밸에서 꺼내서 말리운 걸 주멘 이걸 먹어서 힘이 세다구 하멘 힘이 세디구푸먼 이걸 먹으라구 줬다. 가스오마니레 그걸 먹갔다구 씹었넌데 씹히딜 않고 볼다구니만 다 달아뎄다구 한다.

<한국구전설화 2/평북 2>, 88쪽

 

남편은 도적을 죽이고 난 뒤 여자를 죽인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배를 째는데, 뱃속에 도적놈의 아이가 있다. 여자가 남편을 외면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냥 몸이 더렵혀진 게 아니라 아이까지 뱄으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자신의 여자(!)가 도적의 아이를 뱄다는 사실은 남편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배 속의 아이는 여자의 아이가 아니라 도적의 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버지 원수를 갚는 아들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듯, 도적의 아이도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남자에겐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 배에서 나온 아이가 사흘만 있었으면 원수를 갚았을 것이란 말을 했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남자의 관념에서 그렇게 느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 가운데는 남자가 색시를 구해서 잘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율은 반반 정도이다. 하지만 어느 이야기든 여자를 납치해 가는 괴적의 모습에서 병자호란의 흔적이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가 전하는 건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지배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담아 이야기를 한 것이 퍼져나갔을지도 모른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환향녀라 해도 무조건 내쳐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숙종 때 사헌부에 있던 최선의 어머니 권 씨는 병자호란 때 환속한 여자으로 알려져 있다. 최 씨 집안은 그녀가 돌아오자 가문의 종부로 받아들여 제사를 받들게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만 봐도 남자가 여자를 구해와 다시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역시 가능하다. 안타까운 건 권 씨의 남편과 권 씨도 죽자, 작은아버지가 "권 씨의 신주를 우리 집안의 사당에 둘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같은 집안에서도 권 씨를 두고 첨예한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전쟁 같은 어려움이 닥치면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여자와 어린이다. 그 가운데 여자들은 군인들의 성적 대상으로 이중삼중의 피해를 입는다.

여기서 이야기는 여자를 납치하면서 시작한다. 안타까운 건 여자를 납치하는 것이 지금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는 여자를 납치하는 일이 횡행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서 여중생 317명 무장괴한들에게 또 피랍...2021.2.26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삶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90년대만 해도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한 여자들의 소식이 종종 뉴스에 등장했다. 요즘도 헤어진 여자 친구를 납치해 폭행하는 사건은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결국 끔찍한 이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다. 여자들이 납치당하지 않는 세상이 오면 이런 이야기들은 사라지게 될까? 여러모로 현실을 비추는 이야기 같다.

 

4. 

사실 이 이야기를 처음 봤을 때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물리치는 이야기로읽었다. 물론 채록된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이 책으로 나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봤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많은 아이들이 유독 <땅속 나라 도둑 괴물>을 좋아한다는 말도 들었다. 채록된 이야기와 그림책 사이에는 간극이 큰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림책은 여전히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7년 즈음 채록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다시 봤을 땐 이 이야기가 나무꾼과 선녀처럼 부부관계 혹은 남녀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혔다.

그리고 2021년 채록된 이야기가 전하던 지역을 염두에 두고 읽자 이번엔 병자호란의 아픔이 연상됐다.

같은 이야기지만 읽을 때마다, 어디에 중심을 두고 읽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다르게 보인다. 나는 이처럼 한 가지 이야기를 다양한 의미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야말로 좋은 이야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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