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동화 - 돈벌이 경제에 갇히다
2000년 이후 눈에 띄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부자 열풍’이었다. 1997년 IMF 사태로 위축된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하듯 부자 열풍은 식을 줄을 몰랐다. 한동안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최고의 인사말이 되기도 했다. 뒤이어 ‘부자 아빠’ 열풍이 몰아닥쳤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황금가지)는 ‘부자 아빠’의 열풍에 불을 붙였고, 이어 ‘부자 아빠’라는 컨셉은 CF로 이어졌다. 그리고 ‘부자 아빠’는 그저 아빠 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녀의 행복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부자 아빠는 유능한 아빠로, 그렇지 않은 아빠는 무능력한 아빠처럼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텔레비전이고 신문이고 할 것 없이 부자 되는 비법을 소개하기에 바빴고, 이렇게 몇 년간 성공적인(!) 재테크를 통해 부자가 된 사람들은 사회 유명 인사가 되곤 했다. 우리나라가 IMF가 벗어나는 길은 경제를 살려서 돈을 벌어들이는 길뿐이고, 개인 경제 역시도 돈이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부자 열풍으로 탄생한 어린이 경제동화
이런 사회 현상은 어린이 책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2000년 10월 『펠릭스는 돈을 사랑해』(비룡소)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나왔다. 열두 살 펠릭스가 돈 때문에 늘 티격태격 싸우는 부모님을 보며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스스로 일을 찾아 나서고, 이후 여러 가지 투자에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경제 원리를 이해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틀은 경제동화들의 일반적인 기본 틀이기도 한데, 다른 책과 다른 점이라면 회계 장부 정리부터 시작해 신주매장, 선물투자 등 전문적인 경제용어들이 많이 나오고 이를 이이야기 속에서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작가인 니콜라우스 피퍼가 신문사 경제부 편집장이란 이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돈에 중심이 맞춰져 있으면서도 돈 버는 경제 활동과 관련해 경제 이론을 배울 수 있는 책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정말 많은 종류의 경제동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건 아마도 보도 셰퍼의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을파소)일 것이다. 나오자마자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경제동화의 상징처럼 자리를 잡았다. 『펠릭스는 돈을 사랑해』와 마찬가지로 열두 살 아이가 돈을 벌고 투자를 해서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파고들 수 있었던 건 역시 열두 살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또 『펠릭스는 돈을 사랑해』처럼 어려운 경제 용어가 나오지도 않고, 실패도 하지 않고, 마치 지금이라도 도전을 하면 당장에 누구라도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아이들이라도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기대 심리로, 아이들은 부자가 되어서 해보고 싶은 걸 맘껏 해보고 싶은 마음에 이 책에 빠져들어 갔다. 덕분에 이 책은 처음엔 키라의 성공 노트를 응용한 『키라의 용돈 기입장』으로, 다음엔 『만화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 1-3』로 이어지면서 독자층을 넓혀 나갔다. 또 ‘키라의 경제 교실’이라는 시리즈로 『초등학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경제 이야기 51』, 『부자가 된 신데렐라 거지가 된 백설공주』도 나왔고, 계속해서『키라의 경제 어드벤처 1-3』가 나오면서 키라의 부자 열풍을 이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만화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는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를 그대로 만화로 옮긴 거지만 다른 책들은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하고는 상관없이 부자되기의 대명사가 된 키라를 이용한 전혀 다른 기획물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키라의 경제 어드벤처』의 경우 경제 전문가인 공병호 씨가 글을 쓰고 만화로 엮은 책인데, 공병호 씨는 키라와 키라를 도와주는 개 머니와 함께 만화의 등장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만 고민하는 열두 살 소녀
이런 책들을 읽고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스스로 돈을 벌게 되었고, 또 경제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적어도 출판사만큼은 확실하게 키라 덕을 봤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한 살을 더 먹은 키라의 활약상을 그린 『열세 살 키라』의 원저작권을 작가로부터 직접 구입함으로써 해외 시장 공략까지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출판사 입장에서는 키라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끌었던 것일까? 일단 키라가 고민하는 돈 문제가 아이들의 고민과도 서로 통한다는 점일 것이다. 문제는 용돈만으로는 해결이 되지가 않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든지 혹은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거나 하는 점이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읽다보면 스스로를 반성하게 한다. 계획적으로 살지 못한 것,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 등등 이런 저런 것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이런 기분에 취해 읽어가다 보면 돈이야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키라는 소원 상자를 만들고 난 뒤 침대에 누워서도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돈을 버는 게 목표이긴 하지만, 과연 이런 모습이 열두 살 아이의 모습이어야 할까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굉장히 교묘하다고 할 수 있다. 독자의 현실적인 문제를 건드려 자기 반성을 하게 하면서 결국은 가난한 사람은 능력도 자신감도 없는 사람으로 몰아가며 모든 걸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돈벌이 경제에서 벗어난 경제동화를 기대한다
현실 인물인 예담이의 성공담인 『예담이는 열두 살에 1,000만원을 모았어요』(명진출판사)는 키라 이야기의 우리나라 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키라와 예담이는 똑같이 부자가 되지만 돈을 버는 방법은 다르다. 작은 차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쩌면 경제동화의 허상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예담이는 집안 일을 도와서 용돈을 모으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키라의 경우 집안 일을 해서 돈을 벌지는 않는다. 처음엔 집의 잔디를 깎고 용돈을 받을까 생각하지만 머니는 집안 일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며 당연한 일을 하고서 부모님께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경제 논리로 따질 때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하는 건, 키라의 위치와 예담이의 위치가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반이 있는 나라에 사는 키라에 비해 돈을 벌 수 있는 기반이 없는 우리나라의 예담이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좀더 치사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돈의 액수 면에서도 키라에 훨씬 못 미치고 말이다. 이건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사람이 처해있는 기반 역시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고, 결국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점에서 강수돌 교수의 『지구를 구하는 경제 책』(봄나무)은 참 반갑다. 경제를 돈벌이로만 보고 개인의 돈벌이에만 맞춰지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사람과 자연이 모두 건강하게 살지를 생각하는 ‘살림살이 경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이솝우화의 토끼와 거북이가 아니라 서로 도와서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길, 그 길을 여러 측면에서 스스로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책을 계기로 경제동화들도 돈벌이 경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으면 싶다.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20호(2005년 5월 5일) '키워드로 본 어린이 책 시장' 가운데 한 편으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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