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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우리창작

자연 속의 아이, 동화 속의 아이

by 오른발왼발 202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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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자연이 담긴 동화'라고 하면 먼저 '생태동화'가 떠오른다. 그만큼 어느새 우리에게 생태동화가 익숙해졌다.
그런데 '생태동화'란 뭐고, 생태동화가 각광(!)을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생태동화'라 일컬어지고 있거나, 혹은 생태동화라는 딱지가 붙어 나온 책들을 살펴보니 대개는 동물이나 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 책이다. 동물이나 식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사건을 끌고 나가기도 하고, 때론 사람이 이들 동물이나 식물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표현 방법이 다를 뿐이지 대개 자연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먼저 읽힌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삶이 어느새 자연과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린 듯하다. 지금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뛰놀며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아니라, 자연이란 특별히 시간을 내서 찾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삶에서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특별히 생태동화가 부각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 아이들에게 자연은 그 자체가 장난감이요 친구였다.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풀들을 뜯어 풀각시를 만들고, 우산도 만들어 쓰고, 물레방아도 만들어 놀았다. 커다란 나뭇잎으로 모자도 만들어 쓰고 화관에 반지도 해 꼈다. 이 풀 저 풀, 이 꽃 저 꽃 꺾어다가 자르고 찧고 해서 밥이며 반찬을 만들어 소꿉놀이도 했다. 어쩌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우면 칼 찬 장군이 되었다가, 지팡이 짚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기도 했다.

 

「콩닦아 줄게 나무새기 나라, 콩닦아 줄게 나무새기 나라.」
웅철이는 먼지가 폴폴이는 봉당우를 손바닥으로 살살 쓸면서 이러케 외였습니다. 그러니까 노르스름하고 파릇파릇한 나무새기가 흙속으로부터 콩을 어서 달라는 듯이 그 솔닢새 처럼 뾰죽뾰죽한 입들을 짝짝 벌리면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웅철이는 콩을 닦아준다던 약속은 금방 잊어버리고 그 고은 나무새기들을 쪽쪽 뽑아서 조갑지 안에 담었습니다.
                           - 주요섭, <웅철이의 모험>, 《소년》 1937. 1.

 

아이는 봉당 흙바닥을 손바닥으로 살살 쓸으며 나무새기가 자라길 바란다. 그 바람 속에는 그래야 나무새기를 뽑아 조갑지 안에 담아 김치도 담고 다른 반찬도 하면서 소꿉놀이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런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위의 풀들을 익힌다. 또 풀들은 곧 자신의 놀잇감이기에 한없이 소중하다.

 

2. 자연 속에서 노는 아이들의 놀이와 노래

 

옛날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다.

 

달팽아 달팽아

황소뿔내라 염소뿔내라
달팽아 달팽아
황소뿔내랴 염소뿔내라
달팽아 달팽아
황소뿔내라 염소뿔내라 / 황봉난
         편해문, 《옛아이들의 노래와 놀이 읽기》114-115, 박이정

 

아이들이 달팽이를 보며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그저 바라보며 노래만 부르는 게 무슨 재민가 싶지만 아이들이 부른 노랫말처럼 달팽이가 뿔을 내밀고 뚤레뚤레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다들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도 달팽이는 뿔을 내었겠지만 아이들은 마치 달팽이가 자신이 건 주문에 걸린 듯 좋아한다.

 

개미야 개미야
빨간불 켜라
파란불 켜라
개미야 개미야
빨간불 켜라
파란불 켜라 / 김수남
          편해문, 《옛아이들의 노래와 놀이 읽기》106쪽, 박이정

 

개미를 몇 마리 잡아 도라지꽃 속에 넣고 흔들며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그러면 개미산 때문에 도라지꽃 색이 바뀌게 된다. 마치 학교에서 리트머스 종이로 산성 실험을 해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 아이들은 굳이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놀이가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이 노래가 되고, 자연스럽게 노래는 놀이이자 학습 과정이 된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느 곳에 가서 뛰논들 재미없는 게 없다. 풀밭은 풀밭대로, 모래밭은 모래밭대로, 돌밭은 돌밭대로 지천이 다 놀 곳이다. 자연과 아이들은 하나가 되어 논다.

 

 

풀밭에 놀 때는

 

                     권태응

 

풀밭에 놀 때는
풀밭이 재밌고

   삠삐기 쏙쏙 찾아 뽑기
   네 잎 달린 클로버 찾아내기

모래밭에 놀 때는
모래밭이 재밌고   

   두꺼비집 짓기 고누 묻기
   맨발 벗고 씨름하기 재주넘기

돌밭에 놀 때는
돌밭이 재밌고

   공깃돌 비삿돌 골라갖기
   장독대에 고여 놀 예쁜 돌 찾기
              - 이오덕,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158-159, 소년한길

 

이처럼 놀이가 있기에 일을 하러 가는 길도 즐겁다. 농사일이란 어른 아이가 따로 없는 가족의 일이다. 고추나 목화를 따러 갈 때, 일 생각만 한다면 얼마나 지겨울까. 하지만 아이들이 가는 길목엔 자연과 함께 하는 놀이가 있다. 또랑물에 가서 찰방찰방 거려도 보고 고기도 잡는다. 자연 속에서 일과 놀이와 지식이 하나가 된다.

 

또랑물

 

           권태응

 

고추 밭에 갈 적에
건너는 또랑물.

찰방찰방 맨발로
건너는 또랑물.

목화 밭에 갈 때도
건너는 또랑물.

찰방찰방 고기 새끼
붙잡는 또랑물.
              - 이오덕,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52-53, 소년한길

 

3. 옛이야기 속에 함께 하는 자연의 모습

 

옛 아이들의 노래와 놀이도 그렇지만 옛날 이야기에서도 자연에 대한 생각을 살필 수 있다.
나무, 돌, 물, 동물과 같은 자연물들은 때론 하나의 자연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가끔 만날 수 있는 당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는 결코 사람만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며, 모두가 더불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단군 신화에서 곰에서 사람으로 변한 웅녀가 낳은 단군 왕검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거나, 무속에서 당나무를 하늘과 땅, 신과 사람이 만나는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주몽이 동부여를 도망나와 쫓기다 강에 이르렀을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줘서 건너거나, 견우 직녀를 위해서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를 놓아 둘을 만나게 해 주는 이야기들도 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두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마을 사람들이 땔나무를 못 구했다. 그 마을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마을 젊은이들이 그 나무라도 베어다 때겠다고 나선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 나무는 몇십 년 동안 우리 동네 사람들이 위하던 나무라서 베면 안 되니 대신 자기 집 행랑채를 헐어다 때라고 한다. 죽은 나무라면 모를까, 산 나무를 함부로 베면 못 쓰는 거라며 말이다.'옛 아이들의 노래와 놀이도 그렇지만 옛날 이야기에서도 자연에 대한 생각을 살필 수 있다.
나무, 돌, 물, 동물과 같은 자연물들은 때론 하나의 자연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가끔 만날 수 있는 당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는 결코 사람만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며, 모두가 더불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단군 신화에서 곰에서 사람으로 변한 웅녀가 낳은 단군 왕검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거나, 무속에서 당나무를 하늘과 땅, 신과 사람이 만나는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주몽이 동부여를 도망나와 쫓기다 강에 이르렀을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줘서 건너거나, 견우 직녀를 위해서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를 놓아 둘을 만나게 해 주는 이야기들도 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이듬해 봄이 되어 농사일을 시작해야하는데 행랑채가 없는 두 노인 집에는 아무도 머슴을 살겠다고 오는 사람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떠꺼머리 총각이 찾아와 머슴을 살겠다고 한다. 낮에 와서 일하고 저녁에는 집에 가서 잘 테니 행랑채는 필요없단다.  그리고 일을 배우는 셈치고 일을 할테니 새경 걱정도 하지 말란다.
그런데 이 총각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못자리를 찬물이 솟아나는 샘가에 한다. 그러자 날씨가 가물어 다른 논의 못자리는 다 말라죽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한테 와서 모를 나눠 받아 심는다. 온 마을이 풍년이 든 건 물론이다.
이렇게 한 해 농사를 짓고는 하직 인사를 한다. 주는 새경도 안 받으며 하는 말이, 은혜를 갚으려고 일한 것 뿐이라고 하는데, 이 총각이 바로 느티나무 총각이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더 잘 위하고 모두들 농사 잘 짓고 잘 살았다 한다.

 

흔히 '느티나무 총각'으로 불리는 우리 옛이야기다. 땔나무가 없어서 고생을 하면서도 목숨을 갖고 있는 것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또 이렇게 했을 때 다시 나무가 사람을 위해 은혜를 베풀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이야기다.
자연에 대한 이런 모습은 서양의 기독교 중심적인 자연관과는 완전히 대별되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동물에 이름을 붙인다. 이건 사람과 동식물의 지위가 처음부터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보다 위에서 동물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자연을 이용하고 변모시키는 것은 신의 계획이고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자연과 사람은 그 어느 게 우위에 서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은 사람들이 받들고 위해준 만큼 은혜를 베풀어준다. 사람과 자연은 각기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함께 존재한다.

 

4. 개발의 논리, 서양 중심의 자연관이 들어오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앞선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물 밀듯이 들어오는 제국주의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엄청난 과학적 성과와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침략해 온 제국주의의 힘에 우리는 충격을 받고 만다. 그리고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의 발전된 모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배움이 강조되고 과학적 사고가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1920-30년대에 발행되던 잡지 《어린이》 《신소년》 등에 유난히 과학 상식에 관한 기사가 많은 것도 그런 까닭이다.

 

참말독각이가춤을추고 귀신의노래를하는듯한밤중임니다. 무시무시한것이 실노독각이가나와 덥쳐깔고안는듯함니다. 잇다금 머리가옷삭옷삭해지고 가슴이두군두군함니다. 쥐색기만 밧삭해도 아구머니하고 나아가잣바지게된형편임니다. 다른사람들도 그러케무서운지 잔기침을 콕콕하며 담배불을 반짝반짝 피이며 참말 누가방긔만뽕뀌어도으악!하고 잣바질형편입니다. 그러나 나는 적으나마 중학교출신인지라 본래 독각이는업는줄알므로 그닥 무서워하지는안엇습니다.하지만 이런 모습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앞선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물 밀듯이 들어오는 제국주의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엄청난 과학적 성과와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침략해 온 제국주의의 힘에 우리는 충격을 받고 만다. 그리고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의 발전된 모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배움이 강조되고 과학적 사고가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1920-30년대에 발행되던 잡지 《어린이》 《신소년》 등에 유난히 과학 상식에 관한 기사가 많은 것도 그런 까닭이다.

                              <중략>
세상에는 이런일이만슴니다. 독각이란 본래없슴니다. 모다사람의작란이람니다.
                      - 박달성, <독갑이 잡던 이야기>, 《어린이》 1926. 2

 

동네에 연달아 불이 일어나자 동리 사람들은 이게 모두 독각이 장난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장정들이 모여서 독각이를 잡기로 한다. 동리 장정들이 모두 모였지만 한밤중 으시시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 분위기 속에서도 작가는 자기는 '중학교 출신'이라 독각이가 없는 걸 알기 때문에 그다지 무서워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앞에서 분명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무서운지'라고 말하며 무섭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뒤이어 '중학교 출신'임을 내세워 그다지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 무섭고 안 무서운 게 중학교 출신이고 아니고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 건만 작가는 애써 강조한다.
중학교는 신식 교육, 즉 서양식 교육이다. 거기서 배운 지식은 신지식이고, 신지식이란 인간 중심의 과학적 사고다. 당연히 독각이 장난이니 하는 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신식 교육을 받았어도 정서를 무시할 순 없다. 어려서부터 독각이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그래서 독각이가 불을 지르고 다녔다는 심증은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그러니 무섭다. 그걸 애써 스스로 '중학교 출신'이라 강조하며 억누른다.
기본 바탕은 전통적인 자연관이 그대로 흐르지만 머리에서는 빨리 서양의 근대적 사고를 의식적으로 배우고 익혀 나가서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이 시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 자연관과 서양의 인간중심적인 자연관과의 경계에서 서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모습은 지식인들의 몫이었다. 위에서 작가가 굳이 '중학교 출신'임을 내세우는 것도 그 까닭이다.

 

5. 1970-80년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그래도 아직까지 민중들 사이에서는 우리 전통의 자연관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해방이 되고, 6.25를 겪으면서도 커다란 변화가 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1970년 새마을 운동을 계기로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은 본격적으로 깨져나가기 시작한다.
근면·자조·협동이라는 표어를 내세운 새마을운동은 처음 시작은 농가의 소득배가운동이었다. 하지만 당시 국민의 70%가 농민이었고, 도시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농촌 출신이었기에  단순한 농가의 소득배가운동으로만 여길 수는 없었다. 경제적인 자립을 통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 국민에게 의식화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일이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새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는 새마을노래는 시도 때도 없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1968년의 국민교육헌장 발표, 1969년 3선 개헌,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비상사태 선포, 1972년 유신헌법 반포의 흐름 속에서 새마을운동은 국민들을 80년대의 장밋빛 환상으로 내몰고 있었다.
당시는 잘 살기 위한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통하던 때였다. 초가집을 없애고 마을 길을 넓히면 조국 근대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때였다. 개발을 위해서 자연은 얼마든지 사람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사람이 자연을 제어할 수 있다는 서양의 자연관이 새마을운동을 타고 자연스럽게 전파됐다. 산을 싹둑 잘라내거나 산을 뚫어 터널을 내고 고속도로를 만드는 일은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새마을운동은 학교에서도 바람이 거셌다. 당연히 인사 잘하기, 부모 공경하기, 저축 잘하기 등의 학교 새마을 운동과 함께 의무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 있었으니 바로 '자유교양문고'다. 책이 귀했던 당시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고, 그래서 학교에서 사야만 했던 '자유교양문고'의 힘은 컸다. 마치 권장도서목록처럼 나와 있는 목록 가운데 몇 권인가를 사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창작동화나 옛날 이야기도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주로 나라를 구한 인물 이야기였다. 《백사 이항복》《이율곡》《성웅 이순신》《오성과 한음》《박씨 부인》같은 책들이었던 것 같은데 이들 책은 당시의 반공 교육과 이어지면서 애국심을 고양시키는데 일등 공신 노릇을 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아동문학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사회의 밝고 긍정적인 면만을 돋보이게 하거나 자연을 그저 아름답게만 꾸며서 보여주려는 '전원문학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과 전원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려면 먼저 자연과 전원에 사는 사람들의 괴로움과 기쁨을 함께 그려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전원 속의 인간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데 정서적인 면에만 기울어지지 말고 과학적인 접근 방법도 같이 겸해야 할 것입니다. 과학적인 접근이란 농촌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문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 김요섭, <민족문학으로서의 전원>, 《동화 문학》, 1976. 6

 

언뜻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원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전원주택'을 떠오르게 하는 것만큼 그 속에 심각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오덕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라면 서민성을 기본 테제로 삼는 이론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주의 깊이 이 문맥을 따라가 보면 자연, 혹은 전원이라고 하는 것과 인간이라는 것을 아주 이질적인 대립물로 인식하고 있음이 쉽게 발견된다. 인간을 그리는 것이 곧 자연을 그리는 것이고, 자연을 말하는 것이 곧 인간을 말하는 것이 될 터인데, 그렇게 보아야만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교감>도 이뤄질 터인데, 『전원을 아름답게 형상화』하기 위해 『인간의 괴로움과 기쁨을 함께 그려가』야 한다고 하고, 『전원 속의 인간을 파악하는데 정서적인 일면에만 기울이지 말고 과학적인 접근 방법도 같이 겸해야』한다고 한 것은 인간과 자연을 유리시켜 놓고 그 두 가지를 적당히 병행해서 그린다는 지극히 온당한 듯하면서도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론이다. 그리고, 이 문맥에 나타난 대로 <전원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것과 <정서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 주가 되어 앞서고 그 뒤를 <인간>이 따르는 것이 되고 있으니, 말하자면 전원이 주가 되고 인간은 전원에 부속된 <소도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면만 보아서도 전원문학의 발상이 도시에 살고 있는 작가가 자연이라는 것을 잘못 알고, 인간 사회를 떠난 심리 속에서 그려내는 전원이라는 유토피아에서 마음의 휴식처를 만들고자 하는 도피 문학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이오덕, 《시 정신과 유희 정신》155-156, 창비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근대화의 폐해를 알리는 동화들은 나오고 있었다.

 

5. 1970-80년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1) 이원수

가장 대표되는 작가는 이원수다. 1971년-1973년까지 《카톨릭 소년》에 발표한 《잔디 숲 속의 이쁜이》는 일개미 이쁜이의 모험을 통해서 자유와 착취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올바른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개미의 생활이나 생태를 바탕으로 쓰여졌기에 단순한 우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불새의 춤>(1970)에서는 사람에 의해 사육되며 학대받는 두루미 28호의 모습을 통해 실제로 우리에 갇혀, 사람들을 위해 공연을 준비하는 동물들의 비참한 신세를 고발하고 있다.
<유리성 안에서>(1971년)는 유리병에서 나가지 못하고 혼자 남게 된 코스모스 씨 이야기다. 코스모스 씨는 자기가 나가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지 못하고 딴딴한 씨앗 그대로 유리병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은 결국 성 같아 보이는 유리병을 무덤으로 삼게 되는 것임을 안다.
그럴 듯한 성, 그 속에 갇힌 코스모스 씨를 통해 생명의 영속성을 알려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두 작품 모두 자연의 이야기 속에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고발하는 내용을 함께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게 자연을 인간 중심으로만 바라보는 조국 근대화 이데올로기라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나온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미 101호>(1974년)는 과학의 힘으로 태어난 플라스틱꽃이 처음엔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듯 하지만 결국 진짜 생명이 있는 꽃이 피자 버려지고 마는 이야기다. 과학이 만들어내는 가짜는 진짜 생명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이원수에게 자연이란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서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폭압적이고 인위적인 힘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 또 겉으로 보기에 번드르해보여도 그게 생명을 거스르는 것이거나 생명이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한편 이원수는 <희수와 라일락> <나비 때문에> <바둑이의 사랑> <갓난 송아지> 같은 작품에서 개나 고양이 송아지 같은,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과의 교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 동물들은 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마음이 통한다. 사람과 동물은 한 집 식구다. 이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권정생

권정생의 작품은 또 다르다. 권정생은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첫 작품인 <강아지 똥>(1969)은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강아지 똥이 민들레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된다는 이야기다. 자연에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존재 조차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또 자연이란 강아지 똥이 흙이 되고 거름이 되듯이 순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에게 자연의 모든 것은 동등할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의 눈물>(1983, 산하)을 보자. 돌이 토끼는 칡넝쿨이랑 과남풀이랑 모든 풀들을 다 뜯어먹지 못하게 된다. 보통 음식을 먹을 때도 식물을 먹을 때는 남의 생명을 먹어치운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풀을 먹고사는 돌이 토끼는 차마 풀을 뜯어먹을 수가 없다. 먹어야 산다는 건 알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먹어 없애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돌이 토끼는 하느님처럼 보리수 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 달라고 빈다.

"그래 그렇게 해 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하느님의 말씀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모든 걸 내 목숨과 똑같이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세상, 권정생은 그런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생각은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 돌이 토끼의 눈물, 하느님의 눈물, 권정생의 눈물이 갖는 의미다.

그리고 <빼떼기>(1988)는 현실 공간 속에서 생명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빼떼기는 그 걷는 모습이 빼딱빼딱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병아리 때 아궁이 안에 들어갔다가 온 몸이 데어서 부리도 뭉뚝하게 문드러지고, 발가락도 모두 한 마디씩 떨어져 나가 버리고, 종아리도 오그라져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순진이네 식구들은 빼떼기를 정성껏 보살폈고, 빼떼기 스스로도 용감하게 살아났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피난 길에 빼떼기를 데리고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는 '본래부터 짐승을 키우는 건 잡아먹기 위한 것이니 빼떼기도 우리가 잡아먹자'고 한다.
빼떼기를 돌보는 과정도 감동적이지만, 빼떼기를 잡아먹을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뇌하는 순진이네 식구들 마음이 고스란히 다가온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돌이 토끼라면? 권정생은 빼떼기를 통해 다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권정생의 이런 모습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오면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오소리네 집 꽃밭》(1997, 길벗어린이)에서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꽃밭이 아닌 산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진짜 꽃밭의 이야기를 한다. 《비나리 달이네 집》(2001, 낮은산)에 나오는 개 달이는 커다란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었던 아저씨에게 사람만의 세상이 아닌, 자연과 함께 하는 세상을 깨닫게 해준 존재다. 둘은 서로 소통하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한다.

이처럼 권정생은 자연에 대해, 생명에 대해, 삶의 방법에 대해 늘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준다.

 

 

(3) 이현주

동물원은 어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 가운데 하나다. 자연을 보기 위해 동물원을 찾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동물원은 결코 자연과 가까운 곳이 아니다. 동물원은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동물원은 동물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곳이다. 동물을 우리에 가둬두고 사람들의 눈요기감이 되게 하고 돈을 버는 게 목적이다. 동물들의 기분이나 상태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비싼 동물이라도 데리고 왔을 때 수익이 될 지 말지만이 중요하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동물을 좋아하고, 동물원 밖의 동물이라곤 별로 본 일이 없는 아이들에게 동물원은 천국이다. 때문에 당연히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은 갇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현주는 단편 <창경원에 나타난 비행접시>(1982)에서 이런 동물원의 모습에 대해 직접 문제제기를 한다.
창경원에서 신나게 온갖 동물들을 구경하는 환희네 식구는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를 미아보호소에 데려다 주러 나오다가 비행접시를 발견한다. 비행접시가 나타난 계기가 그다지 명쾌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어쨌든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을 향해 의미있는 말을 던지고 떠난다.

"안녕하세요. 나는 아가페 별나라에서 온 어린이랍니다. 지구별 어린이들과 사귀고 싶어서 먼 길을 달려왔어요. 참 날씨도 좋군요! 그런데 저 철망은 뭔가요? 왜 짐승들을 모두 가두어 놓았지요? 불쌍하게…… 우리 아가페 별나라에서는 철망이라든가 울타리라는 게 없지요."

이어서 동물을 가두었던 우리는 녹아내려 사라지고 사람과 짐승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즐겁게 논다. 하지만  비행접시가 떠나고 나자 모든 건 다시 전과 같이 되고 만다. 마치 꿈결처럼 말이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아이들은 짐승들과 함께 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물론 동물들이 왜 우리 속에만 갇혀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갖게 됐을 것이다.
자연이란 인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동물원을 통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6. 1990넌대 - 농촌에서 대안을 찾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 속에서 함께 뛰놀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88올림픽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강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가 가라앉는 때였다. 세계적으로는 냉전분위기가 종식되면서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전지구적 문제로 제기되는 시기였다. 아동문학에서는 이오덕이 《시 정신과 유희 정신》(창작과비평사, 1977)과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백산서당, 1984)에서 던져준 '열등 의식의 극복'과 '생명을 지키는 문학'이라는 대명제들이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는 때이기도 했다.

이 시기 주목하게 되는 작품이 바로 농촌, 산골 아이들의 삶이 담긴 이야기다. 농촌, 산골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지역이다. 그러면서 전통의 공동체적인 문화가 아직까지는 남아있고, 우리 전통의 자연관을 갖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서 눈에 띄는 작품을 발표한 이가 임길택이다. 《산골마을 아이들》(창작과비평사, 1990)은 그의 첫 작품집이다. 임길택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꽃 아이'에 나오는 자연을 '보선'이 것만이 아닌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어 갖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보선이의 자연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5월에 들어서면서 꽃의 가짓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어쩌다 모양이 신기하고 예쁜 꽃을 보면 아이들이 이름을 물을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모른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해야 하는 선생님은 낯뜨거울 때가 많았습니다. …중략… 한두 번 그 꽃을 들고 다른 선생님께 찾아가 보기도 하였지만 모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 바쁜 세상에 그런 이름 알아서 무슨 소용 있나요. 그냥 '노랑꽃' '빨강꽃' 하고 말지요." "그런 건 시험 문제에 안 나와 몰라도 돼요."라며 농담으로 넘겨 버리곤 했습니다.
                                  <중략>
어려서부터 우등생이라는 말을 집안 식구들이나 선생님에게 수도 없이 들어왔건만,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대학을 다닐 때까지 무얼 배웠나 싶습니다.

<들꽃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도회지에서만 살아오던 선생님이 면소재지의 아담한 학교로 발령을 받아서 간다. 보선이는 늘 교실 꽃병에 새로운 들꽃들을 꺾어다 꽂아다 놓아 선생님을 웃음 짓게 한다. 하지만 처음엔 진달래꽃이었던 것이 5월 들어 꽃의 가짓수가 많아지면서 선생님은 자기가 꽃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는 우등생으로 자랐지만 여기서는 우등생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학교에서 멀고 먼 보선이네 집을 찾아가면서, 보선이가 집에서 학교를 오가는 길을 가면서, 그제야 선생님은 보선이가 그 많은 꽃들을 꺾어온 곳을 본다. 그리고 꽃들마다의 숨결을 느낀다. 자연이란 학교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삶 속에 그대로 들어앉을 때만이 온전하게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보선이처럼 말이다. 자연을 '보선'이의 것만이 아닌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어 갖으라던 당부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이들에게만 하는 당부만은 아닐 것이다.

산골 아이 9

나는 산골 아이
동네 골목 마을 골짜기
안 가 본 데 없는
나는 산골 아이
아직 바다도 모르고
사람 많다는 서울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산골 아이
하지만 이다음
온 세상 둘러보고 싶은 꿈으로
가득 차 있는
나는 산골 아이

어느 골에 다래나무가 많고
어느 골에 메토끼, 노루가 많이 내려오는지
맑은 샘물은 어디서 솟는지
누구네 밭에 멧돼지가 잘 내려오는지
샅샅이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직 기차를 타 보지 않았고
바닷가에 서 보지도 않은
나는 산골 아이
먼 뒷날 나라 안 돌아볼 수 있다면
이 세상 구경 다닐 수 있다면
우리 산골 마을보다 더 좋은 데
어디 있나 찾아보겠어요.
                       (1997. 11. 30.)

임길택의 유고 시집 《산골 아이》(2002, 보리)에 실린 시다. 임길택은 '보선'이의 자연을 다시 한번 들려준다. 산골 마을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이 아이는 둘러보고 싶은 곳이 많지만 그래도 이 산골 마을보다 더 좋은 데는 없다고 확신한다. 자연을 알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큼 더 좋은 건 없음을 알려준다.

 

7. 자연, 환경 문제의 대두

1994년, 눈에 띄는 책이 발간되었다. 《도도새와 카바리아 나무》(웅진). 이 책은 손춘익이 1987년《새를 날려 보내는 아저씨》이후 7년 만에 낸 작품집이다. 그런데 '책머리에'부터 이 책의 성격을 보여주는 구절이 눈에 띈다.

글을 써 오는 동안에 내가 늘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연이었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물론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그것을 망각하고 오히려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켜 왔다. 지구는 지금 상처투성이가 되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추천사 격인 신경림의 작품 해설을 봐도 이 책에서 '자연'이 화두가 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손춘익 선생의 동화를 읽으면 우리한테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면 결국 우리 자신도 파괴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중략>
이 동화들을 읽으면 여러분들은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자라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동화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꿈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그 꿈은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있다고 이 동화들은 말해줍니다. 우리와 함께 사는 새며 짐승이며, 벌레며, 나무며, 풀이며, 흙이며, 돌이며, 그 모든 것들과 사이좋게 서로 사랑하며 사는 속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손춘익이 이전 작품 세계와는 달리 '자연'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쓰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그건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도도새와 카바리아 나무와 스모호 추장> 속에서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도도새와 카바리아 나무와 스모호 추장>은 1992년 브라질 리오에서 열린 세계환경회의에서 발표된 스모호 추장의 이야기를 동화 형식으로 옮긴 작품이다. 그만큼 작가가 리오 세계환경회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뜻한다.
리오 세계환경회의는 자연 파괴로 인한 환경 문제가 전지구적인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준 자리였다. 그래서 <도도새와 카바리아 나무와 스모호 추장> 역시 같은 문제 의식을 던져준다. 비록 우리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곧 닥칠 수 있는 일, 바로 우리 현실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을 파괴하는 주범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뼈저린 자각을 하게 해준다. 인간의 욕심으로 멸종된 도도새는 결국 카바리아 나무의 새싹도 돋지 못하게 한다. 자연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쪽이 망가지면 또 다른 쪽도 망가지고 만다. 이는 도도새의 멸종은 곧 자연의 파괴며 곧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8. 생태 동화의 등장

 

1997년 발표된 이상권의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창비)(절판->2018년 웅진주니어에서 재출간)는 '생태 동화집'이란 말이 붙어 있다. 지금이야 '생태 동화'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낯선 말이었다. 1998년 발표된 《풀꽃과 친구가 되었어요》(창비)(절판->2014년 현암사에서 재출간)에도 '생태 동화집'이란 말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이후 이상권은 생태 동화 작가의 상징처럼 되었다.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는 그 의미가 큰 작품이다. 그동안 동물 이야기가 외국 동물 이야기였다면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는 바로 우리 나라 동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수달, 족제비, 살쾡이, 긴 꼬리 들쥐, 다람쥐, 오리의 이야기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주변에서 함께 지내던 동물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동물들의 습성이나 생태도 잘 보여주지만 동물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동물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뭔가 이익을 얻기 위해 동물을 찾아나서는 사람도 있다(<나산강의 물귀신 소동> <두 발로 걷는 족제비>). 야생동물을 돈으로 사서 기르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사람이 야생동물을 아무리 행복하게 해줘도 야생동물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고양이가 기른 다람쥐>). 가축들을 물고가는 살쾡이를 잡으려고 덫을 놓았다가 덫에 걸린 살쾡이의 모습을 보고는 풀어주기도 한다(<밤의 사냥꾼 살쾡이>)
사람이란 동물들을 해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보호해주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사람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읽는 내내 갈등을 하다가도 결국은 보호해주는 쪽을 택하게끔 한다.

 

"그러니까 지지난주에 검둥 오리의 자식들이 다 날아갔지. 야아, 정말 내 마음이 날아가는 것 같더군. 아까운 오리탕이 날아가는데도 기쁘기만 하더라. 저 연못을 가르고 사뿐히 날아 올라서 마당을 몇바퀴나 돌았는지 몰라. 내 평생 그렇게 기쁜 날도 없었어. 그런 기분…… 나 아직 자식을 낳아 보지 않았지만, 아마 내 자식을 결혼시키면 그런 기분이 들 것 같더란 말야. 연못에 남은 검둥 오리는 나보다 더했겠지만……"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에서 검둥 오리의 주인인 양갑수 씨가 한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양갑수 씨처럼 기뻐한다면 자연은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을까 싶다.

또 한 사람이 있다. 1998년 《버들붕어 하킴》(현암사)(절판->2011년 푸른숲주니어에서 재출간)을 발표한 박윤규다. 《버들붕어 하킴》은 민물고기 이야기다. 버들붕어 하킴은 사람들의 환경 오염과 외래종 물고기로부터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모험을 펼친다. 버들붕어, 금강모치, 쉬리, 어름치, 강준치, 갈겨니, 동자개, 참종개, 산천어, 은어 등 우리가 잘 몰랐던 우리 민물고기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환경 문제와 외래종 물고기의 문제 등 사회 문제들이 심각한 우리의 문제로 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선다.
그런데 이상권과 박윤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좀 다르다. 이상권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보고 자란 것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자연의 생태를 알아가는 과정 쪽에 초점에 맞추고 있다. 하지만 박윤규는 민물고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직접 공부를 하고, 그 민물고기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상권의 작품은 어떤 계기를 통해 아이가 동물(《하늘로 날아간 집오리》)이나 풀꽃(《풀꽃과 친구가 되었어요》)에 대해 혹은 똥의 순환에 대해(《똥이 어디로 갔을까》(2000년, 창비))(절판->2016년 현암사에서 재출간) 알아가게 되면서 자연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다. 박윤규는 민물고기들의 입장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민물고기가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저지른 폐해와 환경문제 쪽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어느 쪽이나 동화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같지만 바라보는 관점은 차이가 있다.
어쨌든 이후 두 사람에게는 '생태 동화 작가'란 꼬리표가 붙곤 한다. 이 꼬리표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게 분명하다. 자신을 규정짓는 족쇄가 되고, '생태'라는 말에 얽매어 강박감을 갖고  생태의 겉모습만을 드러내서 쓸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그 동물의 생태가 나오기보다는 설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대상이 되는 동물이나 식물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게 될 뿐이다. 문학으로서 감동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후 나온 많은 '생태 동화'들의 한계는 거기서 나온다.

 

생태동화란 동식물의 슬프고 아름답고 고단한 삶을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는 것이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과학적인 지식을 얻고, 환경파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된 생태동화에서는 저절로 그런 부수적인 지식이나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그건 인간의 삶을 다룬 문학작품도 마찬가지다.

「샬롯의 거미줄」처럼 완전히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생태동화를 쓰려면 발을 움직여야 한다. 곰 이야기를 쓰려면, 곰에 대한 지식을 배우려고 할 게 아니라 곰 이야기가 있는 곳을 찾아나서야 한다. 지리산이며 태백산 기슭, 갈 수만 있다면 만주 같은 곳에 가서 그런 이야기들을 찾아야 한다. 그게 생태문학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면 그 이야기 속에 곰에 대한 지식은 충분히 들어있기 때문이다.((http://gamja3.com)(지금은 홈페이지가 없습니다)

 

이상권의 생태 동화에 대한 생각이다.
아직까지 '생태동화'란 어떤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몰론 하나의 장르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들은 생태 동화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9. 자연에서 삶의 방향을 배우다

황선미의 작품은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아이들의 생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자연 이야기다.《샘마을 몽당깨비》(1999), 《마당을 나온 암탉》(2000), 《과수원을 점령하라》(2003)는 황선미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공통점이 있다.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혹은 근대적인 것과 전근대적인 모습이 대비되면서 그 경계선에 있는 주인공은 인위적인 것, 근대적인 것을 떠나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찾아간다.
《샘마을 몽당깨비》에서는 가장 번잡한 도시의 복판에 폐가로 남아있는 오래된 기와집이  배경이다. 그곳은 몽당깨비가 인간인 버들이를 짝사랑하면서 본의 아니게 파괴한 자연의 상징이다. 아름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몽당깨비는 기와집을 자연의 상태로 돌려놓은 뒤 기꺼이 다시 벌을 받으러 은행나무 뿌리로 들어간다. 도시 속의 쉼터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평생 알 낳는 기계로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닌 양계장의 암탉 잎싹이 그곳을 나가서 자기가 직접 알을 낳고 품어보겠다는 희망을 갖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리고 양계장, 마당, 마당 밖의 넓은 세계로 나가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마당 밖의 세계는 자연이다. 자연은 여기저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안전하다는 이유로, 편안하다는 이유로 인간이 만들어놓은 공간 속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생명이 있는 진짜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과수원을 점령하라》는 고층아파트가 세워진 삭막한 도시의 가운데 남아있는 과수원과 이를 차지하려는 온갖 생명체들이 노력이 담긴 책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기도 하고, 권위적인 왕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렇게 과수원으로 몰려드는 동물들은 자기 삶이 삭막하기에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다. '점령하라'는 전투적인 제목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를 보완해주는 건 생명을 사랑하는 과수원 할머니와 은행나무 귀신 같은 전통의 자연관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세 작품 모두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공간(기와집, 양계장, 도시)은 위험하고 삭막하고 생명이 없는 공간이다. 기와집으로 흐르게 했던 샘물은 사라지고, 양계장의 암탉은 생명이 없는 달걀을 생산해낼 뿐이다. 생명이 없는 도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게 한다. 해결 방법은 조금씩 다르다. 기와집과 과수원은 삭막한 도시 한가운데 남아있는 자연이요, 쉼터이다. 잎싹이 나간 마당 밖의 세계와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인위적인 공간이 갖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게 해주는 건 바로 자연이라는 점은 같다. 잎싹처럼 자연 그 자체로 나설 것인지 혹은 도시에서 자연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낼 것인지……. 황선미의 작품은 자연과 삶을 일치시키면서 자연을 내 삶 속에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10. 맺는 말

안미란의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2001, 창비)에는 암울한 미래의 모습이 보인다. 단백질이 첨가된 밥, 특수 소화 효소가 들어간 국. 언뜻 보기엔 자기가 필요한 걸 얼마든지 골라서 먹을 수 있는 편리한 생활처럼 보이기도 한다. 굶어 죽는 사람도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배급되는 음식이 있는데 그건 진짜 음식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음식이다. 이 음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장은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안전한 음식이라고 말한다. 막상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인공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식물은 씨앗을 맺지 않는다. 씨앗을 독점해서 공급하는 회사가 씨앗을 맺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서,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연은 본 모습을 잃어간다.

주인공 진희는 속삭인다. '모두의 씨앗, 모두 함께 나눌 수 있던 앎이 이제는 한 사람이나 회사의 것이 되었다. 이게 옳은 일인가?'

책 속의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의 현실 모습 그대로다. 자본의 힘은 빈곤추방이니 세계화니 하면서 밝은 미래를 제시하는 듯 하지만 한 껍질만 들춰보면 오히려 자연을, 지구를 망치고 결국은 사람들의 앞날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동물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온갖 애완동물의 재롱을 보여주곤 한다. 개나 고양이는 물론이고 야생에 살아야 할 동물들이 마당도 없는 집안에서 함께 산다. 그렇지 않아도 동물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아이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 그게 동물을 보호하고 사랑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입장에서 일방으로 자연을 바라본다.
그 가운데 개는 더욱 특별하다. 다른 동물들보다 함께 한 역사가 오래된 만큼 사람들과의 밀착도가 강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그 관계가 늘 원만한 건 아니다.

박기범의 《새끼 개》(2003, 낮은산)(2020년 절판)에서 아이들은 그저 새끼 개를 예뻐해주기만 하면 개도 행복할 거라 여긴다. 하지만 새끼 개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의 손길을 물리치고 싶지만 그 말조차 전할 길이 없다. 결국 새끼 개도 죽고 만다.
아이들은 단순히 놀이감으로서 개가 필요할 뿐이다. 그 개가 어떤 개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두 아이에게 다른 개가 주어주는 순간 새끼 개는 잊혀진다. 아니 가끔 생각나긴 해도 그건 단순한 기억일뿐이다. 자기가 키우던 개가 죽으면 조금 슬프긴 해도 '또 사면 되지'라 여기는 아이들도 많다. 그러고 보면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는 많지 않은가.

혹시 우리는 자연도 이렇게 다루고 있는 건 아닐까 여겨진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우리 멋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건 아닐까 여겨진다. 개에게 기저귀 채우고 예쁜 옷을 입혀 함께 뿌듯해하며 나들이 가듯이 자연도 우리 멋대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놓고는 일방적으로 자연을 잘 가꾸었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자연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는 다른, 어딘가 멀리 가서만 만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아이들이다. 인위적인 것이 가장 자연적인 모습인냥, 자연을 사랑하는 모습인냥 거짓 행세를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이제는 왜곡된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진짜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줘야 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자연 속에 살면서도 자연이 없다고 여기기도 하고, 자연이 없는 곳에서 자연 속에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건 주위에 왜곡된 자연의 모습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곡된 자연은 우리의 삶을 왜곡되게 만든다. 왜곡된 삶은 파멸을 가져올 뿐이다.
새삼 자연의 소리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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