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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한겨레신문-아이랑 책읽기

종합병원

by 오른발왼발 2021.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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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5. 23.

 

 

《종합병원》

호타카 쥰야 글/아라이 료오지 그림/구혜영/제삼기획/절판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하고 물으면 일곱 살짜리 우리 아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죠.
“간호사!”
아이가 간호사가 되고 싶은 건 뱀 간호사 때문이에요. 뱀 간호사는 <종합병원>(제삼기획)이란 책에 나오는 인물이죠. 아이가 이 책을 처음 본 건 다섯 살 때였어요. 한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읽어 달라던 책이었죠. 제가 미처 못 읽어 줄 땐 혼자서 책을 보는데 입가에 웃음이 잔뜩 묻어 있죠. 뱀 간호사의 활약에 감탄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뱀 간호사의 활약을 좀 알려 드릴 게요. 먼저 원숭이 의사가 신기한 잎과 뿌리를 많이 주면 뱀 간호사는 그걸 먹고 물도 많이 마시죠. 그럼 원숭이 의사가 뱀 간호사의 몸을 붙잡고 막 흔들어요. 그런 다음 다시 뱉어내면 여러 가지 약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러곤 환자가 오기 시작하면 뱀 간호사 특성을 십분 활용하죠. 감기 걸린 여우에겐 약을 마시고 난 뒤 꽉 물어서 주사를 놓고요, 곰 형제들의 키와 가슴둘레를 재는 자가 되기도 해요. 배가 아픈 돼지 뱃속에 들어가 구부러진 못도 빼 오고요, 코끼리의 막힌 코를 뚫는 긴 막대가 되기도 하죠.
아이가 병원 놀이를 시작한 건 이 무렵부터였을 거예요. 아이는 늘 간호사 역만 하겠다고 했죠. 그것도 뱀 간호사 역만 말이죠. 

“난 뱀 간호사야.” 

아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제 입을 벌려 보고, 팔을 깨물어 주사를 놓고, 자리에 뉘어 놓곤 했죠. 늘 간호사만 하겠다고 하는 게 혹시 여자라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죠. 보통 병원에 가면 의사는 주로 남성이고, 간호사는 주로 여성이잖아요. 책에도 주로 남성 의사만 나오고 여성 의사는 나오지 않고요. 그래서 이런 책들 때문에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성 역할에 고정관념이 생긴다고 투덜거리기도 했죠.
그러다 한동안은 다른 책에 빠져 이 책을 잊고 지냈어요. 아마 몇 달은 지났을 때일 거예요. 아이는 이 책을 다시 발견했죠. 그리곤 하는 말, 

“왜 의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뱀 간호사만 일해?” 

저는 깜짝 놀랐죠. 원숭이 의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결코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아이 눈에는 처방을 내리는 의사보다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해내는 뱀 간호사의 모습이 훨씬 더 부각되어 보였던 거죠. 그리고 이건 처음엔 그저 뱀 간호사를 흉내내며 즐거워하던 아이가 몇 달이 지난 뒤 같은 책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됐다는 걸 뜻하기도 하고 말이죠.
책을 새롭게 보게 된 건 저도 마찬가지였죠. 보통 책에서 의사는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여기 나오는 원숭이 의사는 뱀 간호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뱀 간호사였던 거죠. 아이랑 책을 읽으며 아이만 커 나가는 게 아니었죠. 저도 아이 덕분에 책의 감춰진 새로움을 계속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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