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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그 밖에

네 이야기를 들려줘

by 오른발왼발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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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야기를 들려줘

 

 

네 이야기를 들려줘. 솔직하게, 좀더 자세히 들려줘. 네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어. 네 이야기 속에는 내가 몰랐던, 아니 못 봤던 세계가 있어. 보는 사람에 따라 세상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 내가 본 게 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봐. 같은 걸 본다고 다 같은 게 아니었나봐. 똑같은 걸 바라보면서도 서로 바라보는 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

나는 이제부터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보려고 해. 이렇게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때면 내가 보는 세상이 아닌 또다른 세상을 보게 되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게 돼. 같은 이야기라도 자기가 직접 들려줄 때랑 다른 사람이 전해줄 때는, 정말이지 그 느낌이 다르거든.

그 대신 정말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 가끔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긴 하는데, 듣고 나면 그 이야기가 별로 솔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이런 느낌은 너무 미묘한 거라서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때도 있지. 뭐랄까? 분명히 자기 이야기를 그대로 하긴 하거든…… 그런데 자기 이야기를 남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한번 정리해서 설명해주는 느낌이랄까? 뭐 그런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

하긴 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 이런 말은 내가 친구들한테 듣던 말이기도 하거든. 친구들은 내가 내 이야기를 남 이야기를 하듯이, 너무 객관화 시켜서 말하곤 한대. 그래서 때론 내가 딴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난 너무 억울했지. 나는 모처럼 용기를 내서 내 속을 드러내놨는데 말이야. 그런데 자꾸 그런 말을 듣다 보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 친구들 말처럼 역시 난 너무 분석적인 것 같아. 어쨌든 난 친구들의 지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나 자신을 정리한다는 생각에 내 감정을 드러낼 때도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정리해서 그 정리된 감정을 이야기하곤 했으니까.

만약 누군가 왜 남한테만 솔직하게 이야기해달라고 그러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어. 하지만 어쩜 그래서일지도 몰라. 나처럼 이야기를 해 버릇하면 안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럼 친구들이 내 모습을 머리로는 이해해줄지 몰라도 나를 가슴으로 품어주지는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말이야.

내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문제아 중의 문제아인 '하창수'를 만나고 나서야. 창수의 이야기를 좀 옮겨볼게.

나는 문제아다. 선생님이 문제아라니까 나는 문제아다. 처음에는 그 말이 듣기 싫어서 눈에 불이 났다. 지금은 상관없다. 어떤 때는 그 말을 들으니까 더 편하다. 문제아라고 아예 봐주는 것도 많다. 웬만한 일로는 혼나지도 않는다. 그냥 포기한 셈치니까. 잔소리나 듣다가 만다. 애들도 내 앞에서는 슬슬 기기만 한다는 걸 안다. 그러니까 내가 점점 더 문제아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ㅡ 박기범「문제아」중에서



처음엔 좀 황당하기도 했지. 자기 스스로 '문제아'랬다가 금방 억울해하기도 하고, 역시 문제아는 다르다 싶기도 했어. 하지만 듣다 보니까 그게 아냐.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의미심장하더라고. 자기는 문제아가 아닌데 선생님이 문제아라고 했을 때 정말이지 얼마나 눈에 불이 났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난 문제아 하창수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내가 하창수 이야기를 듣고 느낀 건데, 내 이야기를 할 땐 처음부터 핵심을 먼저 드러내는 게 좋은 것 같아. 그래야 궁금해서 이야기에 빠져들어갈 수 있잖아. 만약 창수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귀를 기울이진 않았을 거 같아. 생각해봐. 왜 어른들도 그렇잖아. "아이고, 내 속상해서……" "아니, 왜? 무슨 일인데?"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잖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허진' 때문이야.

내 이름은 허진. 하지만 아무도 나를 진이라 부르지 않아. 그냥 바람, 바람이라고 불러. 나는 바람처럼 빠르니까. 힘차게 힘차게 독수리처럼 몸을 날려 달리면 바람이 쉿쉿 소리를 내며 나에게 말해.
"너보다 더 빠른 아인 본 적이 없어."
그 소리를 들으면 움츠러들던 몸도 쭉 펴지고 마치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가 바람에 날리며 찰랑찰랑대면 기분이 좋아져. 그러면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것만 같아 자꾸만 빠르게 빠르게 뛰게 돼. ㅡ 오경임 『나는 바람이야』중에서

 


진이도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어. 난 처음 진이가 이야기를 시작할 땐 진이를 부러워하기까지 했어. 바람처럼 달리며 움츠러들던 몸도 펴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나도 한번 가져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이렇게 진이가 부러워질 무렵, 진이는 자기 고민을 털어놨어. 자기는 엄마도, 아빠도 둘이라고. 1학년 때 엄마랑 아빠는 이혼을 했고, 자기가 함께 살던 엄마가 재혼을 했다고.

난 정말 몰랐어. 전에 시골에 사는 친할머니가 자주 오시질 못한다고 했을 땐 그냥 관절염 때문인 줄 알았거든. 괜히 관절염 이야기는 왜 해가지고 사람 헷갈리게 하나 하는 마음에 괘씸한 생각도 들어.

가만 보니까 진이의 말하는 투가 그런 것 같아. 동생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래. 친동생이 아니라고 먼저 말해주면 좋을 걸, 한서를 낳다가 돌아가셨다는 한서 엄마 얼굴이 궁금하다는 말을 먼저 하잖아. 이게 웬 소리? 하며 얼른 귀를 기울이면 그제야 친동생이 아니라는 거야. 이야기를 들으면 진이 마음이 충분히 이해는 돼. 그래서 바람처럼 달리는 걸로 답답한 마음을 풀겠구나 싶기도 하고, 고민이 많은 만큼 생각이 복잡해서 그런가 보다 싶기도 했지.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는 되는데 가슴에 와닿지를 않아. 진이의 마음이.

진이와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동생 한서, 또 삐딱이 은수도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조금은 이상해. 같은 처지라도 풀어나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수 있을 텐데, 어쩜 셋은 다 똑같을까 싶어. 그러다 보니 진이의 얼굴에 한서가, 또 은수가 겹쳐져 보여. 한참을 있다 보니 누가 자기 이야기를 했는지 헷갈려. 맞아. 이야기한 건 진이였지. 그런데 이야기가 진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진이랑 같은 처지인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로 다가와. 누군가 진이를 대신해서 진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진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너무 안타까웠어. 자기도 힘들 텐데 다른 사람들까지도 신경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말이야. 진이야, 네 이야기를 할 땐 이젠 마음을 활짝 열고 해주렴. 그래야 이야기를 듣다 언제라도 네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창비 웹매거진/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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