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인권>
세상에 태어남과 함께 권리가 생겼다
1.
“넌 하는 짓이 왜 이렇게 초딩 같니?”
이런 말 들어봤을 거예요. 이때 초딩이란 말에는 ‘초등학생같이 미숙하다’, ‘초등학생같이 유치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초딩 주제에…….”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요. 이때 초딩이란 말에는 ‘조그만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초등학생이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쓰곤 하지요.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초딩이란 말에는 어린이를 어른과 동등한 인격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담겨 있으니까요.
최근에는 초딩이란 말 대신에 또 다른 말이 쓰입니다.
주린이, 요린이, 골린이, 헬린이, 등린이, 부린이…….
언제부턴가 뒤에 어린이의 ‘린이’라는 말을 마치 접미사처럼 붙여 초보를 뜻하는 말처럼 쓰이고 있지요. 주식 초보는 주린이, 요리 초보는 요린이, 골프 초보는 골린이……, 이런 식으로요. 이 역시 어린이는 뭐든지 제대로 못 하는 존재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나온 말이지요.
아마 누군가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다른 사람에게 사용했을 테고, 그렇게 점점 퍼져나갔을 거예요. 그냥 재밌는 말 정도로만 여기고 말이에요.
방정환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땅을 치며 통곡하셨을 것만 같습니다. 100년 전 어린이란 말이 처음 나왔던 건 ‘젊은이’ ‘늙은이’와 같은 평등한 개념이었지요.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 어린이란 말이 미숙한 존재를 뜻하는 접미사가 되고 말다니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2.
국어사전을 찾아봅니다.
인권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
인권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어린이 인권’에 대해 따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인권을 갖고 있고, 이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뜻이니까요. 당연히 어린이도 한 사람의 인격으로 똑같은 인권을 누려야 하고, 그게 평등의 원칙에도 맞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어린이의 인권에 대해 계속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인권을 침해받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지요.
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걸까요?
앞에 나온 ‘초딩’과 ‘○린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면 그 속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속에는 어린이를 미성숙한 존재, 힘이 없는 작은 존재, 혼자서 무언가를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담겨 있지요. 즉, 어린이를 자신과 평등한 존재로 보지 않고, 얕보는 것이지요.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하고 차별하는 것이지요.
휴~. 숨이 막혀 옵니다. 사실 인권 침해의 현장은 어린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키가 작거나 뚱뚱하다는 이유로……, 수없이 많은 이유로 차별하는 경우가 흔하지요.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지면 차별은 더욱 심해지지요.
사람들은 자꾸 잊곤 합니다. 어른들도 모두 어린이였다는 사실을요. 어린이였을 때, 어린이였기 때문에 억울하고 힘들었던 일도 잊어버려요. 그리고 어른이 돼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
어떤 일에 대해 의문을 갖고 고쳐 나가려 하지 않으면 그건 몸과 머리에 굳어져 버리지요. 그래서 내가 약자였을 때 불만이었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게 돼요.
어린이 인권은 그래서 더욱 중요해요. 인권을 존중받고 자란 어린이는 어른이 되면 분명 어린이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이 될 테니까요.
3.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돌아왔다.
- 1923년 5월 1일 동아일보
올해는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예요. 신문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100년 전 어린이날은 어린이를 어른과 동등한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그 권리를 주장한 날이었어요. 이날, 전국에는 20만 장의 ‘어린이날 선언문’이 뿌려졌어요. 어린이날 선언문은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 선언문’이었지요.
저는 처음엔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 선언문이 우리나라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만 했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슬프기도 했지요. 어쩌면 우리 어린이들의 삶이 다른 나라 어린이들보다 더 힘들고 암울했기 때문에 어린이 인권 선언이 더욱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가장 좋은 건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100년 전 ‘어린이날 선언문’의 내용은 아직도 유효해요. 그때와 지금은 구체적 상황에 차이가 있을 뿐 어린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2016년 발표된 ‘아동권리헌장’을 기준으로 어린이의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아동권리헌장은 모두 9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1> 아동은 생명을 존중받아야 하며 부모와 가족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
<2> 아동은 모든 형태의 학대와 방임, 폭력과 착취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3> 아동은 출신, 성별, 언어, 인종, 종교, 사회·경제적 배경, 학력, 연령, 장애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4> 아동은 개인적인 생활이 부당하게 공개되지 않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5> 아동은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발달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영양, 주거, 의료 등을 지원받을 권리가 있다.
<6> 아동은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알 권리가 있다.
<7> 아동은 자유롭게 상상하고 도전하며 창의적으로 활동하고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8> 아동은 휴식과 여과를 누리며 다양한 놀이와 오락, 문화, 예술 활동에 자유롭고 즐겁게 참여할 권리가 있다.
<9> 아동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등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감정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이를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각각의 조항을 하나하나 읽어나갈 때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라요. 단 하나도 걸리지 않는 조항이 없어요. 문제는 이 9개 조항이 어린이 인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중요한 건 또 있어요. ‘어린이날 선언문’이 의미가 있었던 건 방정환 선생님을 중심으로 그 선언을 실천해나가는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행동은 어른들만의 활동이 아니었어요. 소년회 활동처럼 어린이들이 직접 움직여나갈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아동권리헌장’ 역시 이를 실천해 나갈 책임이 따라야 해요. ‘아동권리헌장’ 전문에서는 이 책임이 부모와 사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어요. 문제는 이 책임을 어떻게 지고 있느냐는 점이지요. 저는 어린이의 권리를 위해서는 어린이들 자신이 스스로의 권리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권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의 주인으로서 태도이기도 하니까요.
4.
“에이, 안 돼! 권리? 국가? 아이들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혹시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요. 때로는 자신만의 직관으로 어른들보다 훨씬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도 해요. 그건 뭐든지 머리로만 생각하려하는 어른들에겐 없는 능력이지요. 또 뭐든지 어른들이 더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린이들이 더 잘하는 것도 많아요.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커나가듯이 때로는 어른이 어린이의 도움을 받기도 해요. 또 어른이라고 해서 어린이들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건 어린이나 어른이나 서로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이에요. 그리고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린이 인권의 기본이고 말이에요.
이 글은 어린이도서연구회가 발행하는 <동화읽는어른> 2022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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