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책방 이야기
제가 어렸을 때 즐겨 가던 곳이 있었어요. 집 근처 버스 정류장 앞에 있던 작은 서점이지요. 물론 그 시절에 그만한 서점이면 결코 작은 서점은 아니었지만 말이에요.
전 오랫동안 그 서점의 단골이었어요. 책값만큼 용돈을 모으면 조르르르 달려가서 실컷 책 구경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사 가지고 오곤 했지요.
저는 한 권 한 권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어요. 그 새로운 세상이 무척이나 좋아서 다른 책들을 모두 읽고 싶어 하기도 했ㅈ요. 책을 파는 서점, 글을 쓰는 작가들에 대해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예요.
책장 넘기기
먼 옛날, 책이 정말 귀했던 시절엔 어땠을까요? 양반들이야 『논어』니 뭐니 해서 책을 봤겠지요. 그럼 보통 사람들이 책을 읽을 기회는 전혀 없었을까요? 양반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책들을 안 봤을까요?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 , 『전우치전』, 『춘향전』, 『숙향전』 …… 같은 재미난 이야기책들이 전해졌을 리가 없잖아요?
『백산의 책』(하은경 글/권문희 그림/낮은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 의 작가 허균이 등장해요. 1997년 『설공찬전』이 발견되면서 『홍길동전』이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설공찬전』은 원래 한문 소설이었던 것을 한글로 옮겨 쓴 책이라는 점에서, 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은 『홍길동전』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건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이야기이면서도, 주인공은 허균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은 ‘백산’이라는 아이지요.
백산이 저잣거리에서 소매치기를 하다 붙잡혀서 두들겨 맞고 있을 때였어요. 이때 백산을 구해준 게 바로 허균이었지요. 백산은 높은 벼슬을 하는 허균을 따라가기만 하면 놀고먹어도 밥은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허균은 어쩔 수 없이 백산을 받아들였고요.
하지만 허균의 집은 백산이 꿈꿨던 그런 집이 아니었어요. 밥상에 올라오는 건 고깃국이 아니라 나물 반찬뿐이었지요. 집에 가득한 건 오로지 책뿐이었고요. 백산은 아까운 재산을 몽땅 털어 책만 사는 허균에게 불만이 솟구쳤지요. 그래서 책을 훔쳐 팔아먹으려고도 했답니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지으며 이야기가 막힐 때마다 백산을 불러 묻곤 했어요. 백성의 마음이야말로 거리를 떠돌던 백산이 제일 잘 아는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허균이 책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었던 걸 백산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또 백산은 이야기를 짓는 재주도 좋았고 말이에요. 허균은 백산의 이런 점을 높이 샀답니다.
얼마 뒤, 허균에게 불길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해요. 박치의란 인물이 찾아오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사실 허균은 서자들과 가깝게 지냈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허균과 친하게 지내던 7명의 서자들이 역모죄로 잡혀 들어간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6명은 죽임을 당했지만, 감옥을 탈출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 있었지요. 바로 박치의예요.
허균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박치의를 도왔어요. 박치의를 잡겠다고 거리에 내건 방문(어떤 일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이 사실은 허균 자신을 잡아넣기 위한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허균은 얼굴이 까칠해지도록 박치의를 돕는 동시에 『홍길동전』을 완성했어요. 그리고 백산을 불러 책방에 가서 책으로 내라는 심부름을 시켰지요. 물론 이야기의 고비마다 도움을 준 백산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은이 이름을 책에 싣지 말래요. 왜 그런 걸까요?
허균은 백산을 심부름 보낸 뒤 바로 의금부에 끌려가 역모죄로 죽임을 당해요. 머물 곳을 잃은 백산은 다시 거리의 아이가 되어 소매치기를 하지요. 하지만 거리에서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허균의 뜻을 깨닫게 돼요. 이야기꾼이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홍길동전』이었거든요.
최근에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인지 아닌지 의견이 엇갈리기도 해요.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허균이 『홍길동전』이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지은이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새삼 이야기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답니다. 지은이는 죽었지만 이야기는 살아남아서 백산을 배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으니까요.
함께 읽으면 좋아요!
『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글/김동성 그림/문학동네)
제목이 무척 매력적이지 않나요? 만 권도 넘는 책을 가지고 있다는 홍 교리(글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의 사랑채 이름이에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책방 심부름꾼이 된 장이가 심부름을 갖던 곳이기도 하지요. 천주교가 금지되던 시절, 장이 아버지는 천주교책을 옮겨 썼다는 이유로 매를 맞아 돌아가셨다고 해요. 장이의 눈길을 따라 책방 풍경은 물론 천주교가 박해받던 당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을 함께 읽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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