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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그 밖에

'어린이'라는 틀 밖에서 방정환을 보다

by 오른발왼발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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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틀 밖에서 방정환을 보다

 

 

 

방정환.

어린이 날을 만든 사람.

잡지 <어린이>를 만들고 어린이문화운동에 애쓴 사람.

 

방정환에 대한 키워드는 이렇듯 주로 '어린이'에 맞춰 있다. 그리고 어린이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방정환만 한 인물은 찾을 수 없다. 1920-30년대, 일제에게 또 어른들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하던 어린이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간 업적은 높이 살 수밖에 없다.

 

내가 방정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99년이었다. 방정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방정환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던 때였다. 나 역시 방정환을 공부하며 잡지 <어린이>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린이'라는 틀에서 바라본 방정환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때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방정환-어린이 세상을 꿈꾸다>(한겨레아이들)란 책도 쓰게 됐다.

 

하지만 그 후 방정환의 또 다른 모습을 알게 됐다. 어린이에게는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성에 대한 방정환의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김명순에 대한 공격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인 김명순은 일본 유학 중 데이트 강간을 당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문학계에는 김명순에 대한 혐오가 널리 퍼진다. 당시 문학계는 남자들만의 세계였고, 남자들은 갑자기 끼어든 김명순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이를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다.

방정환, 김동인, 김기진 등 유명한 인물들이 나서서 '음탕한 탓에 강간 당한 여자'라며 김명순에 대한 공격을 일삼았다.

특히 방정환은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 <별건곤>, <개벽> 등을 통해 누구보다 김명순에 대한 공격을 강하게 해나갔다.

방정환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았다는 처녀시인이라며 김명순을 비난했고, 이로 인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해 서대문 형문소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러자 당시 남성 문인들은 '명예훼손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라 주장하며 방정환을 옹호하는 시위를 벌였고, 결국 방정환은 일주일 만에 풀려나게 됐다고 한다.

 

무척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과 더불어 가장 훌륭한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던 잡지가 사유화되어 김명순을 죽이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었다.

방정환이 발행하던 잡지 <신여성>도 진짜 신여성을 위한 잡지가 아니었다. 무슨 매체이든 매체란 발행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인 천도교는 남녀노소,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방정환은 여성에 관한 한, 그 당시 남자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프랑스혁명 이후 '여성의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올랭프 드 구주가 떠올랐다. 프랑스혁명으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이루어졌지만, 여기서 말하는 '인간과 시민'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결국 올랭프 드 구주는 남성들의 공공연한 적이 됐고, 평등을 위한 혁명에 제동을 걸었다는 이유로 단두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나름 진보적입네 하는 남성들의 공공의 적이 됐다는 점에서 김명순은 올랭프 드 구주와 같은 처지였던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어린이운동가로서 방정환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 혹은 어린이운동을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방정환이란 이름이 가장 앞에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방정환이란 인물을 어린이라는 틀로만 바라보는 것은 방정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방정환 인물 이야기 책들에 대한 재검토도 필요할 듯 싶다. 내가 쓴 <방정환-어린이 세상을 꿈꾸다>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방정환 인물 이야기들은 방정환을 '어린이'란 틀을 통해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방정환은 거의 완벽한(!) 인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앞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방정환은 모든 분야에서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방정환을 '어린이'란 틀 밖에서도 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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