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왜 그렇게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 했을까?
금강산 호랑이 잡은 아들, 지리산 포수의 아들, 아버지 잡아먹은 호랑이 잡은 아들 이야기
1.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각성
“얘비 없는 놈, 얘비 없는 놈.”
친구들의 놀림에 지금껏 어머니와 잘 살던 아이는 의문이 생긴다.
“어머니, 나는 왜 아버지가 없습니까?”
아이는 묻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혔다고 말해준다.
그러자 아이는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며 총쏘기(활쏘기) 연습에만 매진한다.
이런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 같을 것이다. 아이가 호랑이를 잡으러 나선다면, 이 아이 역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얘비 없는 놈’이라며 아이를 놀린 친구들이 원망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들의 놀림이 없었더라도 아이는 언젠가 아버지의 존재에 관해 물었을 것이다. 어머니와의 세계에서 머물던 어린 시절을 벗어나면 바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을 테니 말이다. 친구들의 놀림이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수는 있으나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얘가 인제, 아들이 일곱 살이 아마 되니깐은 엄마가 있다가
“아이고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냐고.”
- 《한국구비문학대계》, <아버지 원수 갚은 아들(눈물이 떨어져서 발등 다친다는 말의 유래)>, 강순덕 구술, 경기도 구리시, 2014.
이 아덜은 차차 자라서 철이 들게 되느꺼니 자기 오마니과 우리 아바지는 어드메 있능가 하구 물었다.
《한국구전설화 2, 평북 2》, <호랑이를 쏜 포수>, 59쪽
이처럼 때로는 친구들의 놀림이 아니라도 아이는 자라서 어머니에게 아버지 존재를 묻는다.
사실 옛이야기에서 친구들의 놀림으로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어머니에게 묻는 이야기는 여러 편이 있다. <나무 도령>이나 <아침에 심어서 저녁에 따는 박> 같은 이야기에서도 아이는 친구들의 놀림으로 아버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아버지를 찾아갈 수 있었으나, 이 아이는 이미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이의 아버지 찾기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아버지의 흔적인 뼈와 유물을 찾아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게 됐으면 됐지 꼭 원수를 갚으러 가야 했을까 싶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마다 입장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라면 ‘아,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를 죽인 그 존재가 아직 살아있다면? 게다가 아버지를 죽인 그 존재가 언제고 나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면?
아이에게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란 존재는 자신이 “얘비 없는 아이”라는 놀림을 받도록 만든 원수인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위협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이가 아버지의 존재에 관해 묻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존재만을 묻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이 세상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인 친부에 대한 의문이자 친부를 죽인 세상(호랑이)에 대한 의문이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라 할 수 있다.
2. 죽음을 각오하고 훈련하고, 살기를 바라며 호랑이 사냥을 가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아이는 어머니에게 콩을 한 말 볶아 달라고 해서 글방 친구들에게 나눠준다. 그리고 쇳조각을 가져오라 해서 그걸로 총을 만든다. 글방은 그만두고 총쏘기 연습만 한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아기 장수 우투리>다. 우투리 역시 어머니에게 콩을 한 말 볶아 달라고 해서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콩을 볶아 달라고 해서 쇳조각을 바꿔 총을 만들어 총쏘기 연습을 하는 아이와 이미지가 겹쳐진다. 콩을 볶아 가져간 두 아이는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숨 고르기에 들어간 셈이다. 아기 장수는 바위 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기르고, 아이는 총쏘기 연습을 한다. 이들이 힘을 기르는 동안 바깥세상에서 이들은 사라진 존재나 다름없다. 바위 속으로 들어간 아기 장수는 당연하고, 이 아이 역시 지금껏 가던 글방에 가질 않으니 사람들에겐 사라진 아이가 됐다.
사람들에겐 사라졌지만 이 시간은 이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씨앗이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듯이 말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동아시아)에서 콩은 죽음에 가까이 있는 먹을거리로 간주된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두 아이가 굳이 왜 콩을 볶아달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 아이가 호랑이를 잡으러 길을 떠날 때 가져가는 것은 찹쌀(가루)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는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길에 요깃거리로 가져가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옛이야기에서 길을 떠나는 주인공은 먹을거리를 챙기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냥 길을 떠난다. 굳이 찹쌀을 볶아 갈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콩처럼 찹쌀이 갖는 상징적 의미도 있을 것이다.
콩도 곡류도 인간의 생명을 키워준다는 의미에서는 생명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곡류와 두류를 대립시켜 보면, 곡류는 보다 생명에 가까이 있는 먹을거리이며, 콩은 죽음에 가까이 있는 먹을거리로 간주되었던 것 같습니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나카자와 신이치 글/동아시아), 81쪽
나카자와 신이치의 의견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생각해 본다. 콩으로 총을 만든 아이는 죽어라 총쏘기 연습을 했고, 찹쌀을 가지고 길을 떠나는 아이는 호랑이를 잡고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다졌던 것이 아닐까?
물론 ‘콩’과 ‘찹쌀’이라는 화소가 전체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또 콩과 찹쌀은 한 이야기에 동시에 등장하지 않고 각각의 이야기에 흩어져서 나온다. 하지만 콩과 찹쌀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라도, 총쏘기 연습을 하는 아이의 모습과 호랑이를 잡으러 떠나는 아이의 모습에서 콩과 찹쌀의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3. 어머니, 산신, 처녀
이야기의 줄거리만 따라가면 호식 당한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떠나는 아이의 모습뿐이다. 하지만 이야기에는 아이 말고도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이 있다. ‘얘비 없는 아이’라 놀리던 친구들은 일단 빼자. 이들은 구체적인 한 인물이 아니니 하나의 캐릭터로 구분하긴 어렵다. 이 친구들을 뺀다면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건 세 명의 여성이다. 어머니, 산신, 그리고 처녀.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아이의 존재를 이루는 한 축이다. 어머니는 남편 없이도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낸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아이를 서당에 보냈고, 아이는 서당에서 똑똑한 아이로 인정받기도 한다.
어머니는 아이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판본에서는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 주는 것을 꺼린다. 그리고 아이가 호랑이를 잡으러 집을 떠나려 할 때는 어려운 시험을 내서 아이의 길을 막아 보려 애쓴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어머니는 아이의 성공을 빌며 보내 줄 수밖에 없다. 아이도 자신의 존재의 한 축인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아이가 떠나면서 버드나무 혹은 대나무 등 자신의 생사를 알려 줄 수 있는 증표를 어머니에게 남기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이야기 구성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내용이라 모든 이야기에서 공통으로 나오지만 산신과 처녀는 선택적으로 나오는 화소다.
아이는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길에 오두막(주막)에서 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들어가는 포수는 봤지만 나오는 포수는 못 보았다’며 아이를 말린다. 하지만 아이의 결심을 막을 수 없자, 아이에게 호랑이 잡는 방법을 알려 주거나, 아이가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할머니가 바로 산신이다. 할머니의 비범한 모습만으로도 신령스러움을 느낄 수 있지만, 화자에 따라서 직접 산신이라 말하기도 하고, 아이가 떠난 뒤 뒤돌아보자 오두막이 사라졌다거나 하는 식으로 신령스러움을 보여 준다.
산신은 악귀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호랑이를 잡을 방법을 알려 준다. 이는 어머니는 해 줄 수 없는 일로, 아이가 호랑이를 물리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해준다.
아이는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길에 기와집에 홀로 남은 처녀를 만나기도 한다. 원래 기와집에는 식구들이 많았는데 모두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처녀 혼자 남아 있었다. 식구들이 아이의 아버지처럼 호식을 당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아이는 기와집에서 호랑이를 모두 죽이고 처녀와 부부가 된다.
이야기는 아이가 산신을 만나는 경우와 처녀를 만나는 경우 조금 다른 내용을 담게 되는 것 같다. 산신이 등장하는 경우는 아이가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호랑이를 물리침으로써 아버지 원수를 갚는 것에 확실한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처녀를 만나는 경우는 호랑이를 물리치는 가운데 아이의 무의식 속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아이는 아버지 원수를 갚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오로지 남성성만을 강조하며 지냈다. 아이는 아버지 한 사람만 잃었지만, 처녀는 온 집안 식구를 호랑이한테 잃고 자신마저 잡아먹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는 그만큼 아이의 여성성이 억눌려 있었고, 그로 인해 내면의 여성성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따라서 아이가 처녀를 호랑이로부터 구해내는 순간은 아이 내면에 억눌려 있던 여성성(아니마)이 외면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아이가 처녀를 구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아이가 자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합할 수 있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4. 겉모습에 속지 마라
아이의 아버지는 명포수였지만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 그냥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가 잡아먹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람으로 변신한 호랑이의 꾐에 빠져 따라나섰다가 잡아먹히는 경우가 많다.
‘변신’하면 여우나 너구리가 먼저 떠오르곤 하지만, 호랑이도 변신을 한다. 사람은 물론 다른 동물로도 변신한다. 나이 많은 호랑이일수록 변신 능력은 더 뛰어나다.
호랑이의 변신이라는 화소가 없는 경우는 호랑이를 만났을 때 쏘아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변신하는 호랑이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우선은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건 겉모습이 아니라 속모습, 즉 본래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때로는 변신 능력이 있으면서도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때 호랑이는 겉모습만 호랑이일뿐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들 호랑이는 날아오는 총알을 척척 받아내고, 자기 꼬리 위에 붙은 긴 털 하나를 쏴서 맞추면 자기가 죽겠다며 아이를 희롱하기도 한다. 때로는 호랑이에게 총을 쏘자 뒷집 영감으로 변해 다시 달려들기도 한다. 이처럼 변신 호랑이는 보통 호랑이가 아닌 만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이가 만났던 산신은 아이에게 호랑이는 변신을 잘하니,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쏘라고 한다. 산속 깊이 호랑이를 잡으러 들어간 아이는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쏜다. 그 사람들은 죽으면서 모두 호랑이 모습으로 변한다. 죽고 난 뒤 호랑이가 된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감이 들기는 하지만 사실 아이가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는 모습은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다. ‘혹시라도 진짜 사람이었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더구나 아이는 호랑이의 본 모습을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오는 도중에 만난 할머니(산신)의 말만 믿고 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사람 모습을 한 호랑이를 쏘는 것이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그곳은 바로 호랑이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간혹 사람을 잡아먹으러 사람들의 영역으로 내려오지만, 그 외에는 자신의 영역인 깊은 산속에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 호랑이의 영역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면 잡아먹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간혹 호랑이를 잡으러 나선 포수들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은 들어갈 일이 없는 공간이다. 만약 그곳에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분명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사람으로 변신해서 아버지를 해쳤다. 호랑이가 변신을 잘하는 동물이라는 산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호랑이의 영역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는 사람들이 실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은 거의 100%라 할 수 있다.
결국 호랑이를 쏠 때 중요한 건 겉모습에 속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총알을 척척 받아내는 호랑이를 죽이려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아가리 ‘속’에 총을 쏴야 하는 이유와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건 ‘겉’이 아니라 ‘속(본질)’이라는 점 때문이다.
5. 집으로 돌아온 아이
아이는 아버지의 유골과 유물(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존재 근거인 아버지의 의미를 찾았음을 뜻한다. 그리고 오는 도중에 만난 처녀와 결혼을 해서 잘살게 되는 이야기도 있고, 호랑이를 잡아 얻게 된 호피를 팔아 잘살게 되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어머니하고도 잘 산다. 오랫동안 아이의 생사를 알려 줄 증표만 바라보며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을 어머니는 아이의 모습을 못 알아보고 까무러치기도 하고, 아들의 생사 증표만 바라보느라 눈에 커다란 눈곱이 매달린 채 있기도 하고, 강아지가 되어 있기도 하다. 다행히 아들은 산신으로부터 어머니가 다시 사람이 되는 약을 받아와 사람으로 돌려놓는다. 따라서 집에 돌아온 아들은 잠깐 위기에 처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엔 어머니와 잘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이니, 어머니와 잘살게 된다는 건 안정적인 자신을 찾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 입장에서도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어 있건 그건 중요치 않을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훌쩍 자라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단 한편, <지리산 포수>(대계, 한광주 구연, 전북 정읍군)에서는 주인공이 말년에 아버지 백골 찾아온 곳에 구경 한번 간다고 갔다가 죽는다. 즉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불행한 결말일까? 죽음을 맞았다는 점에선 불행한 일인 듯싶지만, 아버지 백골 찾아온 곳에 구경 한번 가고자 했던 소원을 이뤘으니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른 이야기와는 결말에 이야기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피게 된다. 다른 이야기들은 호랑이의 정면에서 아가리를 향해 총을 쏘지만, 이 이야기에서 아이는 자신이 있던 굴 안으로 똥구멍부터 들어오는 호랑이를 쏜다. 이는 어쩌면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 원수를 갚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호랑이와 정면 승부를 못 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삶이건 저런 삶이건 그 삶이 행복하다 아니다를 평가 내릴 수는 없다. 저마다 다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한 삶이었을 테고, 행복에 대한 기준 또한 저마다 다를 테니 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나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주인공과 달리 지금까지 어머니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기에 부모의 모습을 찾아 나섬으로써 나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두 분의 모습에서 부정하고 싶은 모습을 발견했을 땐 두 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뼈밖에 남지 않은, 보잘것없고 부정하고 싶은 부모의 모습조차도 나를 이루는 하나의 세계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에서 아이가 아버지 유골을 찾아오는 것도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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