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는 자, 속이는 자, 진실을 말하는 자
까치와 호랑이와 토끼 -
까치와 호랑이
호랑이가 까치한테 알(새끼)을 하나 달라고 한다. 만약 안 주면 올라가서 너까지 잡아먹겠다고 협박하면서.
까치는 어쩔 수 없이 호랑이에게 알을 준다. 하지만 호랑이는 오고 또 오고, 그때마다 까치는 알을 내주고 만다. 결국 알이 하나밖에 남지 않자 까치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야기에서 까치는 호랑이가 나무에 올라온다는 사실을 모른다. 호랑이는 이 사실을 이용해 까치를 속여 알을 빼앗아 먹는다. 호랑이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을 모르는 까치는 호랑이에게 그대로 당하며 화를 자초한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까치를 탓할 수는 없다. 진실을 모르는 상황에선 누구나 속을 수밖에 없고, 설사 진실을 안다 해도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속아 넘어가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어쩌면 까치도 호랑이가 나무에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랑이가 올라와서 자신은 물론 모든 알을 다 먹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진실을 잊게 했고, 그래서 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떻게든 새끼를 한 마리라도 살려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일 수도 있고 말이다.
까치는 알이 하나만 남게 되자 울음을 터뜨린다. 그제야 지금까지 벌어진 일의 결과를 직시하게 된 것이다. 즉,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해결할 방법은 없고, 암울하기만 하다.
이때 까치의 울음은 단순히 서럽고 억울하다는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주위에 퍼지는 울음소리는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는 신호이기도 하다.
과연 까치의 울음에 반응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토끼다. 토끼는 까치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호랑이는 나무 위에 못 올라와.”
진실을 알게 된 까치는 그제야 각성한다. 호랑이가 다시 찾아와 남아 있는 알을 내놓으라 요구하지만 당당하게 맞받아친다.
“너는 나무 위에 못 올라오잖아.”
호랑이와 토끼
이제 호랑이와 까치의 대결은 토끼와 호랑이의 대결로 바뀐다. 호랑이는 까치가 토끼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는 토끼를 잡아먹으려 한다.
하지만 토끼는 속임수로 호랑이를 꾄다.
“강에 꼬리를 담그고 있으면 물고기가 꼬리에 주르르 달라붙을 거예요.”
“대숲에서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새들이 입으로 몰려들어갈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호랑이는 속아 넘어간다. 마치 까치가 호랑이에게 속아 넘어갔듯이 말이다. 아마도 작은 토끼 한 마리 잡아먹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을 수 있다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토끼를 얕잡아보는 마음도 있었을 테고 말이다. 결국 남을 속이던 자가 속는 자가 된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토끼의 제안에 속아 넘어간 호랑이는 밤새 강에 꼬리를 담그고 있다가 강물이 꽁꽁 얼어붙는 바람에 꼬리가 벗어지고(혹은 죽기도 한다), 대숲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에 토끼가 대숲에 불을 놓는 바람에 온몸에 탄 자국이 생겨 몸에 줄무늬가 남기도 한다(혹은 죽기도 한다). 남을 속였던 대가를 톡톡히 받은 셈이다.
토끼와 노인
이야기는 호랑이가 그냥 호되게 당하는 것에서 끝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호랑이가 죽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호랑이가 죽는 경우, 토끼가 호랑이를 먹는 이야기로 이어지곤 한다.
이때 토끼는 노인에게 도마와 칼을 빌려온다. 돌려줄 때 호랑이 고기를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하지만 먹다 보니 호랑이를 몽땅 먹어버려 갖다줄 고기가 없었다. 그러자 토끼는 이빨 사이에 낀 고기를 빼서 뭉친 뒤, 먹기 쉽게 고기를 탕탕이 쳐서 가져왔다며 준다. 진실을 알 리 없는 노인은 그 고기를 맛있게 먹는다.
토끼는 노인이 고기를 맛있게 다 먹자, 그 고기의 진실을 말해준다. 몰라도 됐을 진실을 알게 된 노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다. 갖고 있던 칼을 던져 토끼 꼬리가 끊어졌다는 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도 하지만 ‘녹두(팥이) 영감과 토끼’ 이야기처럼 노인이 파국에 이르기도 한다.
속이고, 속고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속이고, 속는 관계가 등장한다. 호랑이는 까치를 속이고, 토끼는 호랑이를 속이고 노인을 속인다. 까치는 호랑이에게 속고, 호랑이는 토끼에게 속고, 노인도 토끼에게 속는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에서도 이처럼 끊임없이 속이고 속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다들 손을 가슴에 얹고 생각해 보라.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를(남은 물론 자신을 스스로 속이기도 한다) 속이는 일이 없었는지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대개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를 속이곤 한다.
하지만 속이는 일이 많은 만큼 속는 일도 많다. 누군가 속인다면 속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누군가를 속인다는 것은 잘못된 행동일까?
속인다는 것은 ‘거짓된 말이나 행동을 참이라고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때로는 거짓을 참이라 믿는 것, 즉 속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얼핏 생각나는 건 O.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다. 여기서 주인공을 속이는 일은 주인공을 살리는 일이기도 했다. 이처럼 속이고, 속는 문제는 무조건 나쁜 일로 단정지을 수 없다. 절대적인 선이 없듯이 절대적인 악도 없는 셈이다. 호랑이가 까치를 속인 것은 나쁜 일이지만, 토끼가 호랑이를 속였을 때는 나쁜 일이란 생각이 안 드는 것처럼 말이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
이야기에서 까치는 호랑이에게 속는 자다. 그리고 호랑이는 까치를 속이지만 토끼에게는 속는 자다. 반면 토끼는 누구에게도 속지 않는다. 대신 속이는 자이면서 동시에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이는 토끼야말로 이 이야기를 빛나게 하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요소다. 토끼 덕분에 사건은 전복되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곤 한다.
무엇보다 토끼는 ‘진실을 말하는 자’다. 까치에게 진실을 말해줌으로써 까치가 더이상 호랑이에게 속지 않게 해 준다.
‘진실’이란 단어는 뭔가 경외심을 갖게 한다. 진실이란 절대 선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까치가 진실을 알고 나서 달라질 수 있었던 것처럼 진실은 언제나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하고, 잘 살아나갈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토끼가 노인에게 준 고기의 진실을 말하는 순간 이런 마음은 사라진다. 가끔은 진실을 모르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다는 말은 이래서 나왔을 터이다. 꼭 알아야 할 진실이라 해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면 그 진실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고기의 진실을 알게 된 노인이 흥분해서 토끼를 잡으려다 파국에 빠지듯이 말이다.
까치와 호랑이와 토끼 이야기가 들려주는 우리 삶의 이야기
그림책으로 나온 《까치와 호랑이와 토끼》(웅진주니어)는 보통 4-7세에 권하는 책이다. 그림책이 아닌 이야기만 봐도 4-7세 정도면 충분히 재미있게 들을 수 있다. 까치가 호랑이에게 속을 땐 안타까워하고, 토끼가 호랑이를 속일 땐 통쾌해하면서 볼 수 있다. 호랑이가 토끼한테 속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낸다.
물론 이는 토끼가 노인을 속이기 전까지에 해당된다. 노인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좀더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노인이 등장하거나 혹은 노인이 등장하기 전에 이야기가 끝나든 상관없이 이야기의 맥락은 비슷하다. 그 세계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속고 속이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
여기서 토끼는 때로는 남을 속이고, 동시에 진실을 말하며 상황을 전환하는 전형적인 트릭스터의 면모를 보여준다. 토끼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까치와 호랑이 관계를 뒤집고, 호랑이를 속임으로써 토끼와 호랑이의 힘의 관계를 뒤집는다. 이는 토끼의 투사적 면모 때문이 아니다. 본래 트릭스터란 착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까치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건 잘난 척하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호랑이는 나무에 못 올라와. 너 그것도 몰랐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호랑이를 속이는 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최대한 머리를 짜낸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토끼의 이런 행동은 일상을 흔드는 의외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이야기를 구술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토끼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 노인을 속이고, 또 고기의 진실을 말함으로써 노인을 당황스럽게 할 때도 마찬가지다. 토끼는 정해진 힘의 관계대로 흘러가는 세계에 의외의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상황을 뒤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됐던 건 그림책 《까치와 호랑이와 토끼》가 출간되었던 1998년 즈음이다. 처음 이야기를 알게 됐을 땐 거짓말로 까치를 속여 새끼를 잡아먹는 호랑이에 대한 분노로, 그런 호랑이를 혼내준 토끼의 모습에 환호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반세기가 지나 다시 본 ‘까치와 호랑이와 토끼’는 옛사람들이 까치와 호랑이와 토끼를 통해 우리 세계(삶)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담아낸 우화라는 것이었다.
만약 곧이곧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불편하기도 하고, 또한 흥미를 갖는 이도 적을 것이다. 하지만 까치와 호랑이와 토끼를 등장시켜 이야기함으로써 이야기는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다 공감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허구이니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 역시 속고 속이는 관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공감하고 이야기에서 힘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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