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학 전에 몇 권을 읽어야 할까?
'읽는 것'과 읽어낸다는 것'의 차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책을 몇 권이나 읽으면 될까요? 누가 그러는데, 만 권은 읽어야 한다는데 정말 그런가요?”
언젠가 ‘어린이 책’에 대한 강의를 갔을 때였다. 강의가 끝나자 한 엄마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만 권이란 숫자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만 권이요? 정말요? 전 그런 말 처음 듣는데요. 왜 만 권이나 책을 읽어야 하죠?”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다른 엄마 한 분이 말한다.
“선생님.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만 권은 읽어야 한다고요.”
주위를 보니 이미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분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다시 되물었다.
“만 권이나 되는 책을 도대체 어떻게 다 읽죠?”
내 질문에 엄마 몇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한 번 읽을 때마다 스티커를 붙여놓는다고. 그리고 형제가 책을 같이 볼 때는 한 명이 본 책은 스티커를 붙이고, 또 한 명이 본 책은 뒤집어 놓는다고.
아이가 몇 권의 책을 읽어내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아이가 만 권의 책을 읽었다 해도 진짜 마음에 남는 책은 과연 몇 권이나 되겠냐고 설득을 했지만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아이보다 책이 먼저라고?
그 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집에 있는 책들을 세어봤다. 그림책이 아무리 얇다지만 도저히 계산이 나오질 않았다. 만 권의 책은 온 집안을 그림책만으로 도배를 할 만큼 많은 책이었다. 결국 만 권의 책을 읽히려면 책을 계속 바꿔서 넣어줘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만 권을 읽어내려면 도대체 하루에 몇 권이나 읽어야 하는지 계산도 해봤다. 꼬박 5년 동안 날마다 책을 읽는다고 하면 날마다 5-6권의 새로운 책을 봐야 가능한 숫자였다. 아이들이 책을 많이 볼 때는 하루에도 2,30권 이상도 보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었다. 하긴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이런 말이 나오지도 않았으리라.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이를 실천하려는 사람도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가능해 보이는 계산 속에는 함정이 있다. 가장 큰 함정은 책을 읽는 아이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겐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을 자기가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또 마음에 안 드는 책은 안 볼 자유도 있다. 그런데 책읽기에서 읽어내야 할 목표치가 생기면 이런 자유를 누리기란 불가능해진다. 새로운 책과 함께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함께 읽어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1년이면 2,000권 가량의 새로운 책을 읽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맘껏 볼 수 있는 여유는 거의 없다. 게다가 이 많은 책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다 읽은 책은 바로 바로 바꿔줘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아이가 보고 싶은 책이 생각나도 이미 그 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즉 아이는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자기만의 책을 간직하고 두고두고 볼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원하는 책을 신나게 읽자
이렇게 읽은 책 가운데 아이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책이 있을까? 아니, 마음에 남는 책은 있을까? 아마도 ‘나 그거 알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으로 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만한 그런 책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더구나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책까지도 어쩔 수 없이 읽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아이에게 책이란 굉장히 부담스럽고 벗어나고 싶은 것으로 기억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괜히 목표치를 정하고 아이들을 그 틀에 가둬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이란 읽는 것이지 읽어내는 것이 아니다. ‘읽는 것’이란 책이 생활의 일부로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책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읽어낸다는 것’은 책에 끌려다니는 것이다. 따라서 목표를 달성하거나, 꼭 읽어야 할 의무가 사라지고 나면 책을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만 권까지는 아니래도, 목표치를 정해놓고 아이에게 책을 보여주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아이들은 책읽는 기계가 아니라고.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는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실컷 읽게 해 주는 게 더 좋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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