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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우리창작

창경궁 동무

by 오른발왼발 2019.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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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그리고 우정을 배신하다!
《창경궁 동무》(배유안 글/이철민 그림/푸른숲주니어/2015년)

 



조선 영·정조 시대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화두가 되는 시기이다. 조선의 르네상스기라 할 만큼 최대의 부흥기이기도 하지만 왕 개인사의 측면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무술이의 몸에서 태어나 어렵게 왕이 됐던 탓인지 편집증 증세를 보이던 영조, 이런 영조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다가 뒤주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도세자, 이렇게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기에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난관에 부딪쳐야 했던 정조였다. 이처럼 수많은 사연이 있기에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소설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죽음, 그리고 정조의 즉위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배경만 본다면 어쩐지 어린이 역사소설로는 적당치 않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당시 여덟 살 왕세손이었던 이산과 열한 살이었던 정후겸 두 아이의 관계를 통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역사소설로 만들어냈다.
작가 배유안은 이미 『초정리 편지』(창비)와 『화룡소의 비구름』(한겨레아이들)에서 어린이 역사소설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책은 앞서의 책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다 세련되고 정교해진 면모를 보인다.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에 충실하고, 작가의 상상력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리얼리티를 더해준다. 막연한 역사 지식이 삶 속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재탄생하고, 이 과정에서 그 시대를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이른바 요즘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된 팩션이다.
이야기는 참담한 심정으로 정조의 즉위식에 참가한 정후겸이 어린 시절 왕과 막대기를 휘두르며 뛰어놀던 때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어린 시절의 정후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정조의 즉위식 장면에는 비장함이 가득하다. 정조는 정조대로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힘겹게 올라온 자리이기 때문에, 정후겸을 비롯해 정조의 반대편에 섰던 화완 옹주와 홍인환에게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4장 정도의 짧은 대목이지만 이 책의 역사적 배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불어 정후겸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이어지는 접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조금 특별하다. 정후겸은 보통의 책에서 주인공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 정후겸은 정조가 즉위하고 15일 후, 귀양을 갔다가 얼마 뒤 사약을 받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정후겸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작가는 ‘지은이의 글’에서 『한중록』을 읽다가 발견한 정후겸의 흔적이 몹시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전후한 시간을 대궐에서 같이 보냈던 정조 이산과 정후겸의 우정이 어떻게 어긋났는가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실은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정조 이산과 정후겸의 어긋난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우정이 어긋나게 되었던 바탕에 깔린 깊은 열등감과 욕망을 지닌 어린 정후겸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후겸을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정후겸의 일생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고기잡이를 해서 먹고 사는 몰락한 양반 집안의 장남이었지만, 먼 일가뻘인 임금님의 사위인 부마 정치달에게 맡겨지면서 다른 인생을 발견한다. 영리한 정후겸은 뜻밖의 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주변에 잘 보여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두 살 난 딸에 이어 남편인 부마마저 병으로 떠나보내고 위태로운 화완 옹주는 정후겸을 의지하며 양자로 받아들인다. 화완 옹주는 지나칠 정도로 영조의 편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덕분에 몇 달 뒤 옹주는 다시 대궐 안에 들어가 살게 되고 정후겸도 함께 대궐에 가서 살게 된다.
정후겸에겐 몇 년 새 꿈과 같은 대단한 변화가 연거푸 일어나고 있었다.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온 셈이다. 그러나 잔뜩 자만심을 키워오던 정후겸은 벽에 부딪친다. 결코 넘지 못할 산을 만난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세손이었다. 그는 세손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에 빠져들고 만다.
이런 감정은 사도세자가 폐세자가 되고 죽으면서 희망으로 바뀌기도 한다. 세자의 운명이 바뀌듯이 세손 역시도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다. 마치 자신이 화안 옹주의 집에 들어가면서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었던 것처럼 또 한 번 모든 게 바뀔 거란 희망을 품는다. 자신의 양어머니인 화안 옹주야말로 임금님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정후겸이 정조의 반대편에 서게 된 원인을 단순히 그의 열등감과 질투심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양어머니인 화안 옹주와의 관계도 있었고, 당시 치열했던 당파와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세손에 대한 세자와 임금의 사랑이 어린 시절 생활고 때문에 부모로부터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열등감을 자극했고,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코 세손과 같이 되지는 못한다는 질투를 유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적 평가만을 생각한다면 정후겸은 분명 악역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만큼은 정후겸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어느 순간 불같은 질투가 생기고 그로 인해 우정이 어긋나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 독자가 정후겸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마지막은 다시 정조의 즉위식이다. 여기서 정후겸은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실은 정후겸은 질투에 시달리면서도 세손을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도세자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옹주의 양자가 되었을 때처럼 또 한 번의 희망을 품지 않았더라면 사이좋은 동무로 남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오늘 왕이 되신 전하, 우리가 창경궁에서 막대기 부딪치며 놀던 동무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눈물이 흐르도록 그대로 두었다.

이 글을 쓰면서 작가가 정후겸에 대한 깊은 연민에 빠졌듯이 나 역시 정후겸에 대한 연민이 밀려온다. 어쩌면 옹주의 양자가 된다는 건 세손과 동무가 될 수 있었던 행운의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질투심 때문에 그 행운을 버리고 말았다.
창경궁 동무. 역사의 한 장면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하면서도 동시에 우정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62호(2009년 12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 이 책의은 2009년 생각과느낌에서 나온 동일한 책의 재출간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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