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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우리창작

소나기밥 공주

by 오른발왼발 2020.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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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그 역설의 미학

《소나기밥 공주》(이은정 글/정문주 그림/창비/2009년)

 
공주는 모든 여자 아이들이 한 번쯤 꿈꾸는 모습이다. 화려한 궁전에서 살고, 갖고 싶은 건 모든 걸 갖고 있고,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말하자면 공주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공주는 다르다.
소나기밥 공주.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밥이라고는 학교에서 먹는 급식이 유일하다. 때문에 급식 때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많은 양의 밥을 엄청 빠른 속도로 먹어치운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소나기밥을 먹는다고 말했고, 그때부터 공주는 소나기밥 공주가 되었다. 이게 다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면서부터 생긴 일이다.
아빠는 공주의 유일한 가족이다. 엄마가 집을 나간 뒤 아빠가 재활원에 들어가 있는 동안 고모 집에서 지내기도 했지만 이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이때를 제외하면 공주는 열세 살이 된 지금까지 쭉 아빠랑 단 둘이서 작은 방 하나와 타일 깔린 부엌이 전부인 어두컴컴한 반지하에서 살아왔다. 아빠는 가끔씩 일을 나가긴 하지만 환각이 일어나기도 하는 심각한 알코올중독 상태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받아서 겨우겨우 살아간다. 아빠는 공주를 제대로 돌봐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공주의 유일한 버팀목이다. 그런데 그 아빠마저 언제부턴가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빠 스스로 술김에 재활원에 들어가 버린 탓이다.
공주하고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다. 어찌 보면 지독한 역설인 셈이다. 공주하고는 전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데 공주로 불리는 이유는 단 하나. 이름이 공주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딸을 보자 마치 진짜 왕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는 아빠.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바로 공주다.
그러고 보면 공주는 진짜 공주하고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다.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멋있는 성이 대개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위치에 있듯이 공주의 성(집) 역시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주의 집은 다가구 주택 제일 안쪽, 난간도 없이 마치 구덩이처럼 생긴 계단을 내려가야 있다. 게다가 기름보일러를 가스보일러를 바꾸는 공사에서도 공주네만 쏙 빠졌다. 주인아저씨가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보증금을 올려 받고 기름보일러를 가스보일러로 바꾸는 공사를 했는데, 공주네는 보증금을 올려주기는커녕 방세마저 두 달이나 밀려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이 된 듯한 기분에 딸에게 공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아빠는 재활원에 갇힌 신세다. 고모마저 다니던 식당을 그만둬서 연락이 되질 않는다. 공주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손길조차 없다. 공주는 마치 커다란 성의 구석진 다락방에 고립되듯 철저하게 고립된 셈이다.
철저하게 고립된 공주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좁을 수밖에 없다. 공주가 간 가장 먼 곳은 아빠가 있는 재활원. 하지만 아빠를 만나지도 못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버스를 타고서. 이 날의 특별한 외출 말고 공주가 움직이는 공간은 학교, 그리고 동네 슈퍼 정도다. 그나마 대부분의 시간은 고립된 집안에 머문다. 고립이 된다는 건 분명 한 개인에게 위기이자 고통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자기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 한 발짝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다.
공주도 그랬다. 아버지도 못 만나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돌아온 집 안엔 먹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온 집안을 탈탈 뒤져 나온 돈이라곤 560원. 콩나물 몇 가닥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560원에 맞춰 사가지고 나오는 공주의 눈에 띄인 건 공주가 사는 집 202호로 배달 갈 물건들이다. 배고픔에 지친 공주는 자신도 모르는 새 202호 집 딸이라 둘러대며 배달 갈 봉지를 받아든다. 집에 들어와서야 정신을 차리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자기가 왜 이 봉지를 들고 왔는지를 고백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사과까지 베어 물고 나니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공주는 쇠고기 미역국을 끓인다. 다음 날엔 부침개도 잔뜩 부쳐 먹었다. 배가 부르고 숨이 막힌 경험을 처음 했다. 먹은 걸 다 토하고서 집에 와서 죽을 쒀서 숨이 턱 막히기 직전까지 먹었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멈춰지지 않고, 먹으면 숨이 막히고 그래서 먹은 걸 토해내는 일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체한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고 오히려 소화가 너무 빨리 될까 걱정하던 공주가 이제는 진짜로 체해 버렸지만 먹는 걸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202호 아주머니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연하게, 하지만 조금 비참한 모습으로 202호 아주머니에게 고백을 할 기회가 생긴다. 공주는 전화를 하러 나갔다 들어오며 쓰러지고, 길에 쓰러져 있는 공주를 발견한 202호 아주머니가 공주를 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공주는 뭘 먹었기에 기절할 정도로 체했느냐는 말을 들으며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고백한다. 그리고 공주 집에 가서 두 눈으로 보고서야 아주머니는 공주의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
이쯤에서 작가는 자신의 역량은 다시 한 번 발휘된다. 공주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 생활은 공주보다는 오히려 하녀에 가까운 공주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공주의 캐릭터를 만들어낸 데 이어 고립된 공주의 심리를 숨이 막힐 정도로 체하는 사건으로 외면화시킨 것이다. 이는 앞서 체하는 게 뭔지 알지도 못한 채 소나기밥을 먹던 모습과 대비되기도 하지만 억눌려 있던 공주의 내면을 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공주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선 공주의 숨을 막히게 하는 것이 밖으로 분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억눌림이 극에 달했을 때 비로소 이를 분출하게 된다.
여기서 만약 202호 아주머니가 공주의 상황을 보고 무조건 용서를 해줬다면 그만 맥이 빠져 이 작품이 빛이 나질 못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 유쾌하고 다혈질적인 성격만큼이나 사리구분도 명확하고 인정도 많다. 공주를 마트에 데려가 물건 값의 두 배에 해당하는 만큼 아르바이트를 하게 한다. 그것도 공주의 학교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도록.
제13회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를 통해 작가로 첫 발을 내딛은 작가의 작품이다. 첫 작품이지만 그 내공이 만만치 않다.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면서도, 사건을 통해 인물의 성격은 물론 그 내면까지도 보여준다. 벌써부터 작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52호(2009년 7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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