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실, 우리의 자화상
《살아 있었니》(김남중 글/조승연 그림/낮은산/2009년)
살아 있었니?
이 말에는 참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에 대한 반가움,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 지에 대한 안타까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을지에 대한 염려.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감정까지도 말이다.
이 책에는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인 「살아 있었니」도 그 가운데 한 편이다.
<살아 있었니>는 2058년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미래 소설이다. 대부분의 미래 소설이 그렇듯이 2058년 우리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58년 3월 1일 대한방송 뉴스입니다. 오늘 기온은 서울 31도, 평양 29도를 기록하여 어제보다 조금 선선한 날씨였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워져 서울 34도, 평양 33도가 될 것이라고 기상부가 발표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3월 1일의 엄청난 기온도 기온이지만 비 소식도 없다. 전기 부족 때문에 손바닥만 한 텔레비전을 두 집 이상이 같이 봐야 하고, 그것도 하루에 두 시간만 볼 수 있다.
2058년. 먼 미래가 아니다. 이 책을 보는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겪을, 현실적인 미래다. 더구나 아이들은 2058년의 이 상황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지구온난화는 지금 현재 이미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냉동창고가 발견된다.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여기에 집중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일 년에 얼음을 몇 번 먹을까 말까 한 상황이다. 아무리 이 냉동창고가 에너지강제절약법이 시행되기 직전에 마지막 냉동창고로 등록되었다 해도 하루에 일반 가정집 일 년 분 전기를 소비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냉동창고가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 사는 지성이와 설아는 날마다 생선이나 고기를 사서 냉동창고로 가져가는 냄새할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우연히 냉동창고 열쇠를 발견하면서 냄새할아버지와 만난다. 냄새할아버지는 두 아이에게 냉동창고의 비밀을 알려준다. 냉동창고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북극곰이다. 두 아이는 냄새할아버지의 부탁으로 냉동창고로 간다. 북극곰에게 줄 생선과 고기를 가지고. 기자들이 돌아갈 때까지 냄새할아버지를 대신하기로 한다.
하지만 두 아이는 냄새할아버지의 부탁을 지키지 못한다. 냉동창고에 간 첫 날, 북극곰을 보고 싶은 욕망을 누르지 못하고 불을 켰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본 건 사진에서 본 작고 귀여운 북극곰이 아니라 비참한 괴물 모습의 북극곰이었고, 기자들에게도 들키고 만다.
냄새할아버지는 정부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지고, 이 북극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여론 조사가 이루어진다.
‘에너지는 동물보다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는 1번, 아니다는 2번을 눌러 주십시오.’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은 멸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는 1번, 아니다는 2번을 눌러 주십시오.’
몇 번을 누를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우리에게 놓인 셈이다.
“나 북극곰의 먹이가 되어 주고 싶어.”
언젠가 4학년짜리 우리 아이가 이런 말을 해서 날 깜짝 놀라게 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 먹을 것이 사라져 비쩍 말라버린 북극곰의 모습을 본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아이는 ‘자기도 두렵긴 하지만 사람들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거니 자신이 대신 사죄하는 의미’로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 봐’란 노래를 들으며 아이에게 소원이 뭐냐고 묻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지구 온난화를 막는 것.”
아이라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약 지금 이런 여론 조사를 한다고 했을 때 북극곰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개발과 성장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것은 다 눈과 귀와 입을 막을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점점 커져가기 때문이다.
선택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지금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곤 한다. 지금 당장을 견디기 어려워서, 지금 당장 편한 게 좋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도 「살아 있었니」처럼 선택의 순간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나’는 어제 먹은 보쌈과 피자를 마지막으로 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빠가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아빠가 지칠 때까지 덤벼들어 싸우며 맞는다. 그래야 아빠가 한동안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보쌈과 피자를 시켜준 엄마는 그 돈을 채우기 위해 밤에도 더 일을 해야만 했다.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불안해하던 아이가 내린 선택이다.
<멈춰버린 시계>는 아직도 현재진행 중인 광주 이야기다. 살기 위해서, 군인을 피해 가게로 들어온 남자를 매정하게 밀쳐냄으로써 살아남았지만, 그 사람이 떨어뜨리곤 간 시계는 지금도 태엽을 감아주면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듯 움찔거린다.
<검정 고무신>는 바쁜 신발가게가 배경이다. ‘나’는 하나라도 더 팔고 싶은 마음에 어린 두 손녀 손자를 데려온 할아버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다. 작은 아이 신발은 맞는 것이 없다며 돌아선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고마운 걸까? ‘나’는 그제야 기억한다. 할아버지 신발은 검정고무신이었다. 아마 그 순간, ‘나’도 알게 됐을 것이다. 파는 게 직업일지라도 때로는 팔지 않는 게 진정으로 손님을 위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사회의 약자라고 할 수 있다. 「성큼찔끔 성큼찔끔」이나 「검은 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그 선택의 순간은 괴롭고 힘든 게 당연하다. 하지만 무조건 비관적이고 슬프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 선택이 인생에서 그저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책을 내려놓으면서도 여러 가지 선택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한다. 한 개인으로 선택할 일, 현재의 부조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 오래도록 깊은 여운이 남는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54호(2009년 8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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