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 그 삶 속으로
《물고기 소년 과학자 되다》(전신애 글/이진우 그림/청어람미디어/2008년)
1990년대 말을 전후로 위인전의 모습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 위인전을 장식하던 왕이나 장군, 독립운동가 등의 영웅적인 모습은 조금씩 사라지고 새로운 인물들이 하나 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위인전이란 말 대신에 ‘인물이야기’로 본격 불리기 시작한 것도 하나의 변화다.
이런 변화의 흐름은 인물이야기를 통해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과 함께 더 이상 예전의 인물에 만족하지 않는 독자(어른, 어린이)들의 욕구가 맞물린 결과일 것이다. 덕분에 인물이야기는 근 몇 년간 날로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 있고, 각 출판사는 서로 비슷비슷한 인물이야기가 아닌 그 출판사만의 색깔있는 인물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 『현산어보』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정약전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세상을 바꾼 작은 씨앗’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다. ‘작은 씨앗’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이 시리즈는 우리가 보통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다. 농부 이해극, 일제 강점기 자전거 선수였던 엄복동, 역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동춘. 정약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이다. 하지만 일찍부터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던 정약용과는 달리 정약전은 과거나 벼슬엔 별 관심이 없었다. 정약용이 현실주의자였다면 정약전은 이상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두 사람의 차이는 두 사람이 모두 천주교에 연루되어 떠난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정약용이 제자들을 키우며 수많은 저작들을 펴내고 유학자로 학문을 다져나갔다면,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어울려 지내면서 그곳의 바닷 생물에 대해 관찰하고 이를 집대성해서 우리 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서인 『현산어보』를 펴냈다. 또 정약용이 18년이란 긴 유배 생활 끝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형제이면서도 이처럼 서로 다른 점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서로의 학문에 도움을 주고 받으며 지냈던 특별한 사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같은 그의 저작이나 인물이야기로 아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정약전의 경우는 아이들에게 낯설기만 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참 반갑다. 오랫동안 묻혀있던 의미있는 인물을 이렇게 인물 이야기로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이야기는 정약전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이어진다. 맨 첫 장면에 잠깐 나오는 어린 시절 낚시를 하던 장면을 빼고는 모두가 그렇다. 실학에 눈을 뜨고, 서양 과학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서양 과학 기술을 발전시킨 힘이 되었던 천주교의 평등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후 정약전의 행보를 짐작하게 해 준다.
뒤이어 이런 정약전의 행보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오는데, 이는 정약전이 배운 것에 대해 얼마나 실천을 하며 체화시켜 나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당 한가운데 의자에 놓고 사람을 앉히고 방에는 초상화를 그리거나, 나무로 직접 지구의를 만들거나 하는 식이다. 마당에 앉은 사람의 초상화를 방에서 그리는 건 바늘구멍사진기의 원리를 이용해 방 전체를 사진기처럼 만든 것이고, 지구의는 북극을 기준으로 경도와 위도를 계산해 그려 넣는 것이다. 과학에 문외한인 탓에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기본 원리를 듣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궁금증이 일어 한 번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정약전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유배를 떠난 흑산도에서 『현산어보』를 펴낸 일이다. 정약전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섬사람들과 함께 물고기도 잡고 해초도 뜯으며 그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러자 섬사람들은 아이들의 학비 삼아 혹은 그냥, 해산물을 가져오곤 했는데 그 이름을 물으면 모른다고 하거나 안다 해도 사람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정약전은 어보를 만들기로 한다. 어보를 만드는 일은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무엇보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다를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다. 정약전은 장창대라는 아이의 도움을 받아 함께 물고기를 잡아 오기도 하고, 그 물고기를 해부하기도 하면서 어보를 만들어 나갔다. 어보는 물고기의 이름을 속명과 함께 적었고, 생김새는 물론 그 맛과 함께 주로 잡히는 시기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책은 정약전을 도와 함께 일을 한 장창대의 모습을 잘 살려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장창대는 정약전이 어보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바다에서 살아왔고, 눈썰미도 좋았고, 공부에 대한 열정도 강했다. 물고기나 해산물, 그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던 정약전이었기에 장창대란 인물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 큰 성과를 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인물이야기는 그 성격상 자칫하면 주인공 한 사람에게만 관심이 쏠리기 쉽다. 하지만 작가는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장창대의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냄으로써 장창대를 또 한 사람의『현산어보』 저자로 확실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보며 정약전을 돋보이게 한 것은 『현산어보』 이전에 그가 살아가는 태도였다. 상어 때문에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생기자 외지에서까지 무당을 불러와 용왕제를 지내는 모습을 지켜 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실학을 추구하는 정약전은 이런 일이 부질 없음을 알지만 이를 왜 말리지 않느냐는 장창대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저 사람들이라고 그 이치를 모르겠느냐. 달리 방도가 없으니 저렇게라도 빌고 나면 바다에 나가는 게 덜 무서운 게지.”
이처럼 섬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근본부터 이해하고 다가갔기에 섬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며 섬사람들 속에서 하나가 되어 살 수 있었으리라 싶다. 『현산어보』를 펴낸 것도 섬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흑산도 사람들은 우이도로 가려는 정약전을 못 가게 막아서기도 했다. 그만큼 정약전이 그들 속에서 하나가 되어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약전은 유배가 해배되기 전에 그곳에서 죽게 됐고, 『현산어보』는 가족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묘지기는 그 책을 뜯어 벽지로 발랐다고 한다. 지금 전해지는 건 정약용이 자식들을 시켜 남아있는 부분을 베껴 쓰고 정리한 것이란다. 이런 사연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또한 없지만 적어도 어보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22호(2008년 4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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